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97화 (197/350)

197화

“아미타불…… 시주의 말이 맞네. 그때까진 소림이 속세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문파라 더욱 그랬지. 개인의 수행과 열반에 오르는 것을 더욱 중시했으니. 허나 그 일 이후…….”

방장의 눈빛이 먼 과거를 더듬듯 아련해졌다.

“방장이 되기 이전의 일이네. 당시 방장의 명을 어기고 몰래 섬서에 들어가 본 적이 있지. 그때의 참상을 잊을 수 없었네.”

[그러게요. 나도 기억나요. 내가 무림을 종횡할 당시 소림은 그냥 자기들만 생각하는 땡중들이었거든요. 지금처럼 중생을 위하고 구제하고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세상사에 관여치 않고 나만 열반에 들어 번뇌에서 해방되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군. 이리 세상에 고통이 가득한데 말이야. 해서 내가 장문인이 된 후엔 소림의 기조를 바꾸었다네. 보다 나서서,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고자 했지.”

전생의 소승불교가 대승불교가 되는 과정을 보는 거 같군.

“화산의 진전을 이은 그대가 보기엔 알량한 위선이겠지. 허나 이것이 나와 소림에게는 최선이라네.”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심상 속 화산에서 이십여 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화산인들의 울분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나는 섬서사변을 겪지 않았으니까.

그저 그들의 반응을 소림에게 전해주는 수밖에 없다.

[…….]

홍령은 침묵했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 하는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구만.”

이 침묵이 그 당시 입을 다문 이들이 평생 견뎌내야 할 무게인 것이다.

“떠나면서 태양의원의 총관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낼 겁니다. 제가 적어둔 구상을 바탕으로 총관이 구체적인 계획을 짤 겁니다. 상재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도 뛰어난 사람이니 믿고 함께 일을 도모해주십시오.”

“허면 태양의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신가?”

“그 전에 볼 일이 하나 있어서요. 아, 모용세가와 관련된 일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습니까?”

모용갑의 시신(사실은 진짜가 아니라, 모용갑으로 꾸민 그자의 수하지만)을 모용세가로 보내 일의 전말에 대해 묻기로 했다는 얘긴 들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미 죽은 모용가 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용가 놈이었다.

모용을. 그놈이 어떻게 처리될지는 알고 움직여야지.

“둘째 공자에 대해서라면, 현금이 곧 그를 무림맹으로 이송할 예정이라네.”

“무림맹이요?”

“그대도 알다시피 현 소림은 그만한 유력인사를 구금해두고 관리할 여력이 되지 못하네. 하여 모용가로부터 제대로 된 답신이 오기 전까진 맹의 관리에 맡기려 하네.”

무림맹이라…….

[아쉽네요. 고독을 이용해서 한껏 부려먹어야 하는데! 그놈이 당신에게 했던 짓만 생각하면, 어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자.

의맹 때문에라도 무림맹은 한번 가야 할 곳.

녀석이 그곳에 있는 동안 얻은 정보는 나의 것이 될 테니까.

[뇌옥에 구금될 텐데, 무슨 정보를 얻어요?]

그 교활한 녀석이 뇌옥에 가만히 앉아만 있겠어? 실질적으로 저가 사달을 일으킨 것도 아니니 뇌옥이 아니라 좀 더 좋은 곳에서 관리받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놈이 자유롭게 활개 치고 다니는 것보단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내겐 낫다.

불안하다고 항상 내 옆에 두고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긴, 이제 갈 곳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그럼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러게나, 고마우이. 아미타불.”

방장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불호를 외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을 내려갔다. 화마는 숭산뿐 아니라 일대의 마을 일부에도 미쳤다. 타버린 건물과 황망한 표정의 사람들, 을씨년스러운 거리는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이 동네가 과연 얼마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제 소림의 문제뿐 아니라 나의 문제기도 했다.

* * *

바로 출발하는 대신, 이틀 정도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갸르릉, 갸릉―

금동이는 비스듬히 누운 내 배 위에 올라와선 목울대를 울려가며 발라당 드러누웠다. 저러다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하게 얼굴을 비벼대며 비비적거리다가, 한참을 그러고 나면 나른한 표정으로 내 배나 어깨를 점거하고 잠이 들었다.

이틀간 나는 그 시간을 금동이에게 내어주었다. 나를 위해 몇 번이나 위험을 감수한 이 작은 짐승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는 게 미안하지만.

“어디 보자. 눈가는 다 나아가네.”

영물이라 그런지 상처가 빠르게 나았다. 잘 먹고 잘 쉬고 약도 좋은 것을 발라주었으니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자라는 솜털 아래엔 제법 굵은 흉터가 만져졌다.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 실명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이 정도면 나 없어도 괜찮겠지.

“금동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 가서 신생이랑 같이 있으렴. 그 애가 널 그리워할 거야.”

냐아―

금동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울었다. ‘그럼 넌 어디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우린 보물을 찾으러 갈 거야.]

금동이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홍령이 답했다.

나아?

[그래, 보물! 중원 전역의 무인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는데, 너 때문에 이렇게 미적미적거리고 있는 거니까 아주 감사하게 여기라고.]

답 없이 미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데. 금동이랑 놀고 있긴 하지만 그 사이에 하오문을 통해 정보도 좀 얻고 리에게 보낼 편지도 쓰고, 여러모로 준비도 했는데.

냐―

[그래, 넌 못 가지만 나는 가지롱! 호호홋, 부럽지? 부러우면 너도 귀신 하렴!]

냐아!

