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참 신기하다니까요. 얼굴을 가려도 미모가 느껴지나 봐요. 아니면 무슨 향이 나서 그런가?]
확실히 꽃향기 같은 게 나긴 하지. 뭘 바르거나 뿌리지는 않는 거 같은데. 페로몬인가? 근데 남자가 남자의 페로몬에 끌리던가? 지금 옆에 줄 서 있는 다른 이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항아를 힐끔거리는 걸 보면 꼭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보시오. 통행증은 있소?”
“통행증?”
“없나 보구만. 허면 신분패는?”
“여기.”
김진 이름의 신분패는 은 파파가 만들어주었다. 가는 길에 짬짬이 만든 거라는데 그 실력이 어찌나 정교한지, 내가 갖고 있는 진짜 신분패, 금태양의 진품 신분패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점을 못 느낄 지경이었다.
나는 내 것과 은 파파의 것을 내밀었고 포쾌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패를 훑었다. 약간 긴장되는데.
“둘은 됐고, 저 이는?”
“저쪽은 없는데.”
항아의 신분패는 만들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은 파파는 내내 피곤하다며 졸았으니까. 딱히 필요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고.
[어휴, 눈 반짝거리는 거 봐요. 쌩돈 날리겠네.]
내 말에 표정이 변하는 포쾌를 보고 홍령이 투덜거렸다. 원래 이런 데서 괜히 트집 잡아서 한두 푼 얻어내는 게 성문 지키는 포쾌들 하는 일이다. 그런 낙마저 없으면 하루 종일 서서 사람들 얼굴 확인이나 하는 일을 무슨 재미로 하겠는가.
“그래서, 얼마지?”
분명 말하는데, 나는 돈을 낼 용의가 있었다. 아주 넘쳤다.
지금까지야 통행세를 요구하는 게 수적이고, 여러모로 내 행사에 방해가 되니까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하지만 여긴 성이다.
황제가 임명한 관리가 성을 다스리고 있고, 포쾌들은 별거 아니라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나라의 녹을 먹는 하급관리다.
수적을 상대로 칼을 뽑는 것과 관군을 상대로 칼을 뽑는 건 다른 얘기다. 그것도 무림문파의 앞마당이나 내 터전이 아닌 곳에서는 더더욱.
“아아, 통행증이 없으니 둘은 각각 은 오십 냥씩 내야 하고, 그쪽, 신분패도 없는 저 이는 백 냥이오.”
[배, 백 냥?! 은 백 냥이요? 아니지, 당신이랑 은 파파는 각각 은 오십 냥씩이라고 했으니까 도합이 이백 냥?!?!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포쾌 아니고 날강도 아냐? 수적이나 산적들도 세 사람 지나가는 데 그 정도는 안 받는다고요!]
홍령이 어처구니없어 길길이 날뛰었고 나는 뭐라 답하는 대신 주변을 슬쩍 훑었다.
귀신도 기가 막힐 상황인데 그 누구도 우리 쪽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차 없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통행증이라는 걸 내보이고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고, 우리 뒤에 선 마차는 이쪽의 일을 흘깃거리기보단 저들끼리 대화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다음에는 그들이 당면해야 할 상황인데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는 통상적인 상황이라는 거군.
어떻게 할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줘야죠. 하여간 관이 제일 날강도들이라니까. 사숙님들 말이 틀린 게 없어. 어휴.]
웬일로?
이런 일(그러니까 다소 부당해서 무력을 사용할 상황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일)이 있을 때면 쳐부숴라, 본때를 보여줘라! 등 과격한 해결방법을 선호했던 홍령답지 않았다.
[포쾌라고는 해도 관군이잖아요. 게다가 이 안에서 있을 일이 더 중요하고요. 괜한 데 힘 뺄 필요 없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돈 없소? 뭐, 그러면 통행증을 발급받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신분패가 있으면 은 서른 냥, 없으면 오십 냥. 한 번 발급받으면 백 일을 쓸 수 있으니 자주 오고 갈 거면 나쁘지 않을 거요.”
아하, 이쪽이 본론이었군.
