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알아들었으면 가자.”
채주의 상석은 푹신한 모피로 되어 있었다. 끝내주는 놈팡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파묻자 부채주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직 기력이 남은 몇 놈이 눈에 살기를 띠었다.
이놈들이?
의자에 파묻힌 채로 실눈을 떠 놈들을 싹 흘겨보자 버릇없이 눈을 홉떴던 놈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안 가? 또 칼 뽑아?”
“아, 아닙니다! 배 돌려라! 수채로 돌아간다!”
그제야 부채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살기를 띠던 놈들도 이내 고분고분 배를 움직였다.
한 번에 말을 착착 들어야 진정한 놈팡이라고 은 파파가 그랬는데. 놈팡이로 사는 것도 쉽지가 않군.
배가 역방향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숫자는 적었지만 다들 숙련된 수적들이라 그런지 배를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유람선과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며 배에는 속도가 붙었다.
“네가 부채주라며?”
“아, 예, 예! 그렇습니다만……?”
내가 잘라낸 팔은 금창약을 발랐는지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한지 얼굴은 내내 찡그린 채였지만 내가 부르자 대번 표정을 바꾸어 굽신거렸다. 태세전환이 빠른 놈이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까 채주는 왜 그런 거야?”
“예?”
“아까 그랬잖아.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그냥 진입하라고.”
“아, 그, 그랬죠.”
말은 알았다고 하면서도 부채주는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하아, 차라리 채주를 살려놓을 걸 그랬나? 머리 회전이 빨라 보이기에 이쪽을 남겨놨더니.
아니다. 어차피 수채로 가는 시간도 있으니까. 시간 죽이는 셈 치지 뭐.
“애초에 항아루가 뭘 얼마나 걸었기에 그간 좋은 관계를 깨려고 했던 거야? 얼마쯤 되면 채주가 제 목이 걸린 상황에서 거리낌이 없을 수 있지?”
“아! 그 얘기셨군요!”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살려놓은 게 아주 멍청이는 아니라 다행이다.
“어, 그게 말입니다. 항아루는 현상금을 걸진 않았습니다. 돈이 문제였다면야, 채주도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약인가?”
“……! 그걸 어떻게……!”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사람이 물불 안 가리는 경우가 몇 개나 된다고.”
나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모피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무리 돈을 좋아해도 제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돈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돈을 짊어지고 저승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정작 그런 상황에서 돈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진짜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죽은 후에 남겨질 이들에게 돈이라도 남겨주려고 돈을 선택한다.
엄밀히 말하면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목숨을, 혹은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을 버리는 거다.
……잠시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울분을 삼키고 돈을 받았던 학생 말이다.
내가 죽은 뒤 세상에서는 부디 잘 살고 있기를.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채주는 그런 케이스는 아닌 거 같았다.
“사랑은 아닌 거 같았고, 달리 협박을 당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았고.”
사랑이 아니라면 목숨 정도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험한 경우에도 목을 걸 수 있지.
“명예라고 하기엔, 거래 잘 하던 배를 털어서 수적들이 얻는 명성이 뭐가 있겠어. 아무거나 턴다고 수적으로서 명성이 오르는 건 아닐 거 아냐. 니들도 장강칠십이로채의 체면이 있지.”
“그, 그건 그렇습니다. 저희에게 명성이라면 관리하는 배가 얼마나 많으냐, 뭐 그런 걸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법이다 보니…….”
“그럼 남는 게 뭐, 약 정도밖에 없잖아?”
약.
정확히 말하면 마약이다.
“항주는 유명한 마약 수입항이지. 항주를 오고 가는 강에 진 치고 영업하는 수적 채주가 마약을 즐긴다 해도 이상할 거 없고, 아까 보니까 말은 똑바로 잘하는데 눈동자가 핏발이 선 채로 기이하게 풀렸더라고. 꽤 질이 좋은 마약인가? 그걸 항아루 루주가 주겠다고 한 거 아냐?”
“마, 맞습니다. 대체 뭐 하는 분입니까?”
전생의 S로 시작하는 유명한 탐정처럼 척척 맞춰대자 부채주의 눈이 경탄으로 휘둥그레졌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태양의원이 쓰는 약 중에는 마약도 있다.
용량과 용법을 제대로 지키면 마약류만큼 좋은 마취, 진통제도 없다. 특히 당당이 만드는 당가 특제 마비산, 이제 태양의원 전 분원이 시술이나 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표준 마비산의 재료는 팔 할 이상이 마약이다.
그렇다고 마약의 종류가 다양한 건 아니고, 사실 대부분 아편이지.
전생에 유행하던 마약도 화학적으로 합성한 게 아닌 이상 대부분 아편 추출물이었다.
중원에 풀린 아편은 대부분 항주의 항구로 들어온 물량.
마약과 항주라…….
뜬금없다면 뜬금없지만, 왠지 이 일이 내가 항주로 가는 이유와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저긴가?”
전생의 한강 밤섬처럼, 강 한가운데 위치한 하중도(河中島)가 보였다. 배를 타지 않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어서인지 산채처럼 목책을 두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안은…….
“저리 비켜! 이 배는 우리 거다!”
“으악!”
“다른 건 됐으니까 돈 되는 걸 실어! 빨리!”
“내놔, 그건 우리 거다!”
“막아! 저놈들 막아!”
……개판이었다.
