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계단 복도에도 비밀공간이 있네요. 어쩐지, 규모에 비해 작아 보인다 했어요.]
일전에 그랬잖아. 중요한 사업 얘기를 해야 할 때면 아버지는 꼭 상대를 집으로 불러서 얘기했다고. 다원이나 객잔, 주루 같은 곳은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있다고 말이지.
[맞다, 그런 얘길 했었죠? 덕분에 융중다원에서 비밀 공간을 찾았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조심성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본인이 해본 경험이 있어서 조심한 거였다.
아까 마작을 하는 방에도 남의 패를 엿볼 수 있는 비밀공간이 있지 않을까?
[잠깐만요. 내가 보고 올게요.]
홍령은 계단 아래로 휙 사라졌다가 이내 돌아왔다.
[진짜 있네요?! 자리마다 패를 구경하기 좋게 눈구멍이 나 있어요! 세상에, 세상에!]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돈을 벌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도박에 이용되는 게임들은, 특히 패를 이용하는 마작이나 고스톱 등은 상대의 패를 모른다는 점이 게임성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게임에서 상대의 패를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면, 게임을 조작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
한 사람을 끝없이 이기게 해주는 일도, 한 사람을 기둥뿌리 뽑을 때까지 거덜 내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본업은 프로 도박사가 아니다.
이곳의 전신은 전당포.
처음에는 게임을 이기게 만들어 도박의 짜릿함을 알게 해주고, 점점 그 짜릿함에 중독되어 갈 즈음 판을 키우고 승률을 조작해 재산을 털어먹다가, 끝내는 값나가는 물건을 헐값에 저당을 잡히거나 팔게 만들어 이득을 보는 사업이 아버지의 사업이었을 거다.
[돈이 될 거 같긴 하네요. 도박에 빠진 사람은 도박판에 앉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니까요.]
돈이 되기야 하겠지. 타인의 인생을 쥐어짜는 일은 대체로 돈이 되니까. 그걸 얼마나 쥐어짜느냐에 따라 사업의 도덕성이 판가름 나는 거고. 이곳 금 씨 전당포는, 수많은 인생들을 파멸로 몰아가며 돈을 벌었겠지.
아버지가 이곳의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이유를 알겠다.
[부끄러웠던 걸까요? 난 좀 이해가 안 가요. 자기가 저지른 일이잖아요. 나쁜 일이라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을 텐데, 욕먹기 싫으면 안 하면 될 일이지.]
홍령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 맞는 말이다.
허나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아버지의 일을 긍정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전생의 나도 그랬으니까.
아니,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테다.
항상 옳은 생각을 가지고 옳게 행동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쉬운 길은 가깝고 편하다. 인간은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선(善)을 욕망하는 존재이기도 하지.
“드디어 뵙게 되는 군요, 금태양 도련님.”
아버지의 일에 한 손 거들었을, 어쩌면 더한 지독한 짓들을 저질러왔을지도 모르는 금가장의 그림자들.
이들은 무엇을 욕망하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까.
더욱 편리한 무언가를?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선(善)을?
“우리는 십이월이올시다. 알다시피 전대 장주의 그림자로 일했지. 원래는 열둘이었는데, 몇 명은 일 하다가 뒈지고, 또 몇 명은 나이 먹어 뒈지고, 그러다 보니 이거밖에 안 남았습디다.”
내 앞에는 아까 기척을 숨기고 나를 살폈던 다섯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은 파파 2도 이들 중 한 명이겠지. 그러면 총 여섯 명이다.
[엄청나네요. 은 파파 정도의 실력자가 여섯 명이라니. 뭐든 할 수 있겠어요.]
“헌데 아까 우리 기척을 어찌 알아챈 거요? 이 나이 먹고 심장 멎어 뒈지는 줄 알았지 뭐요. 내 듣기로는 자리보전을 하는 애기 도련님이라고 하던데, 요새는 뭐 의술 실력이 갑자기 뛰어나졌다 해서 그런 갑다 했더니. 또 무공은 언제 익혔다나?”
“우리 정보력도 땅에 떨어진 거지요. 뒷방 노인네들이 된 지 오래가 아닙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들 노인답지 않게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내 눈빛부터 숨 쉬는 것, 귀 기울이는 것, 작은 동작 하나까지 정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관찰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들이었다.
[그냥 뒷방 노인네들이라고 하기엔 예사롭지 않네요. 뭐 하던 사람들일까요?]
그림자는 언제부터 그림자일까?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식으로 암살자나 스파이를 키우는 비밀문파 같은 게 있단 얘기는 들었다. 허나 그런 단체를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전생에서 프로나 국가대표 운동선수 하나가 성장하는 데 드는 비용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몇억 정도는 우습지. 그냥 평범한 사람도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드는 돈이 억 대라는데, 전문 암살자를 키우는 데는 대체 얼마의 돈이 들까?
돈뿐 아니라 체계도 있어야 하고, 가르칠 사람도 필요하고. 그런 완벽한 조직이 아버지 밑에 있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다들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 같이 성장해왔다고 봐야겠지.
이들은 원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원래 하던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된 것이다.
아니지. 원래 하던 일을 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러면 다들 하는 일들은 달리 없으신 겁니까?”
여태처럼 김진으로 대할까, 아니면 금태양으로 대할까 하다가 이들에게는 우선 금태양답게 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그림자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분들이다. 존중할 이유는 충분했다.
