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이 할미가 또 성질 고약하게 남의 낯짝을 붙이고 와선 도련님 헷갈리시게 만드는구만.”
여태 뒤에서 졸던 은 파파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뾰족한 말투로 은 파파 2에게 말을 붙였다.
“사람 얼굴 외우는 것도 일인데, 기왕이면 아는 얼굴로 뵙자 싶었던 게지. 흘흘, 말은 들었는데 우리 도련님이 아주 미남이 되셨구만. 도련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이 사람이 이 얼굴로 도련님 길바닥에 쓰러진 걸 한 번 구한 일이 있지요. 많이 크셨습니다.”
“쉰 소리 고만하고 어서 길이나 안내하게. 먼 길 와서 피곤하실 게야.”
“피곤한 건 다 늙어빠진 노친네겠지. 에휴, 도련님. 이 사람이 이렇습니다. 도련님 앞에서나 순한 양이지, 지금 마중 나와서 딴소리나 한다고 구박 주는 거 보십시오. 에잉, 칼 맞을까 무서워서 뒷간에나 가겠나.”
은 파파 2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차에 올라 내 고삐를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저뿐 아니라 다들 도련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야 금가장에도 몇 번 오고 갔지만 거기 일까지 보는 사람들이 많질 않아요. 말로만 듣던 막내 도련님 온다는 소식에 늙어빠진 쭈구렁방탱이들이 어찌나 야단들인지 원.”
“시끄럽고, 말이나 몰게. 얼굴이나 보고 인사를 해야 알지, 그냥 말하면 도련님이 어찌 아누?”
“도련님, 보셨지요? 으이구, 늙어서 잔소리하곤.”
은 파파 2가 내게 씩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마차를 몰 필요가 없어지자 나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가 항주.
아버지의 근원이자 내 손위 형제들 일부가 태어난 곳.
그러나 금가장의 역사에서는 완벽하게 지워진 곳.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차가 점점 후미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대로변을 지나, 다소 한적한 서민 골목을 지나, 매끈한 돌이 깔린 바닥은커녕 흙바닥도 고르지 않은 곳에 접어들자 마차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무공을 익힌 게 아니었다면 멀미로 고생 좀 했을 거다.
전생의 시골 비포장도로도 이거보단 낫겠다 싶을 지경이 되었을 때는 동네 분위기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아까 골목까지는 대도시라는 느낌이었는데, 여긴…….]
여긴 거지조차 없네.
아까 골목까지는 군데군데 거지들이 있었다. 대로변처럼 의욕 없이 드러누운 게 아니라 그래도 구걸 의지라도 존재하는 거지들이었다. 동냥그릇에도 식은 만두나 동전 한두 개 정도는 보여서,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긴 하구나, 싶은 분위기였는데.
가끔 깨진 동냥그릇 같은 게 바닥을 굴러다니긴 했다. 사람도 몇몇 돌아다녔다. 허나 아까 골목에 비해 눈빛이 험상궂거나 대놓고 색기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인데 취해서 휘청휘청 몸을 못 가누는 상태로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슬럼이군.
[그건 뭐예요?]
수많은 빈민, 그 빈민들이 하는 사업, 폭력을 기반으로 음험하고 지저분하고 불법적인 일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곳이지.
시골은 도시에 비해 땅이 많으니 굳이 한 곳에 모여 있을 필요도 없고, 모일 만큼 사람이 많지도 않다.
전생의 외국 대도시는 꼭 이런 빈민가, 슬럼가를 하나씩 끼고 있었지. 내가 살던 나라는 빈곤과 비리가 이렇게 구획으로 구분된 게 아니라 원룸이나 옥탑방, 고시원 등으로 안 보이게 잘 수납되어서 뉴욕이나 런던 같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렇긴 해도, 이런 곳의 구성원에는 단연 거지가 끼기 마련인데. 거지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는 동네라니.
“다 왔습니다. 옙니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은 파파 2가 도착했다며 마차를 멈췄다.
“객잔?”
[이런 곳에도 객잔이 다 있네요. 하긴, 당신 말대로 빈민들의 사업이 있다면 여길 오고 가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긴 하겠지만.]
