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헌데 유서라니, 웬 말씀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 아버지가 위패에 지도를 남겨놨을 수는 있지만, 그걸 내가 찾을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편지를 써둘 순 없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보다 더한 환자였는데.”
처음에는 유산의 행방을 기록했을 지도에 관심이 많았지만, 생각할수록 편지가 이상했다. 아버지는 점쟁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점쟁이도 내 회복을 점치진 못했을 거다. 그야말로 천운에 천운이 겹친 일이었으니까.
아버지의 위패를 손에 넣은 것은 과감하고 일견 무모한 일이었다. 정의를 행하는 일도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데 불의는 안 그렇겠는가?
내가 위패를 손에 넣기로 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은 파파다. 그 자리에 정반합의 일원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그중 하나를 통해 새어나갔을 수도 있고 그 정보를 은 파파가 알아도 이상하지 않다.
“뭐,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도지.”
지도.
어딘가의 위치를 그린 듯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선들은 당장 큰 의미가 없다.
이 중원이 얼마나 넓은데, 이걸 일일이 큰 지도랑 대조하면서 찾을 수도 없고.
중요한 건 여기저기 적혀 있는 글과 단어들이다.
아마 지명이나 이곳을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놓았겠지.
모용을의 도움(?)으로 나는 그 이상한 글자들이 내 전생에서 쓰이던 문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기하네요. 당신 아버지도 전생이 있던 사람인 걸까요? 당신과 같은 곳에서 온?]
그건 아닐걸.
그랬으면 내가 봤을 때 바로 내용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이건 그 문자를 그냥 차용하기만 한 비밀 암호다.
내가 어릴 때, 몇 살이더라. 컨디션이 그나마 좀 회복되었던 때가 있다.
그때 내가 미친 건 아닌지, 내 정신이 멀쩡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전생의 기억들을 종이에 하나하나 써내려 간 적이 있다.
그중 영어와 일본어 등을 연습했던 걸 아버지가 보고 신기한 그림이라며 가져가신 적이 있지.
내가 뭘 하는 거 자체에 너무 기뻐하셔서 안 된다고 말도 못 하고 드렸는데, 그걸 기반으로 암호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 나름대로 변형을 해서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문자의 형태를 알아냈으니 하나하나 규칙을 알아보면 되는 거다.
말은 그렇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규칙성을 보려면 표본이 많이 필요한 데 내가 가진 건 손바닥만 한 암호문이 전부. 이런 걸 잘하는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는 물건이다.
다른 할 일도 많으니 제법 시일이 걸릴 줄 알았는데…….
“항주지?”
제갈다영 덕분에 쉽게 한 단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단어 하나를 확인하니까 나머지는 생각보다 쉽게 풀리더라고. 그냥 글이 아니라 주소였어. 항주 시내 어딘가에 있는 주소.”
“호오, 그렇구만요.”
“아버지의 유산이 항주에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으면 해독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을 거야.”
제갈다영에게 지도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내게 한 가지 소문을 전했을 뿐이다.
“당신 아버지 금왕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찾고 있던 불사의 영약이 항주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죽을 사람도 그것만 먹으면 살아난다나? 소문을 들은 무림인들이 항주로 가고 있대요. 사람을 살릴 영약이라면 무림인이 섭취했을 때 내공 증진도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자하신룡 같은 후기지수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을걸요?”
그런 영약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날 먹였겠지. 하지만 그 말을 듣고 혹시나 싶어 지도를 구해 대조해봤더니 꼬불거리는 선들이 항주 일대의 지도와 매우 유사했다. 항주라 적힌 암호문을 알아본 것도 지도 덕이 크고.
그런 걸 알아보느라 금동이와 놀아주며 이틀의 시간을 보낸 거다.
무작정 가서 맨 땅에 헤딩하느니 확실하게 알아보고 움직이는 게 나으니까.
“은 파파는 내가 이걸 손에 넣길 바라는 거지?”
사실, 아직도 뚜렷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은 파파가 나를 가엽게 여겨서 아버지가 남몰래 남긴 유산을 주고 싶었다면 그냥 주면 될 일이다. 은 파파는 지도 속 암호문의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물며 불사의 영약? 내 몸에 좋은 거라면 혈혈단신으로 영물 너댓 마리도 잡아오던 은 파파가 그걸 바로 가져와서 내 목구멍에 쑤셔 넣지 않는다고?
왜 굳이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방법을 쓰는 걸까.
내 머리로는 한 가지 답밖에 도출할 수 없었다.
“불사의 영약,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그게 전부가 아닐 거야. 오히려 일부에 불과하겠지.”
은 파파는 가타부타 말없이, 계속해 보라는 듯 빙긋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내가 직접 손에 넣어야 하는 유산. 다른 형제들은 그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한 유산. 은 파파마저 직접 내 손에 쥐여 주지 못하는 유산.”
그건 물건이 아니다.
“사람. 은 파파 밑에 있는 그림자들. 그리고 그들이 금가장과 별도로 운영하던 사업들. 그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야. 맞지?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지?”
내가 알기로, 큰 형님은 아직 은 파파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리에게 들은 얘기니까 그 부분은 확실할 거다. 정보를 제공하거나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주는 등 기존에 아버지가 계시던 때처럼 움직이긴 하지만 그뿐. 은 파파를 큰 형님이 원하는 대로 휘두르거나 명령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금가장의 그 누구도 은 파파 뒤에 서 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모른다.
그 어떤 그림자가 자신들의 정체도 모르는 이를 주인으로 삼고 명령을 따르겠는가.
