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항주로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나룻배를 타고 청수채에 도착하자 수적들은 깜짝 놀라 내 앞에 도열했다. 내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다나? 두목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준비를 갖추려 했는데 벌써 와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느니, 이상한 소리들은 무시하고 쾌속선을 요구했다.
“빨라!”
[진짜 빠른데요?! 배를 타고 있는 게 아니라 날고 있다고 해도 믿겠어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항아는 물론 귀신까지 놀랄 정도로 청수채 쾌속선의 속도는 눈부셨다. 새삼 놀랄 일 같은 건 없어 보였던 은 파파도 제법 감탄한 눈치였다.
수적들의 쾌속선이니 빠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정도로 이 정도 감탄이 나오기는 어렵다. 청수채는 내 요구에 쾌속선뿐 아니라 경험 많은 수적 스물을 함께 보냈다.
호위를 위해서? 아니면 청수채 두목이 된 나의 위신을 위해? 그런 일이었다면 필요 없다고 내가 거절했을 거다.
“영차! 영차!”
“박자 맞춰! 박자 못 맞추는 놈은 그대로 배에 묶어서 끌고 가버린다!”
그 스무 명은 쾌속선의 노를 저었다. 안 그래도 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배인데, 거기에 힘 좋은 장정들이 2교대로 눈썹 휘날리며 노를 저으니 쾌속선의 속도가 그야말로 날아가는 것 같을 수밖에.
“좋아, 이번에도 가볼까? 가자, 은 파파.”
“홀홀, 이 늙은이를 아주 제대로 부려먹으시는구만요.”
예상보다 속도가 빨라 다른 일을 할 기회도 있었다. 청소 말이다. 길목 청소.
“웨, 웬 놈이냐!”
“웬 놈인지 웬 님인지 알 거 없고, 채주 불러!”
짬이 날 때마다 가는 길목, 그러니까 항주로 가는 수로의 수채들을 정리했다. 아무리 시간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전부 손을 댈 수는 없으니, 위험한 수채 위주로 선별해 몇 개만 뒤집어엎었다.
[저번 수채는 청수채에게 위협적이었던 곳이고, 이번 수채는 호시탐탐 약탈을 시도하는 곳이죠? 여긴 신생이 있는 유람선에 위험할 테니까 정리해야 할 거고. 남은 하나는 회수 일대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수채네요.]
큰 곳을 정리해두면 작은 곳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다. 그런 의도에서 움직인 거였고, 정리는 어렵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뭣보다 은 파파가 함께 했으니까.
강하다.
심상 속 화산에서 만났던 화산의 사숙조들도 강했고, 좌수검도 강하고, 둘째형도 강했지만 은 파파는 뭐랄까, 강함의 차원이 달랐다.
은사 하나로 수적 스물의 목을 베어버렸을 때는, 아니지, 그건 그냥 베어버렸다라고 설명하기엔 좀 부족하다.
그래, 추수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가을 들녘에 무겁게 고개 숙인 벼를 추수하듯 은 파파는 잔챙이들의 수급을 참으로 간단하게 거두어들였다. 내가 채주와 일전을 벌이는 걸 방해하지 못하게.
[그렇네요.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고…….]
심상 속 화산에서야 무림인의 마인드를 갖추게 된 나와 달리, 타고나길 화산의 무인이었던 홍령마저 말을 흐리게 만들 정도의 참상이 백발 성성한 노파의 손짓 한 번에 만들어졌다.
[그냥 강하다 정도가 아니에요. ……잔혹하네요. 눈도 깜빡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난번 수채를 정리할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침음을 삼키고 있자 은 파파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잔인하지 않습니까? 꼭 죽일 필요도 없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에 대한 죄책감도 없지요. 과하게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효과라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특히나 이런 수적들에겐 이런 방식이 잘 먹히지요.”
은 파파는 내가 기겁하기라도 바란 듯 내 얼굴을 살폈지만, 나는 과하다든가, 너무했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부러 잔인함의 수위를 높인 건 내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항주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내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일을 할 수 있게.
예방주사를 놓는다고 봐도 되겠지.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이런 짓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은 파파는 생각보다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는 먼저 가보겠다며 훌쩍 자리를 떴다. 쾌속선으로 돌아갔을 때 은 파파는 배에 없었지만 나는 배를 출발시켰다. 그 정도도 못 따라올 사람은 아니니까.
은 파파는 이튿날 돌아왔다.
장강수로칠십이채 중 회수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그들을 수로맹으로 친다면 부맹주급에 해당하는 청룡채를 지나가는 날이었다.
[저기, 저기 봐요! 시체가 떠내려 오고 있어요!]
“어어? 부채주, 저거 청룡채주 아닙니까?”
“채주도 채주인데, 저 대가리는 청룡채 부채주인데!?”
나는 반사적으로 은 파파를 돌아보았다. 은 파파는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기대 누워 꾸벅꾸벅 졸다가 무얼 했냐는 내 말에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서로 칼질을 하게 만들었지요. 부채주를 부추겨 채주를 치게 만들었고 채주에게는 부채주가 채주의 첩과 통정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요. 사내들이란 게 빤하지요. 살아남은 수적은 몇 없을 겝니다. 홀홀.”
