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채주의 기세등등한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수적들은 호위무사들을 상대로는 자기들을 가로막지 못하게 견제하는 정도로 칼을 휘둘렀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호위들도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승기가 수적들 쪽으로 기운 싸움이었다.
항상 보호세, 통행세를 내며 명목상의 호위만 해온 이들과 여차하면 상대의 목숨을 뺏을 준비가 되어 있는 수적들 간의 차이는 컸다.
“으악―!”
“허억, 컥…….”
숫자 면에서도 수적들이 우월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단말마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뭘 멍 때려? 정신 차려!”
그 와중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채주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현건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네가 놓친 고기는 네가 잡아라.”
“김진 공자……!”
“나머지는 내게 맡겨.”
녀석을 저쪽으로 달려간 채주 쪽으로 홱 밀쳐버리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난전, 난투.
어처구니없이 채주를 놓친 현건 때문에 놈들의 기세에는 불이 붙었다.
이 정도로 큰 불은 자잘하게 물을 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주불을 꺼야 한다.
빠르게 시선을 돌려 가장 파급이 강한 중심점을 찾았다.
채주가 아니다.
채주의 왼쪽에 서 있던 녀석.
아마도 행동대장일 놈이 이끄는 무리가 가장 강했다.
[문! 선실 문이 뜯어졌어요!]
우지끈 소리와 함께 선실이 뜯어지고 몇 놈이 그 안으로 진입했다.
그래 봤자 몇 놈 안 된다.
잔챙이쯤이야―,
“어딜! 다들 들어가요! 여긴 내가 막을게요!”
아래층 하인들이 있는 곳은 신생이 막겠지.
위쪽, 항아가 있는 최상층으로 들어가는 놈들 정도는 은 파파가 알아서 할 거고.
위를 흘깃 보니 은 파파는 꽃놀이라도 구경하듯 창틀에 턱을 괴고 앉아선 이쪽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하.
좋다.
나는 주불을 끈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 서장의 검이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짚단처럼 베어냈고 나는 채주의 왼팔이 날뛰고 있는 곳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저놈은!”
채주의 왼팔이 나를 발견했다. 반응속도가 나쁘지 않은 놈이군.
[놈이 호위무사들 사이로 숨어요!]
나를 발견하자마자 녀석은 난전을 유도하며 깊숙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여준 서막의 검은 죽은 가지도 꽃망울 핀 가지도 전부 잘라내는 패도의 검.
내 실력을 봤으니 부러 칼날 사이에 몸을 숨긴 거다.
제법 머리를 쓰는데?
좋아.
백 퍼센트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진 않지만, 이럴 때 써먹어봐야지.
나는 검을 휘두르다 말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나를 가로막던 수적들이 일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기회라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박도를 휘둘렀다.
사각―
그러나 놈들의 박도는 내가 서 있던, 허공이 되어버린 자리를 갈랐고,
툭―
놈들은 단말마를 지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바닥에 맥없이 툭 떨어졌다.
죽은 가지가 꺾여 흙으로 돌아가듯 자연스럽게, 서장을 지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검.
완벽하진 않지만 이런 잔챙이를 상대하는 데는 충분한 수준.
“이번엔 너.”
“어, 언제!”
순식간에 제 부하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앞에 선 나를 본 녀석은 기겁하며 박도를 휘둘렀다. 수적치고는 쓸 만한 기세였지만 당황으로 한풀 꺾인 이상 불은 나를 멈칫하게 할 수조차 없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기세 좋은, 그러나 한 번 흔들린 박도를 가볍게 긁어 튕겨 내버린 후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크아악!”
“꿰에엑!”
두 개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하나는 내 앞에서, 하나는 좀 먼 곳에서.
하나는 그냥 고통에 찬 비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확실하게 단말마의 고통이었다.
“채, 채주!”
죽은 쪽은 내 앞에 있는 채주의 왼팔이 아니라, 현건에게 책임지고 처리하라고 보낸 청수채의 채주였다.
채주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채주의 왼팔은 왼팔이 잘려나갔다.
