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아닙니다, 공자님.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공자님까지 나서실 일은 아닙니다.”
그때 조금 멀리서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를 공짜로 타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 정도는 도와드리는 게 맞습니다. 그만한 고수라면 가는 내내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냥 인사 정도 하고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는 정도입니다. 내가 가보겠습니다.”
흐음, 이 배에 제법 실력이 괜찮은 무인이 있나 보다. 뱃삯 대신 내게 경고를 하러 오는 모양인데.
“홀홀, 나쁘지 않구만요. 도련님은 한시라도 빨리 악명을 떨쳐야 하는 몸이지 않습니까?”
“악명은, 명성이라고 해줘.”
“그게 그거지요, 홀홀. 저기 옵니다요.”
김진으로서의 명성이 빨리 높아질수록 금태양과 김진을 분리해서 움직이기가 쉽다. 거기에 소림의 예비제자로 화산지회에 나가게 되었으니까, 기왕이면 소림을 위해서라도 이름값은 좀 높여주는 게 좋겠지.
[어라? 쟤가 왜 여기서 나와요?]
이쪽으로 다가오는 유람선의 무인을 본 홍령이 당황하며 말했다.
고개를 든 나도 똑같이 당황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 배의 호위 총책임을 맡은 건이라 합니다.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수하들이 결례를 범한 듯해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나 참.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얼마나 알아볼까 궁금해하긴 했지만, 여기서 바로 날 아는 사람을 만나네.
[도사 차림을 하고 있을 땐 그냥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더니, 그냥 무복을 입으니까 인물이 확 사네요.]
무당의 삼대제자 중 대제자인 현건.
그가 내게 포권을 취하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미안. 호위 총책임이면 나이 든 노땅이어야 하는데, 웬 젊은 총각이 나와서 당황했네.”
“아마 귀인과 나이가 비슷할 겁니다.”
“그런가? 하핫, 내 나이를 어떻게 알고? 그쪽은 기껏해야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데.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
“겉보기에 그래 보인다는 뜻입니다.”
김진의 컨셉 중 하나는 나이를 헛갈리게 만드는 거다. 이 동네야 반로환동의 고수들도 많고, 나이 자체를 아주 느리게 먹는 이들도 있으니까.
내 실력이 반로환동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반로환동을 해도 큰일이다. 지금 젊어지면 신생보다 어려질 수도 있다. 내가 명탐정 X난도 아니고.)
“그래서 그쪽은 이름이 건이라고? 외자야? 성 없어? 영 허전하네?”
무당파의 표식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이고, 검도 원래 그가 쓰던 검이 아니다. 거기에 이름도 현건이 아니라 건이라 소개한 걸 보면 그 또한 나처럼 신분을 숨기고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건이라니, 진짜 성의가 없네요. 이쪽을 봐요. 이쪽은 얼굴도 갈았지, 가면도 벗었지, 이름은 아예 딴판이고. 자기 정체를 숨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여간 무당놈들 빠져가지고.]
얼굴은 일부러 갈아버린 게 아니잖아.
[어쨌든 결과가 그렇잖아요. 쟤가 성의가 없다는 거예요, 성의가.]
홍령이 툴툴거리거나 말거나, 오히려 내 입장에선 알아보기 쉬워서 좋네.
처음부터 껄끄러운 관계였고 지금도 호북의 북쪽 일대에서 의원 영업권을 가지고 알력싸움을 하고 있는 상대다.
그런 무당의 가장 실력 있는 후기지수가 자기 신분을 감추고 항주로 향하는 배를 탄다.
“그렇습니다.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혹 귀인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내 이름? 알아서 뭣하게?”
“저도 그렇지만, 귀인을 모시게 될 뱃사람들이 존함을 알면 더 쉬이 모실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김진이다.”
녀석도 아버지의 유산을 노리나?