“…………그런 게 고작 이틀로 가능한 거야?”
“마침 갖고 있던 재료가 있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끌끌. 허나 도련님. 이 정도로 놀라심 아니 됩니다.”
은 파파는 맛보기는 충분히 보여줬다는 듯 킬킬대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를 청수채의 수적들도 들었다.
그들은 자중지란으로 청룡채의 수채가 궤멸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를 백발의 노인이 홀로 해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런 은 파파가 나를 극진히 모신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후 수적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더욱 공손해진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사실 이 배에 탄 수적들 중 나를 아직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다른 배에 통행세를 걷으러 갔다 돌아오니 채주가 죽고 부채주가 엉뚱한 놈을 두목으로 모시고 있는 상황이었던 놈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놈들은 괜히 내 말에 작게 딴죽을 걸거나 항아를 음험함 눈으로 봐서 좀 골치였는데, 처음 청수채의 적이었던 수채를 처리했을 때부터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더니, 청룡채를 손 안 대고 코 풀듯 처리해버린 후로는 유람선에서 내 무위를 직접 목도했던 이들보다 나를 공손하게 대했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항주까지는 육로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좋아, 수고했어.”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두목!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놈의 두목 소리는 진짜…….”
골 때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 덕분에 항주 근처까지 빠르고 편하게 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때가 되면 찾겠다는 말과 함께 놈들을 돌려보낸 후, 우리는 마차를 빌려 항주로 향했다.
그런데 항주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항주면 꽤 대도시 아니에요? 바다를 접하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무역도 하고 돈도 돌고, 꽤 활기찰 거 같은데, 이 주변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죠?]
홍령의 말대로였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 성 밖에 형성된 마을을 지나가는 중인데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곳곳마다 거지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 많은 것은 물론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절반은 소매치기나 강도, 도둑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냥 눈빛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몇 번 보기도 했다.
그래도 대로라 대놓고 칼부림을 하진 않았는데, 주머니 사이에 칼날이 번뜩이거나 남의 허리춤에 매인 전낭에 슬쩍 손을 갖다 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머지 절반은 제 옷을 꽁꽁 싸매고, 전낭도 옷 안에 넣어서 볼품없는 맵시를 하곤 주변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소매치기나 강도의 표적이 되는 것은 이곳 사람이 아닌 외지인들이었다.
당연히 우리도 외지에서 온 티가 났기에 몇몇 눈빛 살벌한 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기세를 담아 마주 쏘아보지 않았다면 몇 명이 합심해서 마차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소림도 분위기가 별로였지만, 거기는 활기가 없을 뿐이지 이렇게 살기가 넘치는 건 아니었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하다못해 거긴 거지들 때깔은 좋았어. 거지든 아니든 다 퍼주는 동네니까.
[아, 맞네요! 여기 거지들은 구걸할 의지도 없어 보여요. 구걸한다고 뭘 줄 동네는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러면 보통 거지들도 눈에 악이 차지 않나? 아예 그런 의욕 자체가 없어 보이는데요?]
그것도 그렇고, 유독 거지가 많은 거 같기도 하고.
무한도 개방 분타가 있는 만큼 거지가 많긴 했지만 보통 한 군데 몰려 살다 보니, 순번대로 구걸을 하러 나온 거지가 아니면 볼 일이 드물었는데.
[거지…… 아! 맞아! 그래요, 개방 본타가 항주예요!]
개방이라…….
도개걸의 본거지다 이거군.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않아?
어느 동네 문파원들이, 자기 본문이 있는 동네에서 저렇게 기력 없이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본문제자 아니라 속가제자가 차린 도장에서 무공을 익힌 제자도 본문 근처에 가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데.
[사실 저게 어깨를 펴고 있는 거 아닐까요? 보통은 굴다리 밑에 거지소굴에 모여 있잖아요. 그런데 대로에 드러누워 자고 있으니까, 그게 오히려 개방의 성세를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하기엔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며 안색이…….
흐음, 하여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동네다.
은 파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은 파파는 청룡채를 뒤집어버린 이후로 피곤하다며 계속 졸거나 잠들었고, 지금도 흔들리는 마차 뒷자리에서 항아와 기대어 쿨쿨 자고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걸까요……. 어쩐지 좀 씁쓸한 것도 같고.]
어디로 가야 할지 행선지는 알고 있으니 도착하기 전까지는 깨우지 말자.
그렇게 우리는 성으로 들어가는 긴 줄에 마차를 대고 섰다. 우리 앞에 상단이 여러 대의 마차를 검사받고 있어서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았다.
[그런데요, 항아는 정말 괜찮겠어요?]
홍령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항아의 거취는 내게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존재 자체로도 표적이 되는데 어디 맡기자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은 파파로 하여금 다른 안전한 곳에 데려다 두라고 하자니 내가 은 파파와 같이 가야 하고,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것보다 불안할 지경인데 혼자 어딜 보낼 수도 없고.
은 파파가 챙기겠다고 해서 같이 오기는 했는데, 면사로 충분히 얼굴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어찌 알고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라 골치가 아팠다.
“좋아, 다음!”
지금 성문 앞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사하는 저 포쾌처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