“달리 하는 일이라니. 삭신들이 쑤셔서 뭐 일을 할 수가 있어야지요.”
“객잔 주인이나 루주가 하는 일이 몸 쓰는 일이던가요. 사람 관리하고 돈 관리하는 일인데.”
내 말에 모두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이내 가라앉았다.
한 번 찔러봤을 뿐인데 정곡이었군.
[뭐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잖아.
여기는 항주. 마약이 문제가 될 정도로 유흥이 활발한 도시.
하오문의 근거지가 있고, 아버지는 항주의 마약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그쪽 사업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유흥을 즐기려면 즐길 공간이 필요하고, 또 남자들은 약이든 술이든 취하면 여자를 찾는다. 당연히 객잔, 주루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일하던 점소이나 기녀들이 아버지의 손발이 되었을 거다.
은 파파와 하오문 간의 알 수 없는 관계까지 생각해보면 이들이 그쪽 인물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
“자네가 말한 게야?”
“무슨 소리? 나는 자네들에 대해서는 도련님께 입도 벙끗 안 했다네. 오로지 우리 도련님이 홀로 알아낸 게지. 내가 그러지 않았나. 태양 도련님은 참으로 영민하다고 말이야.”
은 파파는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각자 주머니에 쌈짓돈 챙길 구멍은 있지만 실질적으로 일선에서는 물러난 지 오랩니다, 도련님. 사람 관리, 돈 관리도 다 체력이 있어야 하지요. 왕년에야 한 가닥들 했지만 지금은 성한 곳이 없는 노땅들입니다요, 홀홀.”
“안 그래도 도련님 오시기를 기다렸지요. 요새 허리가 아파 가지고.”
“이 여편네야, 내 무릎이 먼저야.”
“다들 물러나지 못해? 콜록, 숨을 쉴 수 있어야, 콜록, 뭘 하든지 하지! 내가 먼저네!”
은 파파도 몸이 성하질 않은데 다른 그림자들이라고 다를까. 살벌한 눈빛을 보내며 나를 품평하던 늙은 그림자들은 아픈 곳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내게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태양의원에 온 거 같아요. 내가 아프네, 아니네 내가 더 아프네, 내가 먼저 치료를 받아야겠네. 딱 그 모습인데.]
“여기 항주가 의원이 없어서 저럽니다. 아무래도 써먹으려면 임시방편으로 치료라도 해야겠군요.”
“그건 할 수 있지만, 의원이 왜 없어?”
“사정이 있읍죠. 때문에 약도 귀합디다. 아까 거지들이 금창약에 달려들었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신생의 옛 모습이 생각나는 어린 거지의 간청에 금창약 봉지 하나를 던져주었다가 거지들이 피라도 볼 기세로 싸워댔던 것이 좀 전이었다.
의원도 없고 약도 귀하다면 왜 그 난리가 났는지 이해가 간다.
[금창약은 바르는 데도 쓰지만 내복약으로도 쓰니까요. 외용에 비하면 효과가 대단치는 않지만 거지들에게 그만한 상비약도 없겠죠.]
상비약 수준이겠어. 거의 만병통치약 취급이겠는데.
“그럼 일단 치료부터 합시다. 하면서 얘길 들으면 되겠네.”
침상이 필요했기에 다시 위로 올라가 차례차례로 십이월들의 진맥을 봤다.
나이에 비해서는 확실히 건강한 편이었지만 은 파파처럼 하나씩 꼭 중병인 곳이 있었다. 기침을 심하게 하던 노인은 폐가 파업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숨넘어가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아이고야, 콜록, 고슴도치가 다 됐네.”
“그러고 가만있으시고요, 다음 분은 이쪽에 누우시고.”
내 방은 방이 컸던 만큼 침상이 여럿 있어서 한 번에 여러 명을 눕혀 침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면담하듯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처음의 살벌했던 분위기와 달리 다들 내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원래 가려운 곳 긁어주는 사람이 제일이랬어요. 하물며 지금은 아픈 곳을 낫게 해주고 있잖아요. 이중 절반은 침 다 맞고 일어나면 통증이 절반은 가실걸요?]
홍령은 간만에 내가 의술을 펼치니 신이 났는지 자기도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하겠다며 내 손에 빙의해서 맥도 짚고 침도 놓았다. 워낙 병증이 깊지만 의지와 체력으로 버티는, 상태가 보기 드문 이들이라 간만에 홍령의 경험이 빛을 발휘했다.
“어머. 안 아프네? 침 한 대 맞았을 뿐인데 허리가 안 아프네요? 어쩜, 우리 대장님이 막내 도련님을 그렇게 예뻐라 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아무렴 이런 도련님이면 뭐든 해드려야지요. 뭐가 필요하신가요? 성주라도 유혹해드릴까요?”
젊은 시절에 사람 수백은 홀렸을 게 분명한 노파가(근데 지금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다. 저 나이에 성주를 유혹해 주겠다는 자신감을 보라.)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태도야 얼마든지 꾸밀 수 있겠지만 도통 가짜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산, 불로불사의 보물도 있지만 은 파파가 말한 유산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얻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던가?
“그런 건 됐고,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뭐든 물어 보시와요.”
“왜 접니까? 아버지 자식은 나 빼고도 일곱 명이나 있는데.”
이들은 이미 내 사람이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마 내가 그들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림자라는 사람들이 손쉽게 제 맥을 보게 내어줄 리가 없다.
이들은 내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이 도구들은 왜 나를 선택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