[가능성 있죠. 제갈 소저가 그랬잖아요. 불사의 영약은 엄청난 내공 증진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요. 양양에서 무당 막내제자가 창천한테 호되게 당했으니까, 본선 전에 요 녀석의 공력을 올려줄 심산 아니겠어요?]
가능성 있는 얘기다.
무당처럼 쪽수가 있는 문파가 왜 이 녀석 한 놈만 보낸 건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들 사정일 테고.
“볼 일은 그걸로 끝?”
“……최상층에 방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언제든 올라가시면 됩니다.”
“알았어, 가 봐.”
오래 대화를 나누면 금태양의 버릇이 나올 거 같아서 나는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현건은 잠시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목소리가…….”
녀석은 물러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작은 혼잣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내가 들으라고 한 얘긴 아니었겠지만.
젠장, 목소리까지 바꿔야 하나?
[그렇게까지 티 날 정도는 아닌데. 에이, 괜한 걱정일걸요. 솔직히 저 사람이랑 몇 번이나 말을 나눴다고요. 매일매일 붙어 다니던 신생이나 창천 정도라면 모를까.]
홍령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괜히 찜찜했다. 괜히 반로환동의 고수 같은 걸 연기했나. 또 알아? 성대가 젊어져도 나이 든 노인 특유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 걸지도.
괜히 이중신분 같은 걸 만들었나? 은근 귀찮네.
“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겝니다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먼저 올라가서 쉬시지요. 이 할미는 뱃구경이나 좀 하다 올라 갈랍니다.”
내가 피곤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최상층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미 내 악명(?)이 배 전체에 퍼졌는지 방으로 안내하는 시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괜히 미안하네.
그래도 방은 좋았다.
항주로 가는 여객선 중 가장 크고 비싼 배, 그중에서 제일 좋은 선실을 내달라 한 거니까.
이쯤 되면 배에 있는 선실이어도 딸랑 방 하나가 아니다.
[세상에, 방이 몇 개야? 이거 봐요. 여기도 방이 있어요!]
홍령은 방이라기보단 거의 건물 한 채에 준하는 규모의 선실을 둘러보느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생의 호텔 스위트룸 같은 느낌이다. 몇 개의 침실에 강이 내다보이는 식사자리, 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둘러앉을 수 있는 거실개념의 공간까지.
쓰는 사람이 둘이라 아쉬울 정돈데.
[그러게요. 아아, 지금처럼 내가 귀신인 게 아쉬운 적이 없어요. 이 침상 부드러운 거 봐요. 드러누우면 극락이겠다, 극락이겠어!]
그러게. 극락인가 본데.
얼마나 극락이면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눈치 못 채고 계속 자고 있을 수가 있지?
부드러운 침구와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진 제일 큰 방의 침상. 그곳에 이미 누가 누워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이며 옆으로 자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규칙적으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자고 있는 모양인데.
[어라, 이 사람은 누구예요?]
당연히 나도 모르지. 그 잠깐 사이에 은 파파가 허공답보로 올라와서 드러누워 자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봐.”
옷이 남루한 걸 보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가?
‘금태양’이라면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겠지만 지금 나는 ‘김진’이니까.
“셋 셀 때까지 일어나라. 하나둘셋.”
한 호흡에 셋까지 세고 그대로 불법 침입자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집어던졌다.
“꺄악! 악!”
가볍다?
불법 침입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느낌은 그랬다. 가벼웠다. 상대가 체중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무슨 깃털을 잡아다 바닥에 던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곁을 스치며 풍기는 이 향기.
“……복숭아?”
코가 녹을 듯이 달콤한 향기가 한순간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불법 침입자가 고개를 들었다.
[와…… 와…….]
와씨.
나와 홍령은 동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 뭐, 뭐예요? 이런 미인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미쳤다, 선녀예요?! 너무 예쁜데?!]
내가 집어던진 불법 침입자는 정말, 귀신도 호들갑을 떨게 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막, 롹악? 너납앤아비러아?”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다.
뭐라는 거야?
