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건이라고 했나?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현건. 무당의 대제자.
나와는 태청의원과의 일이라든가, 청화문의 사건 때문에 종종 얼굴을 마주쳤던 전적이 있다.
다음에 만난다면 화산지회 본선에서 각각 무당과 소림을 대표해 만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데서 각자 다른 신분과 이름으로 만나게 될 줄은.
현건은 나를 불러놓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음? 도움?”
“소협이 아니었다면 수적들은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을 겁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보아하니 이 배가 무당하고 제법 깊은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 대표해서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거참, 살다 보니 무당 사람에게 진심 어린 감사도 받고 말이야. 홍령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기겁을 하든지 혀를 차든지 했겠군.
“유람 중에 귀찮게 하는 잔챙이가 있어서 처단했을 뿐. 별로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닌데.”
“제게는 특별히 감사한 일입니다.”
음?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는 얘기가 아닌가?
“청수채의 채주가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막무가내로 행동했을 때, 나는 그자를 베어야 했습니다. 허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자는 만나본 적이 없어 반격의 틈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확실히 그때 그답지 않게 허술하긴 했지.
나는 현건의 실력을 안다.
장강칠십이로채의 채주를 맡았으니 채주의 실력도 그리 허술하진 않겠지만 현건이 그렇게 반격을 쉬이 허용할 인사는 아닌 것이다.
허나 그는 채주를 놓쳤고, 제대로 한 방 먹기까지 했다.
“실전에 대한 경험이 적지 않다고 자부했으나 그 또한 정석에 가까운 일들뿐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당 제자 아니랄까 봐 말 참 어렵게도 하네.
하지만 심상의 화산에서 이십여 년을 보낸 덕인가, 이제 이 정도 빙빙 돌려 하는 말은 곧바로 해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평소 FM대로 익히고 생활하고 적용하다가 FM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되니까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단 얘기잖아.
이게 다 장문인의 독경을 열심히 들은 결과지!
“다행히 소협이라는 은인 덕분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또한 은인의 행동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어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다.”
현건이 갑자기 왜 날 찾아와서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묘하게 찜찜한데.
“과연 그게 전부일까?”
현건이 채주의 반격에 나가떨어졌을 때는 나도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무당의 대제자인데. 저런 반격 하나 예상 못 해서 다 잡은 고기를 놔준다고?
그게 오직 교과서대로 행동하는 버릇 때문이라고?
“당신, 뭘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애초에 왜 정석이 아닌 상황이 나왔는지 고민하는 게 맞지 않나? 내 생각엔 평생 당신이 생각하는 정석대로의 상황만 나온 이유와, 지금 그렇지 않은 상황이 나온 이유가 있을 거 같거든.”
“……!”
문제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건 당장 눈앞에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그 현상을 불러일으킨 원인부터 짚어봐야 한다. 평소 교과서대로 행동해도 이상이 없었던 삶에 교과서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근원 어딘가에 전혀 다른 에러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게 시스템적 에러든 휴먼 에러든 말이지.
나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과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며 본부장의 신임을 얻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러지 말걸.
“……맞습니다. 소협의 말이 맞습니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응?
내가 잠시 전생의 기억 때문에 불유쾌해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현건이 바닥에 넙쭉 엎드려 절을 올렸다. 구배지례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동년배끼리 할 만한 인사는 절대 아닌 게 분명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초롱초롱한…… 아냐, 이런 눈빛은 신생 같은 귀여운 애들이나 하는 거야. 나랑 동년배, 아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내한테 받고 싶은 눈빛은 아니라고!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게는 어떠한 사정이 있습니다. 때문에 아까의 싸움도 긴박해지기 전에는 뛰어들지 못하였습니다. 헌데 그 일이 제 사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머릿속이 안개가 걷힌 듯 개운해졌습니다. 그 전이었다면 평생을 가도 얻지 못했을 깨달음입니다. 소협도 아시겠지만 무인에게 있어서 깨달음은 목숨과도 같은 것. 이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데 할 수 있는 것이 이리 무릎을 꿇는 것뿐이라 송구할 뿐입니다.”
