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하물며 나는 지금에야 내 기틀을 잡았을 뿐, 사실 아직도 다른 형제들이 가진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에요.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죠. 차별점이라고는 지금처럼 의술을 행할 수 있다는 거 정도? 근데 다들 돈과 힘이 없어 보이진 않거든요. 의원을 부르려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을 거 같은데.”
“막내 도련님은 생각이 많은 분이시군요.”
“많아야죠. 은 파파 같은 실력자들이 여섯이나 아무 대가 없이 나를 골랐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거든요. 뭘 원하십니까? 그걸 정확히 알아야 나도 제대로 줄 수 있을 겁니다.”
절대 간단한 걸 원하진 않을 거다.
큰 힘을 얻는 데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아닌가.
“저희가 원하는 것, 그건 하나가 아니랍니다. 여러 가지가 얽혀 있지요. 설명하려면 다소 복잡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중 하나가 지금 밖에 도착한 듯해요.”
[밖에 누가 왔어요. 여러 명인데요?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옷들에, 와! 예쁘다……! 항아도 예쁜데 지금 온 분은 다른 의미로 예쁜데요? 어? 은 파파 2랑 싸우는데요?]
“내려가 보시지요. 가서 설명드리는 게 빠를 거랍니다.”
그림자들의 몸에서 침이 저절로 쑤욱 빠져나왔다. 작은 근육을 세심하게 다루는 데 통달해 있는 이들다웠다. 보통이라면 힘을 줄수록 침은 더 안 빠지는데 말이지.
“예가, 예가 어디라고 네가 얼굴을 디밀어! 썩 꺼지지 못해!”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말하십니다, 사고.”
“누가 네 사고냐? 난 너 같은 사질 둔 적 없다!”
“그럼에도 당신은 제 사고이지요. 허니 당신의 주름진 목이 여태 붙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지금 해보자는 게야?!”
아래로 내려갈수록 말이 거칠어졌다. 문밖에서 전해지는 기세만으로도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니, 진정하십시오. 문주님께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네놈이야말로 그러는 거 아니다. 하나뿐인 자식새끼라는 게!”
“이모님, 고정하세요. 제발, 저희 싸우러 온 거 아니에요!”
“니들 낯짝 들이대는 거 자체가 선전포고다, 이것들아!”
내가 문을 연 건 그때였다.
“무슨 일이야?”
“도련님!”
은 파파 2가 나를 돌아보았고, 그 뒤에 홍령이 말한 것처럼 화려한 차림의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저 사람이군.
항아도 본 홍령이 감탄을 금치 못했던 아름다운 사람.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 화사한 궁장을 차려입고 한 떨기 꽃처럼 무리의 가운데 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서른은 확실히 넘은 거 같은데, 마흔? 아니다, 이십 대인 거 같기도 하고. 잠깐만, 저거 주름인가? 그럼 오십이 넘은 건가?
나이를 전혀 분간할 수 없는 미인이 나를 보고는 생긋 미소 지었다.
나이를 떠나서 정말 사람이 홀릴 수밖에 없는 미인이다.
항아가 토끼 같은 미인이라면 이쪽은 여우 같은 미인이라고 할까.
“도련님이라면, 설마? 허나 내가 알기로는 저런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김진이다. 당신은 누구지?”
“김진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아니다, 넷째 남편의 성이 김 씨였지. 그 아이가 낳은 아들이라면 이 정도 컸겠구나. 허나 출가외인의 아들을 이 노인네들이 도련님이라 부를 리는 없는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 뒤에서 은 파파가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걸어 나왔다.
뭐지, 기세가 다른데?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나도 제법 은 파파의 다양한 면모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무자비하고 강한 그림자, 다정하고 장난기가 많은 할머니. 그 두 가지가 내가 아는 은 파파의 대표적인 얼굴.
헌데 지금 은 파파는 무척이나 위엄 있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눈앞의 미인을 대하고 있었다.
“어찌 신경 쓸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승님. 저는 하오문의 문주입니다. 세상에 제가 모르는 것이 있어선 안 될 일이지요. 황제의 속곳 색깔도 반나절이면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바로 스승님 아니십니까.”
[하오문주요? 이 사람이요? 근데 스승이라고요?]
역시 그랬었군.
나는 내 옆에 선 십이월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점소이와 기녀, 그리고 그림자.
이 두 가지를 겸하는 존재들이 자리할 곳이라면 역시 하오문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하오문주의 스승이요? 그렇다면 은 파파가 전대 하오문주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잖아?
태양객잔의 주인을 하오문의 문도로 만들어주었을 때부터, 은 파파와 하오문의 관계가 보퉁 관계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런 게 가능한 존재는 하오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뿐이지.
“정보에 있어서 중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라고 가르치기도 했지.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어찌 아닙니까? 스승님과 사고, 사숙들이 도련님이라 부르는 존재라면 제겐 그 무엇보다 중한 존재지요.”
하오문주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아까 십이월들이 나를 훑을 때보다 더욱 노골적인 눈빛.
불쾌하다.
내 손이 허리춤의 검 홍령으로 향했다.
“―!”
사각―
아주 작은 것을 베어내는 소리와 함께 나는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뭐 하는 짓이지?”
“머리에 먼지가 붙었더라고. 떼어주려고 했는데 예민하게 구네.”
바닥에 살포시 떨어진 것은 먼지도 머리카락도 아니었다. 내가 벤 것은 하오문주가 치켜든 비단 부채의 끝자락이었다. 내 발검을 막아낸 거다.