들불처럼 일어났던 수적들의 기세가 움츠러들었다. 선실로 진입한 쪽에서도 더 이상 싸우는 소리나 비명 소리 따위가 들리지 않았다.
“뭐, 뭐야……? 누가 죽었어?”
“저거 봐!부채주 파, 팔이!”
누군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가, 눈치 빠른 놈들부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풍덩, 풍덩―
“야, 이 개자식들아! 어딜 가! 싸워, 싸우라고!”
왼팔이 잘려나간 채주의 왼팔, 수적 녀석들 말을 들어보니 아마도 부채주일 녀석이 악을 썼지만 말을 듣는 녀석은 없었다.
수적질이나 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평소에야 의리니 충성이니 해도 상황만 바뀌면 바로 돌아서는 게 저런 놈들이다.
“왜, 너도 갈래? 가고 싶은가 본데, 가라.”
나는 부채주를 발로 팍 밀었다. 팔 한 짝이 갑자기 없어져 균형감각을 잃은 녀석은 어쩔 줄 모르고 비틀거리다가 강물 속으로 풍덩 빠졌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놈들도 하나둘 잡아다가 강물에 집어 던지고 나니, 그제야 뱃전이 조용해졌다.
“무, 물러났다. 우린 살았어!”
“흐어억, 크흡……!”
말이 호위무사지, 실전을 처음 겪어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고통에 찬 신음과 울먹이는 소리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둘러보며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선장에게 갔다.
“고, 공자. 덕분에 살았습니다. 공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모두 뭐?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선장이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잘 보니 그의 옆구리에도 베인 상처가 있었다.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깊진 않았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아, 손이 근질근질하네.
[나도요. 저걸 빨리 소독하고, 바늘에 실 꿰서 꿰매고, 기혈 흐름도 좀 잡아주고 그래야 하는데. 으윽, 치료를 못 하다니! 어디서 몰래 가면 쓰고 오면 안 돼요?]
될 리가 없잖아.
‘김진’은 무림인이지, 의원이 아니다.
김진으로서의 나는 의술을 행할 수 없다.
금태양과 김진을 가르는 가장 명확한 경계가 바로 의술이니까.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배에 의원은 없나?”
“어, 없습니다. 간단한 비상약이 좀 구비되어 있을 뿐…….”
하긴, 평소라면 칼부림 일어날 일 없이 통행세 내고 잘 다녔으니 굳이 의원을 상주시킬 필요가 없겠지.
“크흠, 여기 승객 중에 의원 안 계십니까? 승객 말고 뭐 하인이라도, 의원 없어? 정말 없어? 여기 환자가 많고, 비상상황인데. 의원 안 계십니까!”
전생에 기내에서 비상상황이 벌어졌을 때처럼 나는 소리 높여 의원을 찾았다. 선장은 내가 왜 그러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이 배에 의원이 진짜 없어?”
하지만 난 알거든.
이 배에 자신의 신분을 감춘 의원이 타고 있다는 걸.
“거기 돌팔이 제자.”
나는 고개를 돌려 선실 문 밖으로 나온 하인들 중 신생을 찾아 똑바로 쳐다보았다.
“썩어도 준치라는데, 돌팔이한테 배웠어도 의술을 배웠을 거 아냐. 네가 치료해야 하는 거 아냐?”
내 말에 하인들이 웅성이며 신생을 보았다.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신생이 내 제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 맞아. 신생 너 의원이라며.”
“유명한 의원 선생님의 제자라며! 빨리 뭐라도 좀 해 봐!”
“여, 여러분. 저는―.”
갑자기 제게 시선이 모이자 신생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좀 더 밀어붙여야 하나?
“와, 이런 상황에도 빼는 건가? 그 스승이란 작자, 진짜 돌팔인가 보네.”
나는 부러 건방지게 그 앞으로 걸어갔다.
많이 컸네.
소림에 가서 못 본 한두 달 사이에 또 훌쩍 자랐다.
“아니면 스승이 돌팔이가 아니라, 제자가 글러먹었나?”
