소설리스트

경영의원-215화 (215/350)

215화

“내 의지만 있으면 되는 건가?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건 상관없고?”

은 파파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저 아이들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다가 우뚝 서 일어나신 것을 보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바래지 않은 품성을 보았고, 그 품 안에 많은 이들을 품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외면하고 버린 가치들이 그 품 안에서 다시 자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은 파파의 말이 맞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 나는 저들을 외면하지 못할 거다.

“내가 그 유산을 받는다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지?”

“더 이상 생에 미련이 없는, 하여 그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노인네 일곱의 목숨을, 그 힘을 얻게 되시겠지요. 저희의 미련, 그 모든 것을 도련님께서 떠안아주신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은 파파의 눈은 무정(無情)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금가장의 남은 일곱 형제를 죽여 달라는 명령을 내려도 토 달지 않고 이를 수행할 거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가.

내게 모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내맡기고, 희망도 소망도 모든 것을 유산으로 맡기고, 자신들은 내 칼이 되어 생을 마감하겠다는 건가.

목숨을 건 사람의 결심이란 어린 사람의 것이나 나이 든 자의 것이나 저마다의 무게를 지니기 마련이지만, 은 파파를 비롯한 십이월들에게서 전해지는 무게는 남달랐다.

……무겁군.

“아니 되겠습니까?”

내가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은 파파가 되물었다. 어려울 거 같다 말해도 은 파파는 내게 힘을 빌려줄 거다. 십이월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러나 내가 그들이 유산을 짊어질 때와는 다르겠지.

“일단 저들의 삶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그것도 좋지요.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요.”

은 파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십이월과 그 가족들이 안부 인사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는 그들이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어렵네요. 사람의 몫숨 값을 받는 일이니 쉽지는 않겠지만요, 사람을 얻어야 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이런 일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나도 그랬다.

카리스마를 발휘해 모실 만한 사람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거나, 아니면 부와 명예 따위를 약속하는 일일 거라고만 상상했지.

후손의 미래를 책임지고 바꿔 달라는 일일 줄이야.

[그런 거라면 당신 형제들 중에서 당신이 적임자긴 하죠. 우리는 병든 걸 고치는 일을 하잖아요. 그들의 눈에는 당신이 병든 삶의 굴레를 고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 거예요.]

그건 이제부터 봐야 알겠지.

십이월들의 제자, 혹은 자녀와 손주들은 어느 골목에서 각자의 일터로 흩어졌다. 나는 그중 한 명을 찍어 따라갔다. 은 파파 2의 가족이었다.

[이전에도 손주가 있었지만, 마약에 빠져서 죽여 달라고 사정을 했었다 했죠?]

그렇지.

그리고 은 파파 2의 손에 죽지 않았더라도 아마…….

[슬픈 얘기는 그만해요. 우리는 그 굴레를 끊을 예정이니까요. 아, 웬 건물로 들어가는데. 항아객잔이라. 저기가 하오문의 마약 총판일까요?]

가능성이 높지.

나는 그녀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주변 일대를 살폈다. 그리 번화한 곳은 아니다. 어느 정도 환락가의 분위기가 있지만, 전포 거리 수준으로 낙후되진 않았다. 마약에도 급이 있으니 이곳에서 다루는 마약은 상, 중, 하 중에서 중급 정도에 해당되겠지.

[전포거리에 도는 약이 하급일 거고, 항아가 있던 항아루에서 다루는 게 상급, 혹은 최상급이겠네요.]

항아의 피와 살로 만드는 도화는 최상급이 아니라 특급 수준이겠지.

하지만 소량의 특급 제품으로만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어렵다. 특히 하오문같이 규모가 있는 곳이라면 S급 아니라 B급, C급 제품군이 견인하는 매출이 클 거다.

여기가 하오문 마약거래의 심장부다.