한 문파의 문주가 이 정도도 못 하면 말이 안 되지. 정보를 사고파는 문파지만 그래도 중원에 이름난 문파요, 은 파파의 제자인데.
[은 파파의 제자치고는 오히려 약하단 느낌인데요.]
하오문이잖아. 무력이 부족해도 문주를 맡을 만큼 다른 곳에 강점이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강점은 아마도…….
“스승님이 틀리셨군요. 이런 자가 스승님 곁에 있는데 어찌 중하지 않은 정보라 하겠습니까?”
“흥. 무슨 볼일이더냐. 이곳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더니.”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직접 올 수밖에요. 스승님이 돌아와 계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잘 되었군요.”
하오문주는 품에서 웬 두루마리를 꺼내 은 파파에게 던졌다. 은 파파는 그것을 받아들어 쫙 펼쳤다. 바로 옆이었기에 나도 그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관의 인장인데요? 흐응, 전포(典鋪)거리면 이 일대겠죠? 이곳을 정비한다는 내용이네요. 좋은 거 아닌가?]
전생으로 치자면 재개발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슬럼을 재개발하는 건 행정 차원에서는 할 만한 사업이지.
단 전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생에선 그래도 땅 주인이나 거주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이를 진행할 수 없지만, 이곳에선 그게 아니라는 점일까.
“이곳 전포 거리의 땅은 우리 항아루가 전부 사들였습니다. 남은 곳은 이곳뿐……, 허나 이 정도는 관에서 임의로 밀어버릴 수 있지요. 배상을 요구할 수는 있을 겁니다. 얼마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이 소녀, 그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이, 이것이! 결국 이곳을 부수겠다는 거냐! 이건 장주의 것이야. 장주가 키운 거다! 네가 감히!”
“그래서입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천금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면 만금을, 억금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헌데 거절하신 건 스승님이십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죠.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고요.”
“항아, 너, 너 이놈!”
지금 객잔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도 항아고, 하오문주의 이름도 항아로군. 그래서 항아루였나.
“얼마든지 발악하셔도 좋습니다. 성주를 유혹하셔도 좋고, 죽이셔도 좋습니다. 신임 성주가 될 사람도 제 말을 들을 겁니다. 또 죽이신다 해도 그 다음 성주도 제 말을 들을 겁니다. 황제를 유혹해서라도, 저는 할 겁니다.”
몇몇은 기가 찼고, 몇몇은 혈압이 올라 저대로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얼굴을 했다. 정말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이들 중 몇몇은 그대로 칼을 뽑을 거 같았다. 그 사실을 하오문주도 알았는지 한 발짝 물러나며 제 옆에 선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사실 오늘은 그 일로 온 게 아닙니다. 다들 가서 얘기들 나눠요. 나는 먼저 가볼 테니.”
그리고는 몇몇 호위들을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십이월은 저걸 쫓아가네 머리채를 잡네 마네 투닥거리다가―,
“으아앙, 으아아앙―!”
아기 울음소리에 모두 한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아이구, 아가야. 왜 우니? 할머니 보러 왔잖니. 울지 말고. 자, 할머니한테 가자.”
하오문주의 뒤에 있던 사람들 중 갓난쟁이를 안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은 파파 2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오지 말라니까 왜 왔어.”
“그래도 아기 얼굴은 한 번 보셔야죠.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흥. 그 애도 커서 죄 마약쟁이가 되어버릴 거, 뭣 하러 봐?”
“어머니!”
“썩 꺼져라. 괜히 정 붙였다가 눈 퀭한 채로 죽여 달라고 내 앞에 서성거리는 꼴 두 번은 못 본다. 가기 싫으면 내가 들어가마.”
은 파파 2는 싸늘하게 돌아서 전당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갓난쟁이를 안은 여인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물러났지만, 하오문주가 데려온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십이월들에게 다가갔다. 젊은 청년도 있었고, 신생 또래의 어린애도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하나같이 친자식이거나, 제자거나, 혹은 제자의 아들딸이거나 그랬다.
하오문주가 데려온 사람들은 그림자들의 가족이었다.
십이월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가족들을 맞았다. 몇몇은 찝찝한 얼굴을 했고, 몇몇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고, 몇몇은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전부 하오문 사람들이겠지?”
나는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은 파파에게 물었다.
“그렇지요. 특히나 요직에 있는 애들이 많습니다. 다들 여기 처박히기 전에는 장로니 뭐니들 했으니, 제자나 딸아들들도 돈 되는 곳이라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지요.”
“돈 되는 자리라면, 역시 마약인가?”
“그렇지요. 사업으로만 다루는 애들이면 좀 나은데, 약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애들도 많습니다. 약이 아니라면 기루나 객잔을 하고 있지요. 또는 우리처럼 그림자로서 살아가고, 아니지, 살아간다는 말이 우습군요. 지금 온 아이들보다 죽은 아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은 파파의 눈빛이 쓸쓸했다.
“또 저 아이들의 아이들도 그렇게 될 겁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고, 약에 빠져 병들고, 그나마 몇몇만 살아남겠지요. 그나마도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애들은 몇 없을 겝니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런 일들뿐이고, 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결국 그렇게 되고 말겠지요.”
어쩐지, 십이월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도련님, 쇤네는 이 굴레를 끊고 싶습니다. 적어도 저 아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도 줘 보고 싶어서, 그래서 도련님이었습니다.”
은 파파 2에게 외면당한 갓난쟁이가 다른 십이월들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의 얼굴에 애틋함이 피어올랐다. 아이에게 정이 가면서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그 아이의 미래를 훤히 보고 있는 노인들의 눈빛.
“도련님, 장주의 유산에 더해 우리들의 유산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