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거기 서!!!! 배 세워!!!!”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화려하고 거대한 유람선은 이미 선착장을 떠나 강 물살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선미에서 호호백발의 노파가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은 파파, 가만 안 둬!!!! 젠장!!!!”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 발판이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나룻배! 강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띄운 나룻배를 발견한 나는 그대로 선착장을 박차고 나룻배 쪽으로 뛰어올랐다.
내 발 디딤에 나룻배가 휘청 기울었다.
“어이쿠야! 다, 당신 뭡니까!”
“으아악! 사람 살려!”
“실례!”
나는 급격하게 기운 나룻배를 다시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다음은 저 배, 그 다음은 저 배, 다음엔 떠내려 오는 썩은 나무토막!
한강보다도 넓은 강에서 발을 디딜 기물을 찾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나는 빠르게 내가 목표로 한 유람선을 뒤쫓았다. 하지만 더 이상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잡히기만 해 봐!!!!”
나는 물 위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발끝이 수면을 박찼다. 돌로 물수제비를 뜨듯 수면이 터졌다.
파팟!
[다 왔어요!!!]
유람선까지 일 장 거리가 남았을 때, 나는 모든 공력을 끌어모아 수면을 박찼다. 나를 중심으로 거센 물보라가 쳤고 나는 그대로 위로 솟구치며 선미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밟아 올랐다.
“어엇?!”
“사, 사람이 강에서 뛰어올랐어!”
선미에 나와 있던 몇몇 사람들의 경악 속에서 나는 갑판 위에 착지했다.
“허억, 헉…… 뒈지는 줄 알았네. 허억, 헉…….”
짝, 짝, 짝.
가쁜 숨을 삼키는데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꼭 박수 소리도 그런 거 있지 않나. 감탄해서 하는 박수가 아니라,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잘했네, 잘했어. 그런 거. 은근 사람 약 올리는 박수.
“잘하셨습니다요. 이 할미의 예상보다 촌각 정도는 빠르셨구려.”
“은 파파아아-!”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그려. 홀홀홀.”
은 파파는 주름진 얼굴에 골을 패여 가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만 같아선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데, 또 사람이 어떻게 친할머니 같은 존재에게 침을 뱉겠는가. 상대가 아무리 얄미워도 말이다.
어휴, 앓느니 죽지.
[그래도 정말 저번보단 빨랐어요. 은 파파의 특훈이 효과가 있네요.]
이거 봐라. 홍령까지 내가 아니라 은 파파의 편을 든다.
[다 당신 잘되라고 그러는 거잖아요. 솔직히 그간은 안전하게 살았죠. 당신이 의원이라 더 그랬을 거고요. 하지만 무림인으로 살려면 위기대처 능력을 길러놔서 나쁠 거 없다고요.]
그렇다.
지금 나는 은 파파가 주도하는 위기대처 특훈을 하는 중이다.
사실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난 진짜 은 파파랑 여행을 하고 싶었다고.
약수가 나오는 온천이 있는 고급 객잔에 투숙하면서 귀한 대접도 받게 해주고, 은 파파가 좋아하는 음식도 비싼 걸로 턱턱 시켜놓고, 이런 호화 유람선 제일 꼭대기 층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도 하고.
허나 내가 꿈꿨던 효도관광은 첫날부터 망했다.
몸 건강한 청년과 웬만한 야숙은 눈도 깜빡 안 하는 노친네가 무슨 객잔이냐며 지름길로 가자고 길을 틀고선, 먼저 불침번을 선다기에 알았다고 했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 줄 아는가?
눈을 떴을 때 난 천장단애의 중간쯤에 걸려 있었다.
그것도 밧줄로 온몸을 칭칭 묶인 채,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고.
[그땐 솔직히 식겁했어요. 노인네가 무슨 힘이 나서 당신을 번쩍 들고는 절벽을 내려가는지. 당신은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지. 설마하니 당신을 죽이기야 하겠어 하고 빙의는 안 하고 지켜봤는데, 귀신도 식은땀이 나는지 처음 알았다니까요.]
그래, 죽이기야 하겠나.
만약을 대비해 절벽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기는 했다.
그 모습이 먹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맹수 같아서 문제였지.
심상 속 화산에서도 절벽을 타는 수련은 많이 했지만 아무 도구도 없이 밧줄에 칭칭 묶인 건 처음. 거기에 밧줄이 질기기는 얼마나 질긴지, 이빨로 물어뜯어도 생채기 하나 안 나서, 결국 손목과 발목만 움직이며 겨우겨우 절벽을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모든 짐을 뺏어 도망친 은 파파를 쫓아가야 했죠…….]
겨우 따라잡았더니 그 다음에는 백호채인지 뭔지 하는 녹림산채 중 제법 힘이 있는 산채를 건드려 벌집을 만들어놓고는 나한테 떠넘기질 않나, 지네 영물이 가득한 곳에 나를 집어던지질 않나, 내 짐을 지방에선 알아주는 무림장원 장주실에 넣어두고 찾아오라질 않나……,
이게 고작 나흘간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번엔 배 시간을 딴판으로 알려줘 놓고 내 짐을 모조리 챙겨서 먼저 탑승한 거다.
“그러니 이 할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홀홀홀.”
그게 친할머니 같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라고 따질 기력도 없다.
그래, 내 친할머니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인 것을 어찌하겠나.
다 날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하고.
은 파파의 기행에 한숨을 푹 쉬고 있는데, 배 안쪽에서 창과 검을 든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나를 둘러쌌다.