아까 제시한 금액은 터무니없지만, 그 얘길 듣고 통행증 가격 얘기를 들으면 통행증 쪽이 굉장히 합리적인 소비처럼 느껴진다.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거나 시간이 돈인 상인들은 딱히 고민 안 하고 통행증을 사는 게 낫다 이거겠지.
그래도 통행세로는 턱없는 금액이다.
“안 낼 거요?”
돈은 있다.
오면서 돈을 제법 쓰긴 했지만, 수채들을 정리하면서 여비는 적잖게 벌었다. 특히 마지막에 은 파파로 인해 자중지란을 겪은 청룡채에 남겨진 재물은 상당했다. 청수채 수적들에게 가져가 수채를 복구하는 데 쓰라고 넘겨준 것을 제외하고도 전표나 금은이 적지 않았다.
내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전낭 말고, 검 손잡이를 잡았다.
“우, 우리 말로 합세. 뭐, 당장 사정이 곤궁하면 좀 달아놓고 가도 괜찮고…….”
내가 검을 살짝 뽑자 포쾌가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나는 포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푸욱―
날래게 뽑힌 검을 던졌다. 검 끝이 속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단단하기 짝이 없지만 내겐 두부에 칼을 꽂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미, 미친. 봤어? 검이 쑥 들어갔잖아?! 저게 가능한 일인가?”
“쉿. 무림인이야. 말을 조심해. 다음에는 저 칼이 자네 목을 향할 수도 있어.”
우리 일행의 옆과 뒤에 선 이들, 포쾌의 통행세 요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이들이 내 행동에 놀라 쑥덕거렸다.
허나 바로 내 앞에 있던 포쾌만큼 놀랐을까.
[으으, 뒤로 좀 물러나요. 저 사람, 지렸어요.]
바지춤에 선명하게 젖은 흔적이 나타난 포쾌는 저가 지린 것도 깨닫지 못한 듯, 제 목과 제 뒤편의 성벽에 박힌 검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돈이 없어서. 그 검을 잠깐 맡길까 싶은데.”
“그, 그, 그럴 필요 없소. 그냥 가, 가져가시오. 통과! 통과!”
포쾌는 다급하게 품에서 통행증이라 적혀 있는 종이 세 장을 내 손에 쥐여 주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후다닥 우리를 지나쳐 뒤쪽에 대기 중이던 상단으로 향했다.
“이거 비싼 건데. 맡긴대도 싫다네, 나 참.”
나는 성벽에 쑥 박혀 있는 검 홍령을 뽑아 다시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는 것을 무시하며 다시 마차를 몰았다.
[이제 반나절이면 온 항주가 당신을 알게 되겠네요. 통행세 대신 냅다 검을 집어던진 무림인이라고요.]
일부러 그런 건데 뭐.
김진의 이름은 널리 떨칠수록 좋다.
그래서 청수채의 두목 자리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고 청룡채를 비롯한 수채를 정리할 때도 내 이름을 부러 각인시켰다.
그래도 거기까진 실력에 기반한 일들이다. 금태양으로서, 의원으로서도 그 정도 일은 했다. 지금처럼 굳이 할 필요 없는 실력행사로 잡음을 만드는 건 좀 다른 얘기다.
은 파파가 청룡채를 궤멸시키는 걸 보고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
[은 파파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 좀 남아 있다고 그랬던가요? 그 사람들 때문에요?]
그래.
그들은 이곳 항주에 있다고 했다.
방금 성문에서 있었던 일이 그들에게는 내 첫인상이 되겠지.
혈혈단신으로 회수의 우두머리라는 청룡채를 궤멸시킨 은 파파다. 은 파파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할 거라고 봐야 한다. 실력적인 면도, 성품이나 과감함, 결단력까지도.
그들 또한, 내가 물려받아야 할 아버지의 유산 일부.
쉽사리 얕보여 유산에 되레 먹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렇게 성문을 막 지났을 때였다.
거지 하나가 쭈뼛거리며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그대로 무시하고 마차를 몰거나 거칠게 말하지 않은 건, 그 거지가 아주 어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신생 또래쯤 되어 보이네요.]