“아냐, 아냐. 빨리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귀신 같은 거 될 필요 없어. 착하지?”

[귀신 같은 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왜 애를 약 올리고 그래?

[약 올리다뇨?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고요!]

도대체가. 귀신이 된 세월까지 합하면 오십 년 세월을 살고선 저 쬐그만 거랑 투닥거리고 싶을까.

……아니다.

투닥거린다는 건 많이 친해진 거지. 전에 비하면 둘이 거리도 가깝잖아?

내가 심상의 화산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금동이만 보면 기겁을 하던 예전에 비하면 둘 사이가 확실히 가까워졌다.

그래, 내 곁에 있는 사람, 아니지, 귀신과 고양이들이 친하게 지내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냐아, 냐! 하아악!

[꺄악! 방금 봤어요?! 저게 나한테 방금 이빨을 드러냈다고요! 꺄악, 저리 가!]

……친해진 거 맞지?

둘이 술래잡기하듯 작은 방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다.

미리 싸둔 짐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창천과 당당이 있었다.

이번엔 그들도 함께 가지 않는다.

“다들 짐은 잘 챙겼고?”

“당연함! 집에 가는데 선물을 못 산 게 아쉬울 뿐!”

“그거야 가다가 사면 되지. 무한 들러서 배 타고 갈 거 아냐? 금왕공방에 과자 맛있게 굽는 장인이 있어. 이제 누님도 네 얼굴을 아니까 가서 좀 받아 가.”

당당은 사천당가로 돌아간다.

아예 가는 건 아니고, 볼 일을 마치면 태양의원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집에 가는 건데 얼굴이 밝네요. 전이었으면 죽상을 했을 텐데.]

당랑과 당철 형제를 꺾은 이후 당당은 확실히 매사 당당해졌다. 집에 다녀오겠단 얘기도 먼저 꺼냈고. 가서 산공독에 대한 자료 등을 더 찾아보고 온다나. 다들 금지하는 걸 보니 분명 과거에 손을 댔던 게 분명하단다.

녀석이 기분이 좋은 덕에 모용을에게 고독을 썼다는 얘기도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 썼다는 얘긴 안 했지만 녀석은 “네가 썼으면 어련히 잘 썼을 거라 믿음! 원래 우리 집안에서도 쓰라고 주는 거임!” 하고 내 어깨를 팡팡 쳐줬다.

“창천, 금동이를 부탁해.”

“……알아서 잘 가겠지.”

금동이와 창천은 썩 사이가 나쁘지 않다. 사이가 좋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냥 서로한테 무관심하잖아요. 사이가 나쁜 거보다 그게 더 별로 아니에요?]

으음.

그래도 창천이 책임감은 있잖아.

[예? 방금 진심이에요?]

아니, 그게…….

왜 그렇게 창천에게 믿음이 없어?!

[믿음이 없다기보단, 뭐랄까. 하고 싶은 일이면 철저하게 하겠지만 안 내키는 일은 안 할 거 같고, 남의 부탁 같은 건 귓등으로도 안 듣는 편이고. 관찰과 경험에 의한 추론이랄까요? 아, 조카님 부탁은 좀 예외네요. 그치만 당신은 조카님이 아니고.]

……어차피 가는 길인데 이 똑똑한 애 하나 데리고 가는 게 뭐가 일이라고. 그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이건 리에게 전해줘.”

“알았다. 잘 전하도록 하지.”

[봐요. 조카님 얘기 나오니까 표정이 완전 다르잖아요? 금동이도 조카님이 꼭 돌려 보내달라고 했다고 하면 잘 챙겨갈걸요?]

나나 신생을 제외한 다른 사람보다야 안면이 있는 리와 친숙한 건 사실이지만, 창천이 그 말을 믿겠냐. 바보도 아니고.

“그러는 넌 어딜 가는 거지. 돌아가지 않는 건가.”

“볼 일이 좀 있어서 어디 들렀다 갈 거야.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전해둬.”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창천이 먼저 훌쩍 자리를 떠났고, 금동이가 후닥닥 뒤따라갔으며, 겹치는 길까진 같이 가자며 당당이 그 뒤를 좇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두 아미승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계속 융중다원에 있을 줄 알았던 그들에게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아미로 돌아가신다고요?”

“정확히는 저랑 추명스님만요. 공은 사고와 양원 사저가 남아 환자들을 돌볼 거예요.”

공은이라면 원래 군주의 주치의였던, 나의 제왕절개술에 불같이 일어났던 그 비구승이다. 문책이 두려워서 남기로 한 건가?

“금 의원님이 우리에게 의술을 지도해주면서 내건 조건, 잊지 않고 있어요. 꼭 위에 전달되도록 노력할게요.”

양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아미파의 비구니들과 의술 교류. 양원과 양진 두 스님에게 내 의술을 전수해주면서 그렸던 그림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만 믿으라고요. 잘되면 다음에는 태양의원에서 보게 되겠죠?”

“그랬으면 좋겠군요.”

양진은 까르르 웃다가 이내 합장했고 나도 마주 합장한 후 융중다원을, 소림을 떠났다.

그렇게 혼자서 얼마나 걸었을까.

야트막한 산길 어딘가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위패에 유서를 남긴 거, 아버지가 아니고 은 파파지?”

그리고는 잠시 기다렸다.

반각쯤 지났을까.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노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도련님. 예서 뵙습니다요.”

“다 들었으면서 새삼 모른 체는.”

은 파파는 내가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라면서 보아왔던 다정한 할머니로서의 얼굴. 아마 저것도 진짜 얼굴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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