“누구시오! 이름을 밝히고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병장기를 패용한 것을 보니 이 배를 운용하는 상단의 호위무사들인 모양이었다. 수면 위를 달려와 배에 뛰어내린 내가 위협적이었는지, 창끝은 나를 향했고 검은 반쯤 뽑힌 상태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은 파파는 어쩌다 휘말린 노파인 양 그들의 뒤로 물러났다. 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 좀 봐. 효도 다 취소다, 취소.
“지금 그 무기들은 나를 어찌해보려고 그러고 있는 건가?”
목을 가볍게 좌우로 꺾자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안 그래도 며칠 내내 노인네 변덕에 시달리느라 은근 스트레스였는데.
“좋아, 원한다면 한번 해볼까?”
“무슨―.”
상대가 반응하기 전에 움직였다. 가공할 속도. 죽도록 뛰어왔지만 정말 혀 빼고 깨물겠다 할 정돈 아니었으니.
저들의 눈에는 바람이 불더니 내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거다.
창을 든 이들이 허둥지둥 창끝을 찔러댔고 검을 반쯤 뽑았던 이들은 엉거주춤 검을 뽑다가 칼끝이 검집에 걸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사이 나는 그들의 뒤에 도착해 있었다.
검이 검집에 착 감겨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무기가 반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고, 고수다!”
“비상! 비상이다!”
누군가 품에서 뿔나팔을 꺼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었다. 가볍게 겁만 주려고 했는데 일을 키우네. 귀찮아지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 일이야 칼이든 돈이든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귀한 분을 모시고 있으니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거늘, 무슨 일이냐!”
“고수입니다, 저자가 일 검에 저희 모두의 무기를―.”
헐레벌떡 나타난 선장이라는 자는 잘려나간 무기가 나동그라진 선미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뉘, 뉘시오? 청수채에는 석 달 치 통행료를 넉넉히 지불했는데!”
“누굴 수적에 비교해? 난 그냥 승객이야.”
나는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 동작에 선장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내 손이 더 빨랐다. 나의 품에서 나온 얇은 종이가 비수처럼 하늘을 날았다.
사각―
종이는 선장의 옷깃을 자르고 그 뒤의 나무로 된 벽에 박혔다.
“바, 방금 뭐가 지나갔는데―
“선장님, 뒤! 뒵니다!”
“……전표?!”
내가 비수처럼 날려 벽에 박아 넣은 것은 바로 금왕전장의 전표였다.
“여기서 제일 좋은 방.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아, 알겠습니다!”
이만한 유람선의 선장쯤 되면 고급 전표의 진위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지, 그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나에 대한 평가를 빠르게 수정한 거다.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고수, 그러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큰돈을 아무렇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부자 손님.
“빠르게 준비할 테니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야, 이것들아 뭐 해! 당장 무기 안 내려! 저 무기 부스러기들 치우고, 술상 봐드려! 특등으로!”
호위무사들은 갑작스레 돌변한 선장의 태도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내가 빼빼로처럼 잘라낸 창대와 검 등을 서둘러 챙겼다.
“술은 됐고 차가 좋은데.”
“야, 차를 드신단다! 최고급 용정차를 올려라!”
원래도 선미는 느긋하게 강을 구경하며 차를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있었다. 내가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뒤로 물러나 있던 은 파파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내 봇짐.”
“전표를 따로 빼놓으셨을 줄이야. 이 쇤네가 당했구만요.”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면서?”
나는 돌려받은 봇짐을 풀어 빠진 게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그러는 동안 차가 나왔고 은 파파가 내 잔에 찻물을 채웠다.
“이제 연기가 제법 능숙하십니다요.”
“연기라니, 무슨 소리야? 이게 원래 나야.”
“원래 도련님이 아니란 말은 안 했습지요. 홀홀. 이 할미한테 하는 말이라도 말을 조심하십시오, 김진 도련님.”
“말이나 못 하면.”
나는 부러 싸가지 없는 투로 툴툴거리며 다시 봇짐을 말았다. 나답지 않게 살려니까 매사 피곤해 죽겠네.
[그런 거 치곤 너무 잘하는데요? 난 당신이 원래 이렇게 성격이 나빴나 했어요.]
원래라.
원래대로라면, 선착장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며 나룻배들을 밟았을 때 미안하다며 푼돈이라도 던져줬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호위무사들이 달려오기 전에 상단사람으로 보이는 이를 찾아서 실수로 배 시간을 잘못 알고 이제야 따라왔는데, 지금이라도 뱃삯을 내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무인들의 무기를 괜히 반 동강 내버리는 일도 안 했겠지. 이 일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의 급여에서 무기값을 제하거나 사비로 무기를 수리해야 할 테니까. 선장에게 호된 꾸중을 받는 것은 덤이고.
‘금태양’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했다.
[그래도 정말 괜찮았어요. 누가 봐도 당신을 ‘금태양’이라고 생각 못 할걸요? 은 파파의 생각이 맞네요.]
그렇다.
지금 나는 ‘금태양’과는 완벽하게 차별화되는 ‘김진’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그래야 두 개의 신분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난 얼굴이 다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프로 중 프로인 은 파파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임기응변 특훈에 더해 성격과 습관까지 전부 바꾸는 특훈 중인 거지.
그간은 계속 지적을 들었는데,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좀 괜찮았던 거 같다. 홍령도 인정할 정도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둘을 쉽게 연관 짓지 못할 거다.
내가 아는 사람, ‘금태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