“……뭐래. 아, 닭살.”
“제가 너무 진중하였다면 사죄드립니다. 이런 방식 외에 감사함을 표할 방법을 알지 못하여.”
“어지간히 가풍 단정한 곳에서 자랐나. 척 보니 모범생 같아 보이긴 하더만.”
“그, 그렇습니까?”
녀석은 당황한 눈으로 제 차림새를 훑었다. 제 딴에는 낭인이나 이름 없는 무사처럼 꾸미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평생의 취향이라는 게 어딜 가나.
그만큼 녀석의 삶에는 무당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녀석은 무당의 기대주다. 삼대제자 중 제일. 지금의 신생보다 어릴 때부터 무당에 들어가 무당이 아닌 삶을 살아본 적이 없을 거다.
다른 신분을 가장한 상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싸움은 피하려 했던 것이 그 사정일 거고, 전처럼 상황이 굴러가지 않는 것 또한 그 사정 때문이다.
그의 이름 뒤에 무당이 버티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나온 것이다.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자가 무당의 대제자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청수채라 해도, 마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와 보니까 세상이 거칠고, 집에서처럼 다들 넙쭉 엎드리진 않지?”
나도 녀석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썩 친하지도 않는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거고.
“자기가 호가호위하던 여우새끼라는 걸 깨달은 기분이 어때?”
“……!”
전생의 내가 회사를 박차고 나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기로 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이 바로 그 기분이었으니까.
“소협은 진실로 현인이십니까?”
“아, 진짜. 그런 거 진짜 관둬라. 한 번만 더 내 몸에 닭살 돋게 하면 얼간이라고 부를 거야.”
“현인께서 얼간이를 얼간이라 부르신다면 얼간이인 거겠지요. 저는 아직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두 번이나 제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실로 감사합니다.”
“딱히 감사받을 일 아니라니까?!”
“그래도 저는 감사하니까 감사를 드릴 겁니다.”
그리고는 이번엔 숫제 머리까지 살짝 바닥에 박았다.
“……와, 이거 밸도 없네.”
평생 무당의 품 안에 있다가 나와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으니 감탄스러울 만도 하겠다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진짜 얼간이라고 불렀다간 또 자신이 얼간이임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감탄할 지경이라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겠다.
“알았어. 감사 받아줄 테니까 꺼져.”
“소협도 항주에 가시는 길입니까?”
거기에 묘하게 말을 안 듣기까지. 아까 눈을 초롱초롱 빛낼 때는 내가 똥으로 된장을 빚는다 해도 믿을 것 같더니만.
“내가 굳이 내 행선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이 배는 항주로 가는 배지요.”
“그럼 왜 물어봐?”
“아까 잠깐 들으니 어디로 가신다는 듯하여. 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습니다.”
은 파파와의 대화 말미에 녀석이 다가온 것은 안다. 그래서 우리도 중요한 얘기는 부쩍 작은 소리로 얘기를 했지.
“허면 어디에 적을 두고 계십니까? 가문이나 문파는요.”
“이거 진짜 귀찮게 구네.”
왜 이렇게 집요하지? 혹시 내가 금태양인 걸 눈치챈 거 아냐? 괜히 아는 척하지 말 걸 그랬나?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뭘 모르나 본데, 무림에는 적을 물어서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검 뽑기 전에 끝내라.”
“아, 그런 경우라면…… 죄송합니다. 귀찮게 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는…… 혹 별호가 있다면 별호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소협처럼 대단한 분이 별호도 없을 리가 없습니다.”
“……자하신룡.”
“자하신룡? 그건 당가 자제의 별호일 텐데.”
“그건 자하검룡이고. 그리고 그놈도 별호가 바뀌었어. 뭐라더라? 무슨 독룡이었는데. 아, 해독룡이다. 백엽의 해독룡.”