그 시절 내 제자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차림, 비슷한 표정. 아무리 김진을 가장하고 있어도 그런 거지아이를 무시하고 지나가기는 어려웠고 결국 나는 마차를 멈췄다.
“무림인이세요?”
“그런데.”
“그럼 혹시 금창약 있어요?”
“……있는데?”
갑자기 금창약?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거지아이가 외쳤다.
“있대요! 약 있대요!”
“약이 있어?!”
“약……!”
거지아이의 외침에 갑자기 길가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던 거지들이 벌떡 일어났다.
[뭐, 뭐예요? 갑자기 왜 다가오는 건데?!]
“소협! 약, 약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좀 보시오, 소협. 이게 우리가 포쾌들한테 얻어맞아 가지고 생긴 상처인데, 금창약 하나가 없어서 못 낫고 있소이다.”
“아까 보니까 포쾌들에게 한 방 먹이시드만. 협객이시네! 아이고, 우리 거지들도 크게 보면 다 개방인데, 무림인들끼리 좀 나누고 살면 안 됩니까?”
거지들이 좀비처럼 마차를 둘러쌌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우리를 둘러싼 거지들을 쓱 훑어보았다.
상태가 나빠 보이는 자들이 많다.
[그, 그렇긴 하네요. 상처가 깊은 사람도 꽤 보이고, 저 사람은 드러난 곳이 온통 멍 자국이고요.]
거지들은 오래도록 씻지 않을 뿐 아니라 섭취하는 음식의 질도 나빠서 근처에만 가도 지독한 냄새가 난다.
그런데 이 거지들에게서는 그 냄새를 지워버릴 정도의 악취가 났다.
피부와 근육을 넘어 뼈까지 곪아야 나는 냄새.
죽음을 목전에 둔 냄새다.
실제로 아직도 어기적어기적 다가오고 있는 거지들, 걸음이 느린 자들은 드러난 팔과 다리가 곪아서 빨리 절단 수술을 하지 않으면 패혈증으로 사망할 거 같은 상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개방도 제법 의술을 갖추고 있지 않았어요? 개방의 거지의원들이 태양의원에 와서 의술 교류를 하고 있잖아요. 하물며 여긴 항주인데?]
항주. 개방의 본타.
거지가 많을 수는 있지만,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쁜 거지가 많을 일인가?
“가져가라.”
나는 품에서 작은 금창약 연고통을 꺼내 던졌다.
“어! 잡아!”
“내 거야, 내 거!”
제법 멀리 집어던졌기에 거지들은 마차에서 떨어져 연고통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이내 싸움이 벌어졌다. 도저히 한 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다툼이었다. 정말 저들이 개방의 거지들이 맞긴 할까?
“하나 더! 하나 더 없습니까?”
“제발 살려줍쇼, 나 아파요, 아파!”
미처 그쪽으로 달려가지 못한, 팔다리가 썩어가고 있는 거지들이 뒤늦게 마차로 다가와 매달렸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불호령을 터트렸다.
“이 거지새끼들이!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이러고들 있어! 썩 꺼지지 못해?”
[……은 파파? 저거 은 파파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난 이는 머리가 희게 센 노파였다. 그리고 은 파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놀라서 뒤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은 파파는 여전히 항아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뭐예요, 설마 쌍둥이였던 건가?]
어쨌든 갑자기 등장한 노파, 일단 은 파파 2라고 하자. 은 파파 2의 활약은 대단했다. 거지들은 이미 은 파파 2를 알고 있는지 그를 보자마자 허둥지둥하며 마차에서 떨어졌다. 저 멀리 금창약을 두고 싸우던 거지들도 당황해서는 은 파파 2에게 금창약 연고통을 뺏기고 골목길로 도망쳤다.
“이그, 맘이 여린 분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여기서 거지들에게 함부로 뭘 주심 안 됩니다요.”
“고맙…….”
반말을 해야 해, 존대를 해야 해? 뭐라고 불러야 해? 은 파파라고? 나를 아는 걸 보니 은 파파가 부릴 수 있다는 사람들 중 하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