채주가 쓰러지자마자 배에서 탈출한 수적들, 내가 엉덩이를 걷어찬 놈들이 서둘러 돌아와 저들의 집이었던 청수채를 약탈하고 있었다. 일부 수적들이 이를 막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행동대였던 놈들의 실력이 더 뛰어난 탓에 상황은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 새끼들이 어디서, 내가 침 발라놓은 건데!”
나는 배가 섬에 닿기도 전에 뱃전을 밟고 도약해 땅을 밟았다. 그리고 좀 전까지만 해도 제 동료였을 수적의 배때기에서 칼을 뽑는 수적의 목을 날렸다.
“손 안 떼는 놈은 벤다!”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 외치자 일순간 수적들이 멈췄다. 몇몇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노, 놈이다!”
“도망쳐!”
채주를 따라왔던 행동대들은 나를 확인하자마자 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가는 놈들만 쫓아가 제압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보퉁이를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놈은 건드리지 않았다. 명성이 필요한 건 맞지만, 쓸데없이 매사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수적들끼리 물어뜯는 개판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게 저항한 쪽은 행동대 녀석들뿐이라 더 그랬다. 오히려 기존에 수채에 남아 있던 수적들은 나를 도와 행동대를 제압하기도 했다.
“다른 쪽으로 도망치던 놈들 붙잡아서 전부 포박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다 물고기 밥으로 던져버릴까요?”
부채주가 슬그머니 와서 상황을 보고했다. 그 뒤로 수적들 일부가 각을 잡고 서 있었다.
“그건 알아서 처리하고. 창고는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처음에는 좀 어리바리하더니 상황파악이 완료된 건지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그 뒤에 도열한 수적들도 다른 놈들이 약탈해가던 보퉁이를 챙겨 따라오기 시작했다.
창고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좀 전까지 제집 식구들에 의해서 약탈을 당하던 처지니 문이 닫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겠지. 그래도 창고가 상당히 컸다. 장강칠십이로채 중 중간은 간다니 곳간도 그 정도 되는 게 맞지.
그런데……
“……이게 다야?”
“예, 그렇습니다!”
부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있는 게 없었다.
내 뒤를 따라온 수적들이 약탈자들에게서 되찾아온 보퉁이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는데, 그게 창고 안에 남아 있는 것보다 많았다.
약탈자들 자체가 패잔병이니 그 숫자가 많지 않았는데, 그들이 가져간 것보다 남아 있던 게 없다니.
그래, 재물은 부피가 다가 아니지. 저 한 줌의 재물들이 작지만 비싼 걸 수도 있잖아. 귀금속, 비단, 보석 같은 거 말이다.
해서 되찾아온 보퉁이들을 열어보니 그 안에 든 거라고는 좀 슬기 시작한 무명, 말린 물고기, 곡식 정도가 다였다. 돈이 될 만한 거라고 해봤자 몇 개 안 되는 은비녀 정도일까?
“진짜 이게 다라고? 말도 안 돼.”
곳간만 크고 텅 비었다. 통행세도 제법 거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창고가 비었다고?
“이거 말고 다른 창고도 있는 거 아냐? 채주 개인 금고 같은 건 없어?”
나는 부채주를 앞세워 채주의 처소로 향했다. 뻔하다면 뻔하게도 병풍 뒤, 책상 밑 등 자잘한 비밀금고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값나가는 건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건진 건 작은 약 봉지 하나.
“이겁니다. 채주가 이 약에 아주 미쳐 있었습니다.”
전생의 오백원짜리 동전만 한 종이봉투 안엔 새끼손톱만큼의 분홍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사탕가루처럼 지독한 단내가 났다.
“이름은 천도(天桃)라고 하는데, 그게 그래 보여도 진짜 비쌉니다. 그거 산다고 채주가 수채 재산을 아주 거덜을 냈습니다. 통행세 받는 것도 정기적으로 약을 사는 데 썼고요. 그 때문에 윗선에 상납할 돈도 부족해서 먹고 입는 것을 계속 줄이고, 그 때문에 다들 채주에게 넌덜머리가 나던 참이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채주가 죽자마자 수적들이 수채를 털어 도주를 하려 했던 거군. 수채에 재물이 충분했다면 도망치는 대신 누구라도 채주가 되려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먹고 죽을 것도 없다. 그나마 있던 구심점 하나가 사라지니 뿔뿔이 흩어지는 수순을 밟을밖에.
“돌겠네.”
수적들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나대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 하러 여기까지 품을 들여서 왔느냔 말이지. 부채주에게 말했던 대로 빈집털이를 하러 온 거라고.
그런데 까고 보니까 텅 비었네?
단순히 빈집털이가 가능하니까 온 게 아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김진으로 행동하면서 계속 금태양의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나 큰돈은 대부분 금왕전장의 전표로 갖고 있는데, 전표라는 건 현찰에 비해 경로를 추적하기가 수월하다.
이참에 딴 주머니를 하나 차서 개인 용도의 자금을 만들려고 했는데 영 글렀다.
천금만큼 비싸다는 마약을 손에 넣은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한숨을 푹 내쉬며 천도를 품에 챙기고 돌아서자 부채주가 하나 남은 팔로 내 옷깃을 잡았다.
“어,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긴? 빈집털이 하러 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가야지, 뭐.”
“가시다니요! 아, 안 됩니다!”
“안 돼?”
이상하다. 내가 팔은 잘랐어도 머리를 치거나 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이 녀석들 입장에선 내가 빨리 가주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왜 안 돼? 난 볼일 끝났는데.”
“저희를 책임져 주셔야지요!”
그 말과 함께 부채주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책임지십시오!”
“청수채의 채주가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