……글쎄다. 그런 종류의 객잔이 아닌 거 같은데.
홍령이 말하는 건 비즈니스호텔 느낌이고. 내가 받은 느낌은 좀 다른 쪽의 숙박시설이다.
현판부터가 붉은 글씨에, 창문 하나 없는 구조까지. 딱 그런 느낌인데.
“안 들어 가십니까요?”
“어, 어어. 가야지.”
정작 은 파파는 항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짐을 내렸다. 나도 얼결에 따라 내렸다. 그렇다고 마치 위에 혼자 덩그러니 있을 수는 없잖아.
은 파파 2는 마차와 말을 뒤에 갖다 두겠다며 골목을 돌았고 우리는 객잔의 문을 열었다.
[뭐야, 안은 제법 괜찮은데요?]
그러게.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문을 열면 어두침침한 카운터가 나오는 거 아냐?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당연히 터무니없는 발상이고, 내부는 겉에서 본 허름한 모양새와 달리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바깥의 꿉꿉한 냄새 대신 말린 쑥 향 같은 것이 은은하게 풍겼고 창문 하나 없었지만 심지에 불을 붙인 등잔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래도 내 예상과 같은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카운터 말이다.
“보통 객잔에 이런 게 있던가?”
물론 객잔에도 카운터 비슷한 게 있긴 하다. 객잔 주인들이 앉아서 돈을 세거나 주문을 받고 정리하거나 점소이들이 주문이 없을 때 서 있는 입구와 가까운 그런 자리.
하지만 보통 그런 자리에 철창이 박혀 있진 않잖아?
[감옥 같네요. 근데 뭐랄까, 감옥은 위험한 사람을 가두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건 안에 있는 걸 지키려고 만든 거 같은데요?]
한쪽에 달려 있는 문의 빗장이 안에 달려 있는 걸 보니 홍령의 말이 맞았다. 우범지대 분위기의 거리에 있으니 저런 게 있을 법도 하긴 하지만…….
“홀홀, 역시 도련님이십니다요. 보통 객잔에는 저런 게 없지요. 그건 이곳이 객잔이 되기 전, 전당포로 쓰이던 곳이라 그렇습니다요.”
“금 씨 전당포?”
“예. 원래는 전당포만 하던 곳이었는데, 장주가 일을 물려받으면서 이 일 저 일을 함께 하느라 증축도 하고, 위에 두 개 층도 올리고 그랬지요. 금가장의 시작이라고 할까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그 전까지는 그냥 낡고 수상쩍은 객잔이었던 건물이 은 파파의 말을 듣자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내가 물려받을 유산에 속하는 게 아니겠는가.
[와, 별 게 다 있네. 여기 와 봐요!]
먼저 내부를 탐험하러 간 홍령을 따라 카운터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몇 개의 탁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은 나도 전생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정사각형에 도톰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어 물을 부으면 물이 고일 정도로 깊이가 있는 독특한 모양의 테이블.
[나 이거 한 번 본 적 있어요. 마작 하는 탁자일 거예요.]
맞다. 전생에도 마작 테이블이 딱 이런 모양으로 생겼다. 탁자 위에는 상아나 골재로 된 마작패가 게임 시작을 기다리며 늘어져 있었다. 만져보니 최근에 난 거 같은 흠집이 느껴졌다.
[위로도 가 봐요.]
마작 방을 나와 위로 올라가자 그곳은 숙박 시설이었다. 내가 마작 방을 구경하는 사이 은 파파와 항아는 방을 정해 짐을 넣고 있었다.
[앗, 이 방이 좋을 거 같은데요? 넓고 크고! 창문도 있어요!]
홍령은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하며 빠르게 방들을 훑어보더니 그중 한 방의 문에서 삐죽 튀어나와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건 그런데……
계속 신경 쓰인단 말이지.
[뭐가요?]
사람이 없잖아.
내가 얻어야 하는 아버지의 유산.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의 지분이 더 클지도.
아까 은 파파 2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말과 상황을 미루어보면 아마 아버지가 젊은 시절일 때부터 함께 일해 왔던 나이 든 그림자들이겠지.
