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어이쿠야, 쇤네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요. 좋은 시간 보내시지요.”
“아냐! 그런 거 아냐! 너 빨리 옷 입어!”
“이 할미가 나이가 몇 갠데 그 정도도 이해 못 할까 봐 그러십니까. 솔직히 제가 죽기 전에 우리 도련님 자식은 품에 안아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염려는 덜어도 될 거 같구만요. 홀홀.”
“아니라니깐! 아오!”
나는 서둘러 이름도 모르는 미인의 살갗에 옷을 다시 걸쳐주고 방을 나가려는 은 파파를 붙잡았다.
“진짜 그런 거 아냐. 애초에 이 녀석, 남자라고!”
“으음, 증손주를 못 보는 것은 아쉽지만 도련님이 사랑하는 정인이라면 이 할미는 얼마든지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맞아요, 나도 은 파파랑 같은 마음이에요! 내 눈치 보지 말고 맘 가는 사람이라면 팍팍 만나요! 남자여도 이 정도면 진짜 엄청난 미모잖아요? 조카님보다 예쁘다고요, 이런 사람이 흔하겠어요?]
홍령 너까지 진짜 왜 그러냐…….
내 주변 여자들은 나 놀리는 맛에 사나.
나는 은 파파에게 간단하게 이 미인에 대해 설명했다. 들어왔더니 방에 드러누워 자고 있어서 내보내려던 참이다, 행색이 좋지 않아 돈푼이라도 쥐여 주려고 했더니 대가랍시고 다짜고짜 옷을 벗어젖힌 거다…….
“흐음, 근데 이 아,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습니다만…… 아야, 얼굴 좀 보여 봐라.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은 파파가 미인을 불러선 이리저리 얼굴을 살폈다.
“혹시 니 항이 아니가?”
“빠빠?”
“맞네. 항아구나. 아이고, 이리 자라서 못 알아볼 뻔했네. 어디 보자. 얼굴은 여전히 곱고나. 항아루에 안 있고 여긴 무슨 일이냐?”
그때부터 항아라는 미인은 수화 비슷한 손짓으로 은 파파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하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니 수화로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얘기를 가만 들어보니―.
[항주의 항아루라는 기루에서 도망쳐 나온 거군요. 옷차림이며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왜 항주로 돌아가는 배를 탄 걸까요?]
“쯧쯧, 배를 잘못 탔구나. 이건 거기로 돌아가는 배다. 항아가 글을 모릅니다, 도련님. 아마 표지판을 잘못 읽고 배에 몰래 숨어든 모양입디다.”
글을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기루 같은 데선 기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문자나 생활 제반에 대한 상식 따위를 일부러 안 가르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들에게 온전하게 의존하고, 밖에 나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쳤다니 용기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오죽 심한 일을 겪었으면 도망쳤을까도 싶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여기서 멉니까?”
“그걸 도련님이 어찌 아셨습니까?”
“들리던데요. 말은 뭐라는지 모르겠는데 뜻은 알겠더라고요.”
“……그걸 알아들으셨습니까?”
은 파파의 얼굴이 일견 심각해졌다. 뭐야,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 파파인데. 내가 당황해 입을 다물자 은 파파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지요. 허나 이 녀석 혼자 가라고 보냈다간 절대 고향에 도착하지 못할 겝니다요.”
난감하네.
원래는 매몰차게 내보내려고 했는데, 은 파파와 아는 사이라고 하니까 그러기 힘들어졌다. 문자도 세상 물정도 모르는 미인이라니. 세상 험한 꼴 당하기 딱 좋은 조건 아닌가.
[에이, 솔직히 말해요. 미인이니까 보내기 싫은 거죠?]
헛소리 그만하고.
그렇다고 우리가 챙기자니, 우리는 항아가 도망쳐 왔다는 항주로 가는 길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짐이 될 게 분명한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좀…….
꼬르륵―
그때 항아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항아는 멋쩍은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밥부터 먹읍시다.”
은 파파의 장난에 나도 여태 한 끼를 못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일단 배라도 채우자. 그러면 뭔가 좋은 수가 생각나겠지.
사람을 불러 식사를 부탁하고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항아는 당장 어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안도한 건지 벽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고 은 파파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내게 들릴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다.
“공자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응?]
사람을 들이는 대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기루에서 도망친 사람이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지. 항아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헌데 문을 열었더니 예상 밖의 존재가 그 앞에 있었다.
“제가 안으로 들일까요, 아니면 직접 가져가실래요?”
반상 가득한 쟁반을 들고 있는 소년.
그 소년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소년이었다.
[아까 무당파 그 녀석까진 그렇다 치겠는데, 대체 얘가 왜 여기 와 있어요?! 태양의원은 어쩌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대체 신생이 왜 여기 있지?
순간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이리저리 얼굴을 뜯어봤지만 눈앞에 쟁반을 들고 선 하인은 내 제자, 신생이 맞았다.
아무렴 내가 키우다시피 한, 개방 방주의 앞에 서 지켜낸 내 제자를 못 알아볼까 봐.
“음식 안 받으세요?”
신생이 뾰족한 말투로 투덜거렸다.
“어, 어. 그래.”
나는 얼떨떨하게 쟁반을 받아들었다.
“특실이라 음식 계속 올라올 거예요. 먼저 드시고 계세요.”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올릴 필요 없다.”
“그럼 됐고요.”
신생은 쌀쌀맞게 돌아섰다.
나를 알아본 건 아닌 게 확실하군.
“식사가 왔으면 갖고 들어오시지, 여기 서서 뭐 하십니까요?”
“은 파파, 이거 항아랑 먹고 있어. 나 잠깐 다녀올게.”