거리에서는 전생의 뉴욕 뒷골목에서 나던 미묘한 향이 풍겼고, 사람들은 꽃향기에 취한 벌과 나비, 나방처럼 항아객잔으로 들어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이 많았지만 특히 성인 남성이 많았고, 간혹 기녀로 보이는 이들도 들어갔다. 아이들은 심부름을 왔는지 들어가서는 바로 나왔는데, 어른의 술심부름을 하다가 한 모금 꼴깍 마시는 것처럼 마약 봉지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갈 길을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시진 정도 자리를 잡고 항아객잔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약을 사서 바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그 안에서 약을 했는지 취했거나 약이 떨어졌을 때의 공허한 눈을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딱히 약을 한 거 같진 않지만 다소 흥분한 얼굴을 하고 나왔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맞아요. 기녀들은 들어갔다가 안 나오는 거 같던데. 안에서 일을 하나?]

한 시진을 지켜보다가 일어나, 객잔에서 방금 나온 한 사람을 찍어 따라갔다.

안에서 약을 한 듯, 잔뜩 취해 있는 그는 한껏 고양된 얼굴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왕처럼 고함을 지르거나, 주변의 기물에 괜히 삿대질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 상인들은 익숙한지 표정을 구기면서도 뭐라 말을 못 하고 눈을 흘기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상을 다 가진 듯 굴던 중독자는 점차 약이 깨면서 표정이 달라졌다.

모든 것을 얻었다가 모든 것을 잃는다면 저럴까? 천천히 차오르는 공허감이 그의 얼굴에 절망을 들이부었다. 그러더니 이내 가던 길 골목에 털썩 주저앉아 바닥을 맨손으로 긁기 시작했다.

[약효가 떨어졌을 때의 부작용이 크네요. 마약이라는 게 원래 그렇긴 하지만, 유독 심해요.]

“아버지! 여기서 뭐 하세요! 또 약을 하셨어요?!”

“아니, 아니 그게…… 그게 미안하다. 딱 한 번만 더 하려고 했는데…….”

“그 돈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할머니를 의원에 보이려고 모은 돈인데, 그 돈을 어떻게……! 아버지가 번 돈도 아니잖아요! 번 돈으로 하면 누가 뭐래요? 돈 될 만한 건 다 갖다 팔아먹고, 남이 벌어오는 걸 멋대로 손대고! 진짜 왜 그래요, 그만하세요. 제발!”

“미, 미안하다……. 근데 너 돈 있지?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자. 응? 딱 한 번만! 한 번만 하고 그만둘게. 일도 하고, 응? 아니 근데, 너도 해보면 안다. 그러고서 주사위 한 번만 던지면 우리 집도 궁궐 같은 곳으로 옮기고 발 뻗고 누울 수 있을 거야. 응? 너 한 번만 더 몸을 팔면 안 되겠니? 그래서 내 약값도 주고, 판에 낄 종잣돈도 좀…….”

“아악, 아버지!”

그의 자식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와 다투는 소리는 그야말로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당장 저 약쟁이를 점혈로 쓰러트리던지 칼로 입을 막아버리든지 하고 싶었다.

눈을 돌렸다. 거리에는 그런 약쟁이가 반이었다. 또 그런 약쟁이를 말리거나 붙잡고 울부짖거나 약쟁이에게서 도망치는 가족과 지인이 반이었다.

거리에는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연 가게에는 주인들이 퀭한 눈으로 의자에 기대 누워 아편을 피웠다. 주인이 약에 취해 있는 사이 사람들이 물건을 훔쳤다. 딱히 거지로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도둑들을 따라가 보니 그 물건을 또 저급 마약으로 바꾸고 있었다. 약을 파는 이들의 눈에도 생기는 보이지 않았다. 약을 판 이들이 자리를 떠 쫓아가 보니 그들은 그 돈을 상납하고 자신들이 쓸 약을 샀다.

중간 판매자들의 창고는 항구 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들은 하오문의 약 창고에서 물건을 슬쩍 해 마진을 챙기고 있었다. 방금 전 거래를 마친 자는 감시하고 있던 하오문 문도들에게 도둑질을 들켜 죽을 만큼 맞고 돈을 빼앗겼다.