그렇게 부쩍 큰 제자의 코앞까지 다가가, 나는 신생을 깔보듯 내려다보며 지껄였다.
“하긴 그것도 그래. 세상의 어느 의원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나서지도 못하는 걸 제자라고 받겠어. 맞네. 제자 아닌데 제자라고 사칭하나 본데.”
“……나, 난, 스승님의 제자야!”
“그래?”
그제야 신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자존심, 의지, 뭐 그런 것들.
한 번은 계기를 만나 껍질을 깨고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것들.
“그럼 어디 증명해봐. 네가 그 금태양이란 의원의 제자라는 사실을.”
나는 신생의 옆을 무심하게 툭 지나가며 품에서 손바닥만 한 반짇고리를 꺼내 뒤로 휙 던졌다.
“호북의 명의 금 의원은 좌수검의 왼팔을 바늘과 실만 가지고 붙였다지? 마침 여기저기 잘려나간 인사들이 많네.”
“이것만 갖고는 수술이 가능할 리가―.”
신생이 뭐라 항변했지만 나는 한 귀로 흘리며 배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 정도 자존심을 긁어놨으면 적어도 시도라도 하겠지.
[아, 움직인다. 움직여요! 봤어요? 신생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배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데 그게 보일 리가 없잖아.
[사람들에게 물을 끓여달라고 하면서 가장 위급한 환자부터 추려내네요. 그래, 그래! 잘한다! 원래 네가 더 재능이 있었어! 좋아, 꿰매자! 수술 시작!]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들린다.
급박한 상황, 한정된 자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신생은 다 알고 있다.
내게 의술을 배우기 전, 신생은 태양의원의 시스템을 원활하게 돌아가는 윤활유 역할을 했고, 의술을 배운 이후에는 시스템이 돌아가는 가운데 생기는 구멍을 메웠다.
그 구멍을 메울 만한 지식과 실력, 경험을 충분히 겸비했다.
이제 남은 건 녀석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뿐이다.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지만, 김진으로서 내가 옆에 있어봤자 괜히 화만 돋우지.
[걱정 마요, 내가 잘 보고 있으니까요! 아유, 잘한다. 그래 그 혈이야! 옳지, 지혈됐다!]
응원은 홍령이 하고 있으니까 나는 내 볼 일을 마저 처리해볼까?
“빨리, 빨리 풀어!”
“뭘 풀어! 그냥 끊어버려, 비켜! 내가 자르게!”
피투성이가 된 유람선 옆에는 수적들이 타고 왔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강물로 뛰어들었거나 내가 걷어찬 놈들 중 일부가 그 배에 올라타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기어오르기 쉽게 갈고리 매단 밧줄을 던져 칭칭 감아놓은 것이 오히려 이 상황에선 방해였다.
“수고를 덜어주지.”
자색 검기가 빛나고 놈들이 자르려고 애쓰던 질긴 밧줄이 한 번에 썩은 동아줄처럼 서걱 잘려나갔다.
“허, 헉!”
“놈이다!”
수적들이 나를 보고 기겁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도약해 놈들의 배 위에 올라탔다.
“막아! 저놈을 막아!”
“어떻게 막습니까! 부채주도 팔이 잘렸으면서!”
“막으라면 좀 막아!”
내가 팔을 잘라 강물에 담갔던 부채주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막긴 뭘 막아? 가자.”
“……예?”
아마도 채주가 앉았을 상석에 앉아 턱짓을 하자 부채주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하긴, 내가 자기들을 마무리하러 쫓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가자니까.”
“가요? 어, 어딜?”
“말귀 못 알아먹는 수적이네. 보통 이런 상황에 내가 어딜 가겠어? 채주는 죽었고, 부채주인 너는 팔을 잘렸고, 수적들 절반 이상은 다 강물에 담근 거 같은데. 그러면 내 다음 수순이 뭐겠어?”
“어…… 빈집털이?”
“그렇지!”
놈팡이 무림인 생활한 지 이레도 안 된 나도 아는 걸 수적 생활로 밥 벌어먹고 산 녀석들이 바로바로 답을 못하다니. 통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