근데 그들의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있긴 있을 거다.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겠지.
벌써부터 시험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맞다, 그렇죠. 은 파파 2가 호의적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내 수준으로 이들의 기척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한 거 같군.
하나하나가 은 파파에 준하는 실력자들이라는 거다.
[흥, 그래 봤자 산 사람들이죠. 육신이 있다면 숨길 곳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 귀신이 샅샅이 뒤져서 찾아주지!]
하지만 내겐 홍령이 있지.
[찾았다! 여기, 천장에 두 명 있어요. 어? 이쪽에도 공간이 있네? 여기도 한 명 숨었고. 뭐예요, 이 건물? 벽 안으로 들어가니까 또 공간이 엄청 많은데?]
세 명이 다야?
[조금만 기다려 봐요. 바닥에도 공간이 있나? 아, 거기! 당신 밟고 있는 거기도 한 명 있고요, 그리고 창문 밖에도 공간이 있어요. 거기 붙어 있는 사람도 한 명!]
총 다섯 명이군.
나는 홍령이 가르쳐준 정확한 위치로 각각 기세를 쏘아 보냈다.
―!
그제야 소리 없는 기척들이 내게 느껴졌다. 완벽하게 기척을 지웠다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정확히 위치를 찾아내니 당황들을 했는지, 갑자기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던 곳을 부수긴 싫은데. 벽 뚫고 인사하기 전에 다들 나오시죠?”
내가 말을 걸자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 뒤 내 발 밑에서 한 노인이 말했다.
“아래에서 뵙지요.”
그리고는 일사불란하게 기척이 사라졌다.
나 참.
은 파파만 대단하고 나머지는 은 파파보단 모자란 실력이려나 했더니, 하나하나가 은 파파에 준하는 그림자들이라니…….
홍령이 아니었다면 어려웠겠어.
[후후, 어때요. 나도 아직 쓸모가 있다고요?]
아직이라니. 항상 도움이 되지.
[그치만 요새 내가 할 일이 많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의술 실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지, 지식도 요샌 가끔 내가 가물가물한 것도 기억하고 있지, 무공 실력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홍령은 섭섭하다기보단 쓸쓸해 보였다.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홍령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적긴 하지.
내게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홍령에게는 나뿐이니까 내가 도움을 청할 일이 줄어드는 게 속상할 수도 있겠다.
[딱히 뭐 일부러 일을 만들어 달라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렇다고요! 간만에 보탬이 되니까 기분이 좋다고요! 자, 가죠!]
아냐,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의술이나 무공 등에는 일일이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나는 홍령이 없으면 안 돼.
[뭐, 뭐, 뭐예욧! 쑥스럽게! 그런 소리 들으려고 얘기한 거 아니라고요!]
그렇잖아? 관자재암에서도 네가 소림 방장을 불러오지 않았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어.
[그, 그건 그 땡중이 날 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고요!]
그 전에는 운기행공 중 모용을이 들어왔을 때 나를 깨워 그 여파를 대신 감당했지. 그 때문에 귀기 소모가 막심했는데도 소림 방장을 부르러 간 거였잖아.
[모용을은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나도 순진하게 그 자식을 덥썩 믿었다고요. 내가 녀석에게 호의적이던 게 당신의 방심에 일조했을 테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실질적인 도움이 없을 때라도, 나는 너한테 꽤 많이 의지하고 있어.
누군가에 대한 너의 호감이 내 판단에 영향을 줄 만큼 말이야.
[…….]
네가 없다면 나는 무척 쓸쓸할 거야.
그 누구도 홍령 너처럼 나와 항상 함께이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
너는 존재 자체로 내게 소중해.
[……빨리 그림자들이나 만나러 가욧!]
홍령의 허여멀건 한 뺨이 새빨간 홍시처럼 물들더니, 이내 톡 쏘아버리곤 벽을 통과해 나가버렸다.
쑥스러워하기는.
나도 낯간지러운 소리에 면역이 있는 건 아니라 좀 쑥스럽긴 하지만. 이런 중요한 말은 제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죽음 때 배웠으니까.
자, 그러면 아버지의 그림자들, 이제 내 그림자가 될 사람들을 만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