“도련님. 참으로 많이 자라셨습니다.”
은 파파가 짐짓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첨 뵈었을 때는 요만한 핏덩이였는데. 어느새 참 많이도 자라셨구료. ……제가 장주를 만났을 때 장주의 나이가 딱 지금 도련님만 했습니다요.”
“아버지가?”
“예. 그때 장주는 젊고 혈기 넘치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 아주 강한 사내였습니다.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지요. 도련님은 상상도 못 하실겝니다. 그 누군들 상상을 할까요, 그 시절의 장주를. 홀홀홀.”
옛 추억을 그리듯 은 파파의 시선이 잠시 먼 하늘을 향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장주의 젊은 날이 있습니다, 도련님. 그 시절의 장주와 도련님을 비교해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겠지요. 허나 언제든 이게 아니다 싶다면, 그저 돌아가 태양의원의 금 의원님으로 살고 싶다 하면 이 쇤네를 찾아주시지요. 항상 도련님 곁에 제 눈과 귀가 함께 있을 겝니다요.”
그렇게 말하며 은 파파는 내 곁을 지나가려 했다. 마치 행상인 노파가 길을 지나가듯, 잠깐 길이나 물어본 듯 지나가려는 그의 팔을 내가 붙잡았다.
“도련님?”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자 그대로, 같이 가자고.”
내 말에 은 파파가 피식 웃었다. 이런 귀여운 녀석을 봤나, 그런 얼굴.
“도련님, 아까 도련님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그 사람들 내 밑으로 데려와 달래? 그냥 같이 가자고.”
은 파파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 말이 그렇게 어려웠나?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말의 뜻을 풀어 설명했다.
“항주면 제법 먼 길이지. 가는 길은 배편이 편하다는데, 또 그 뱃길 경치가 제법 괜찮다나. 돈은 내가 낼 테니까 같이 가자. 손주랑 여행 가는 셈 치고.”
그제야 은 파파는 내 말 뜻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쇤네랑 여행을 가시겠다고요?”
“내가 은 파파랑 제대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잖아.”
“없기는요. 쇤네는 항상 도련님 곁에 있지 않았습니까요.”
“나 참, 그런 거 말고.”
나 아플 때 병간호 해준 거. 외출했다 인적 드문 곳에서 쓰러졌을 때 불쑥 나타나 나를 금가장으로 데리고 간 거. 환자식에 질려 아예 밥을 안 먹겠다는 내게 당과를 사다 준 거.
그 모든 게 추억이긴 하지만 난 좀 더 다른 시간도 보내고 싶었다.
기왕 건강해졌는데 내게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건강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많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이후엔 그렇게 한가할 거 같지가 않아서. 알지, 우리 태양의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리가 있지만 나도 이 일 끝내고 돌아가면 정신없을걸? 그러니까 가면서 맛난 밥도 좀 먹고 멋진 경치도 보고, 어때?”
“……호호호, 호호호호!”
내 말이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은 파파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웃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를 접어가면서, 컥컥대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지어낸 눈물이 아니라 진짜 눈물을 닦아내며 가시지 않은 웃음기를 달랬다.
“어찌 그리 제 어미 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도련님은. 홀홀. 이 쇤네가 살면서, 쇤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시답잖은 얘길 한 사람은 도련님과 도련님 어미뿐입니다요.”
“어머니랑 친했어요?”
이건 또 의외의 얘기네. 어머니가 둘째 형님과 제법 관계가 깊은 하녀였다는 얘기도 신선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 파파를 알고 있었던 데다가 여행을 하잔 얘기를 할 정도로 친했다고?
“친하다 하긴 그렇고, 아무튼, 도련님께서 제게 효도관광을 시켜주시겠다 이 말이로군요. 홀홀.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는 제 등의 봇짐을 벗어 내게 건넸다.
“설마하니, 이 효도여행을 하면서 이 늙은 할미가 짐을 짊어지고 가게 둘 생각은 아니지요?”
“아무렴요, 주세요.”
이 정도쯤이야 가뿐하지 하고 받아들었는데, 웬걸. 천근추를 넣은 것처럼 짐이 무거웠다. 그대로 떨어트릴 뻔한 것을 재빨리 팔에 공력을 돌려 들어올렸다.
“은 파파, 여기 대체 뭘 넣은 거야?!”
“홀홀, 이 할미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요. 아마 이 할미한테 효도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겝니다. 떼잉, 그 가면도 좀 벗고요. 겨우 귀한 얼굴을 되찾았는데 그러고 다닐 겝니까? 할미도 좋은 거 좀 보고 다닙시다.”
무거운 짐을 들고 있던 중이라 나는 영락없이 은 파파에게 가면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 맨얼굴을 내리쬐자 은 파파는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가자꾸나, 진아. 제때 배를 타려면 서둘러 가야 할 게야.”
그리고는 먼저 저만치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 같이 가!”
갑자기 천근과 같은 짐을 둘러맨 채 걸음 빠른 그림자를 쫓아가려니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당신 결정이 크게 잘못됐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요. ……이번엔 어째 좀 아닌 거 같아요.]
그러게.
난 친할머니 같은 존재랑 하하호호 여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째 내 손으로 지옥문을 두드린 기분이 드는 걸까?
“다음 객잔까지 반 각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이 할미는 가버릴 겝니다. 홀홀, 먼저 갑니다.”
그리곤 갑자기 그림자도 안 보일 속도로 지평선을 향해 사라졌다.
“젠장, 질 수 없지!”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와 은 파파,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