[모르겠는데요? 서역어인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말이라고 하기도 이상했다. 규칙성이 없는 그냥 소음들이라고 해야 하나.
“잡으러 오긴 누가 잡으러 와. 여긴 내 방이야, 불법 침입자 씨.”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 누구? 날 잡으러 왔어?”
그런 뜻이었다.
상대는 내가 대답을 하자 더 놀라서는 그 자리에 굳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금태양이라면 자리에 앉혀놓고 무슨 일이냐고 일단 얘기를 들어봤을 거다.
저만한 미모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 사람이 없는 방에서 몰래 자고 있다가 자기를 잡으러 왔냐는 소리를 하는 것까지.
한 번에 어떠한 그림이 쫙 그려지는 배경이 있을 법하지 않는가.
허나 나는 김진이다.
“나가, 내 방이야.”
나는 그대로 밖을 향해 손짓했다.
그나마 아까처럼 집어던지지 않은 게 최소한의 배려였다. 웬만한 놈팡이였으면 그냥 강물 밖에 집어 던졌을지도.
[어머, 여자에게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이더니. 이만한 미인에게는 또 얘기가 다른가 봐요? 당신도 남자는 남자군요? 하긴, 환골탈태로 몸이 좋아졌으니 거기 사정도―.]
아, 진짜. 우리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긴 하지만 프라이버시는 좀 지키자.
그리고 저게 어딜 봐서 여자야?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니 키는 나보다 크고, 아름답지만 중성적인 미모다. 목에 목젖도 뚜렷하고.
여기야 남녀 할 것 없이 머리를 길게 기르니 얼핏 착각할 수도 있지만 불법 침입자는 남자였다.
“나가라고. 안 나가면 내가 나가게 해주랴? 아까처럼 창문 밖으로 내던져서 아주 이승하고 하직하게 해줘?”
나를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기에 나는 한 번 더 윽박질렀다.
솔직히 좀 맘이 안 좋긴 하다.
이 배에서 저만치 눈에 띄는 사람이 가면 어딜 가겠는가.
게다가 돈도 없어 보이고.
내게도 다짜고짜 칼을 들이댔던 이들이 돈도 없어 보이는 미인에게 할 짓이라면…….
[말도 이상하게 하던데. 그냥 있으라고 하면 안 돼요? 방도 많잖아요.]
있으라고 하면, 뭐?
내가 또 구해서 일일이 사연 알아봐 주고 해결해주고 그럴 거야?
다른 때라면 김진의 신분이라도 어떻게든 도와줘 봤겠지만 지금 나는 항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불사의 영약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
안 그래도 은 파파의 장난 때문에 하루 만에 올 거리를 닷새에 걸쳐 뱅뱅 돌아서 내심 초조한데,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일이 급할 땐 다른 일에 눈을 꽉 감을 수밖엔.
“이봐.”
말은 이상하게 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는지, 자신의 삿갓과 면사를 찾던 미인이 고개를 돌렸다.
짤그랑.
“이 정도면 나룻배 하나는 내줄 거다. 가 봐.”
……아무리 ‘김진’이라도 변덕 정도는 부릴 수 있겠지.
그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내가 던진 전낭을 집어 들어 그 안을 살펴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전낭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뭔데. 그렇게 많은 돈 아닌데. 무슨 천 냥 빚이라도 갚아준 사람처럼 보는 건데.
“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 돈이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흑…….”
[당신은 알아듣는 거예요? 무슨 원숭이 소리 같은데.]
내 귀에도 이상한 소리지만 뜻은 이해할 수 있다. 진짜 별일이 다 있군.
“그렇다면 나도 답례로, 이거라도―.”
미인의 손가락이 옷고름으로 향했다.
잠깐만. 아냐, 그거 아냐!
“도련님, 이 쇤네는 어느 방을 쓰면 될깝쇼?”
은 파파가 방으로 들어온 순간, 내가 말리기도 전에 미인의 겉옷이 여린 살결을 미끄러지듯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