나는 그대로 쟁반을 은 파파에게 넘기고 신생의 뒤를 밟았다. 대체 무슨 일로 여기 와 있는 건지 알아야 했다.
[그냥 내가 금태양이다, 오랜만이야 하면 되잖아요? 굳이 귀찮게 뒤를 밟아야 해요?]
내 위장이 완벽한지 알아볼 기회기도 하잖아. 게다가 신생이 무슨 일로 여기 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 정체를 공유하는 건 위험하다. 만에 하나라도 저게 진짜 신생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신생은 선실을 한참 내려갔다. 아마도 하인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척을 죽이고 한참 따라 내려갔다. 신생이 식당의 문을 닫고 들어갔고, 나는 귀를 바짝 붙이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어땠어? 진짜 호위들이 말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해?”
“음식이 별로라고 칼을 들이밀지는 않던?”
신생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물어오는 내용들을 들어보니, 선상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하인들이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 무림인은 일반인 기준에 무섭기 마련이지.
“그냥 좀 싸가지 없고 끝이던데요. 다음 상은 필요 없대요.”
……내가 그렇게 싸가지 없게 했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생이 말하니까 되게 맘이 그렇네.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해 놔. 그런 작자들이 꼭 변덕스럽게 왜 다음 상이 안 올라 오냐고 한다고.”
“맞아요. 자칫하면 선실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고요. 미안한데 신생아, 다음 상도 좀 부탁하마. 너는 무공을 쓸 수 있다며, 응?”
“항주 도착할 때까지 그 사람은 제가 담당할게요. 뱃삯 대신 일을 하기로 한 거니까 얼마든지 맡겨주세요.”
“헌데 너는 왜 항주로 가는 거냐? 사람을 찾는단 얘긴 들었는데.”
“스승님을 찾으러 가요. 겸사겸사 볼 일도 있고요.”
그렇군. 그런 이유로 이 배를 타고 있었구나.
소림에서의 일이 길어지자 리가 신생을 보낸 모양이다. 태양의원의 운영 현황에 대한 보고 겸, 나와 금동이도 보고 오라고 보낸 거겠지. 근데 갔더니 내가 떠났단 얘길 들은 거고. 항주 쪽으로 간다는 얘기를 둘째 형님과 양진 등에게는 해놨으니까.
[창천이랑 길이 엇갈렸나 보네요. 하긴, 창천은 지독한 길치였죠?]
그러게. 녀석을 혼자 보낸 게 좀 후회되는데……. 뭐, 어디 가서 객사할 실력은 아니니 어찌 저찌 알아서 잘 찾아가겠지.
“스승님이면, 무술 스승님?”
“아뇨, 우리 스승님은 의원이세요. 금태양이라고, 태양의원의 주인이자 엄청난 명의라고요. 못 들어봤어요?”
“오호, 태양의원이라면 손님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 있어. 그럼 너도 의원이야?”
“그냥 배우고만 있어요. 의원이라고 할 정도는…….”
“그래도 배운 가닥이 있겠지. 내가 요새 허리가 좀 아픈데, 침 좀 놔줄 수 있어?”
“아, 아뇨. 침을 갖고는 있는데, 전 그럴 실력이 안 돼요.”
“거 되게 빼시네. 그냥 눈 딱 감고 놔 봐. 그럴 실력이 되나 안 되나는 우리가 한번 봐볼게.”
“아뇨, 진짜, 진짜 안 돼요! 침은 잘못 놓으면 큰일 난다고요……. 대신 제가 소개장을 써드릴 테니까 언제 시간 날 때 태양의원 분점에라도 가보세요.”
“에이, 됐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제 호북까지 가나? 다들 일 봐!”
다들 흥미가 식었는지 우르르 자기 일자리로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홍령이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그게 뭐라고 애가 그새 축 처졌네요. 그냥 한번 해본다고 하지. 충분히 실력 있는데.]
그러게. 치료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실력도 충분하고.
……잠깐.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신생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뜰 때는 항상 내가 곁에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의원들이 함께거나.
[맞아요. 한 번도 신생이 혼자 치료를 하게 내버려 둔 적이 없었어요.]
내가 너무 애를 싸고돌았나? 근데 아직 어리잖아. 태양의원이 신생 고사리 손까지 필요할 정도로 사람이 부족하지도 않고.
하지만 실력이 충분한데 자신감이 없는 건 안 될 말이지.
이참에 신생에게 자신감을 좀 심어주는 것도 괜찮겠는걸.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생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추가로 상 올려드려요?”
분명 내 제자로서 신생은 무척 귀엽고 예의 바르고 품행 단정한 소년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날 띠껍게 보는 거 같지?
분명 존대를 쓰고 있는데, 뭔가 따박따박 따지는 말투에, 올려다보는 것도 그냥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거의 꼬나보는 수준이다.
태양의원에서도 진상 중의 진상에게나 이런 식으로 대했는데.
[솔직히 진상 맞잖아요. 신생은 그런 무림인이 되기 싫어서 개방에서 도망쳤으니 당신을 띠껍게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냐고! 나도 성격에 안 맞다고!
“추가 상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원하는 게 뭐냐고요. 빨리 말하세요, 바쁘니까.”
하아, 이걸 확…….
[그거 봐요. 겉으로만 진상 아니라 속으로도 진상 다 됐네.]
그런 거 아니거든?
하나뿐인 제자나 하나뿐인(?) 귀신이나 하여간…….
그렇다고 내가 금태양이다 사실을 밝히면 신생은 또 내게 의지할 거고.
에라, 모르겠다.
“어, 밥 좀 더 달라고. 근데 안에서 하는 얘기가 들리던데, 네가 금태양인지 뭔지 하는 돌팔이의 제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