“당가의 자제가 독룡도 아니고 해독룡이라니. 무언가 큰일을 해낸 모양이군요. 제가 외진 곳에 살아서 소식이 늦었나 봅니다.”
하이고. 무당이 외진 곳이면 다른 데는 산골벽두인가.
“뭐 여튼, 나는 들었다시피 볼 일이 있어서 이만 배에서 내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조금 더 가면 작은 나루터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배를 대라고 하겠습니다.”
“됐어. 나룻배 하나 끌고 온 거 있으니까 그거 타고 갈 거야.”
청수채에서 돌아올 때 타고 온 배 한 척을 유람선에 매어놨다. 그걸 타고 청수채로 돌아가서 녀석들의 쾌속선을 탈 생각이다.
“특실 비용은 환불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항주까지 가는 동안 환자랑 환자 보살피는 의원에게 지원은 아끼지 말고.”
“거친 말투와 행동은 바른 품성을 가리기 위한 연막 같은 거군요. 소협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제가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이 자식, 나인 거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겠지?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남을 신생이 걱정되니까 한마디는 해야겠고.
[신생을 그냥 두고 갈 거예요?]
때마침 홍령과 은 파파가 내려왔다. 이번에는 별일 없이 짐을 꾸려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신생도 있었다.
“간다면서요?”
여전히 삐딱하고 예의 없는 말투. 그러나 김진으로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돋친 가시가 많이 꺾였다.
“그래. 환자는 두고 왜 내려와? 배웅이라도 하게?”
“따,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배가 습격도 당한 마당에 어딜 가려나 싶어서……!”
진짜 배웅하러 온 모양이네. 속내를 들켜 볼이 발그레해진 신생이 귀여웠다. 물론 현실적인 걱정도 있겠지.
“여기 무공이 뛰어난 건 공자도 있고, 너도 좀 싸우던데 뭘 걱정이냐.”
나는 현건의 어깨에 손을 턱 얹고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안면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생이 현건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고 현건은 곤란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떠난 후 둘이 뭐라도 얘기를 나누겠지.
“그래도 다치는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다고요. 이보다 환자가 더 늘어나면 나 혼자 감당이 안 되니까……”
“뭐, 그건 이제 괜찮지 않을까?”
저들의 목표인 항아도 내가 데리고 갈 거고, 여차하면 지나가면서 위협이 될 만한 수채는 뒤엎으면서 가야겠군. 쫓으면 날 쫓았지 이 유람선은 건드리지 않게 말이다.
“그럼 이만 가보자고. 건 공자도 잘 있고, 의원 신생, 또 보자.”
의원 신생.
내가 말해놓고 묘한 감동이 일었다.
이 녀석은 알까.
네 스승이 너를, 지금 이 순간, 진짜 의원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그때 신생의 얼굴이 기대되는걸요.]
그러게. 기뻐할지, 놀랄지, 아니면 자기를 왜 속였냐고 울상을 지을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반응은―
“……내가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어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만. 네 이름 아냐? 뭐, 아무튼 난 간다.”
나는 서둘러 아래에 묶어놓은 나룻배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은 파파도 항아를 옆구리에 끼고 폴짝 내려앉았다.
“가자, 출발!”
서둘러 줄을 끊어내고 출발하자 신생의 얼굴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 가르쳐주지 그랬어요. 현건이 거슬리면 전음을 해도 되고. 스승한테 인정받았다고 기뻐했을 텐데.]
지금 밝히면 따라오려고 할 수도 있잖아. 의원은 환자를 봐야지.
떠나는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의원으로서 뜻을 세우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홀로서는 과정도 지켜볼 수가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그 정도 했으니 됐다, 이제 같이 가자, 하고 데려가고 싶다.
하지만, 저 배에서 환자들을 끝까지 책임진 경험은 신생을 더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의원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은 신생이 온전히 그 시간을 누리게 해주는 것.
그로 하여금, 신생 스스로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