한 편인 자들을 불라는 말에 그자는 버티다가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모조리 끊기고 나서야 자신과 함께 약을 빼돌린 이들의 이름을 불었고 그렇게 힘줄이 끊어진 채로 바다에 버려졌다. 다시 물 위로 떠오를 때는 퉁퉁 불어터진 시체 상태일 터다.

물에 빠진 자와 함께 약을 횡령한 창고 담당자들이 하오문도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 줄줄이 끌려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시 항아객잔이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인가?”

객잔의 뒤편으로 들어가자 약이 쌓여 있는 창고가 나타났고 그곳에 옷을 대충 걸쳐 입은, 아까 은 파파 2에게 손주를 보여주려고 애쓰던 중년 여인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입에 문 곰방대에선 역시나 아편의 냄새가 났고, 드러난 살갗은 거친 폭력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기생충만도 못한 벌레들. 일일이 잡아 죽이는 것도 일이야. 하아.”

여인은 곰방대를 톡톡 털어 그 재를 횡령을 저지른 자들의 눈에 떨어뜨렸다. 아직 타오르는 불씨가 들어갔는지 고통에 찬 신음 소리들이 창고를 울렸다.

“적당히 처리하고, 난 다시 가야 해. 아직 손님이 안 끝났어.”

중년 여인은 피곤한 얼굴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하오문도들도 귀찮은 표정을 하곤 곧바로 횡령한 자들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바닥에 피가 흘렀고 고통에 찬 신음이 이어졌다. 중년 여인이 사라진 문 쪽에서는 아까 들었던 아이 울음소리와 “미안하다, 엄마 일해야 해. 좀 이따 놀아주마.” 하는 말소리가 작게 들렸다 사라졌다.

“천것들의 삶을 관음(觀淫)하는 놀이는 어떠십니까, 제법 재미가 좋지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바로 지척, 검을 쥔 채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자리. 항아가 와 있었다.

기이한 말을 하는 항아 말고, 하오문주이자 은 파파의 제자인 그 항아 말이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

[미, 미안해요! 나도 몰랐어요! 저 안의 상황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만―.]

아냐. 홍령 네 문제가 아니야.

나 또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주변을 스치는 바람인가 싶었다. 좀 더 가까이 왔다면 알아차렸겠지만…….

무공이 약한 데도 하오문의 문주가 되었다면 그럴 만한 다른 재주가 있겠다 싶었는데, 이 정도로 기척을 죽이는 데 능할 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 한해서는 은 파파나 십이월보다 뛰어남이 분명하다.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찌 장주의 아픈 손가락을 해하겠습니까. 장주께 귀한 아들이면 제게도 귀한 손님이요, 도련님이신데.”

“……그동안 내 정체를 탐문했나 보지?”

“그럼요. 그 깐깐한 노인네들이 아무나 도련님이라고 부를 리 없으니까요. 종적을 쫓아보니 어느 순간 막내 도련님이 사라지고 김진이라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더군요. 막내 도련님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무니 속이기가 어렵지 않을 터. 거기에 스승님이 함께하시다니, 더 파볼 필요도 없더군요.”

나름 신경 써서 움직인다고 했지만 역시 알 만큼 아는 사람을 속이기는 쉽지가 않군.

“그래,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경계하지 않으셔도 된다 말씀 드렸습니다. 아까의 일이야 저와 노인네들 사이의 일이옵고, 도련님과 저 사이에는 아직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하오문주의 표정은 정말 유순해 보였다. 은 파파 앞에서는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당연히 저 표정도 연기긴 하겠지만.

표정을 가장하는 것도 원하는 게 있을 때의 얘기지.

[여기 와서는 계속 그 얘기를 하게 되는 거 같네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당신에게 원하는 것투성이예요.]

홍령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장주의 유산을 취하러 오셨지요?”

“그래, 맞아.”

“허면 가져가십시오. 이 하오문을 취하십시오. 하오문의 이름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과 재물과 정보, 원하시는 만큼 다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오문주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무릎을 꿇다 못해 머리를 바닥에 박을 기세였다.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치켜들고, 금이 간 유리 같은 눈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진정 장주의 친아들이 맞다 하면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단 한 톨의 먼지도 내어드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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