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96화 (196/350)

196화

[운신은 편해지겠네요. 그래도 수뇌부까지 당신이 이중신분을 쓴다는 걸 모르면 귀찮아질 요소가 많으니까요.]

그렇지.

사실 소림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형님이 내가 두 개의 신분을 쓴다는 걸 알고 있어서도 있다.

그런 사람은 내 편으로 만들어 놔야 뒤에서 이를 가지고 좌지우지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소림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걸 가지고 협박하거나 이용해먹는 일은 없겠지.

“그래, 기왕 그리 된 것 얼굴을 한번 보세나. 먼발치서 헌앙한 얼굴을 보긴 했지만 궁금하구료.”

나는 가면을 벗었다. 방장이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더 이상 가면을 벗는 데 주저함은 없지만, 기겁하거나 당혹하는 게 아니라 저런 호의적인 감탄이 나오는 건 아직 어색하군.

“이 얼굴이 소림의 새 얼굴이 되는 것이구료.”

“그런 셈이죠. 아, 하지만 들으셨다시피 제자가 되는 건 아니에요. 예비죠.”

“알고 있다네. 너무 염려 마시구료. 신분을 둘로 나눈 건 무언가 뜻이 있어서일 텐데 이리 소림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다니, 나로서는 대리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우이.”

“빚을 갚는단 생각도 있지만, 저도 이득을 따져보고 결정한 겁니다.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우리를 자하신공의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겠구료.”

“……상승의 경지에 들었을 때 자색 검기를 띠는 내가기공이 그거 하나는 아닐 텐데요.”

자하신룡이라는 별호가 붙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기의 색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내가 익힌 무공이 진짜 자하신공인 것은 홍령을 제외하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른다.

김진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나와 화산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곤란하다.

“진짜를 보았으니 알아봤다 할 수밖에 없구료.”

“아닐 겁니다.”

언젠가는 밝히게 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소림과 한 편이 되었다 한들 나는 아직 그들에게 확실한 이득을 안겨주지 못했다. 지금은 발뺌해야 한다.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주. 나는 그대의 편이요.”

방장이 자애로운, 그러나 내 눈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한 걸 물을 마음도 없소이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그것으로 끝났다면 나는 계속 방장을 경계했을 것이다.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것은 쉽다. 다 이해한다, 그 표정은 꾸며내기에 너무 간단하다.

“과거 우리는 화산의 진의를 의심했다오. 누군가는 그들이 그럴 리 없다 항변하고, 누군가는 벌어진 일이 있는데 무슨 변명을 하냐며 그들을 몰아붙였지. 우리는 중립을 택했소. 하여 그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제대로 돕지 못했지.”

허나 진심 어린 후회를 의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 소림을 방패로 쓰시게. 그 이름을 떳떳이 밝힐 수 있을 때까지.”

그 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우리 소림의 옛 선사 중 자색 진기를 쓰시는 분이 한 분 있었다네. 정 곤란할 땐 그분의 진전을 이었다 하면 될 것이오. 워낙 옛 분이라 각 문파의 오래된 노인네들이나 그 이름을 알까. 그 이름을 대면 웬만한 상황은 빠져나올 수 있을 터.”

사실 둘째 형님이 그 제안을 했을 때(머리를 빡빡 깎고 출가하자는 얘기 말고), 말은 안 했지만 유사시에 소림을 방패로 삼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예비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중엔 그런 이유도 있다.

[이렇게까지 자기들을 이용하라고 할 줄이야…….]

뭐랄까, 그 소림의 방장답군.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고마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시주도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네. 그래, 환자들은 융중다원으로 갔다던데?”

“제갈 소저와 거래를 했습니다. 융중다원의 건물을 빌려 반야원의 현판을 달 겁니다. 그 비용은 군주 마마가 대주시게 될 거 같지만, 소림도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그건 맞는 말일세. 허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허허, 어린 시주에게 이런 말을 다 하게 되는구료.”

“돈을 버는 것은 소림의 일이 아니었으니, 이해합니다.”

깝깝할 거다.

내가 알아본바, 소림은 구파일방 중에서도 유일하게 돈을 버는 상업 활동을 하지 않는 문파였다.

속가제자를 받거나 후원을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

속가제자를 받을 때 들어오는 돈도 사실상 후원으로 처리되니 그냥 기부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나 마찬가지다.

[그것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했다는 점이 대단하긴 하네요. 자기들만 쓰는 게 아니라 반야원이며 객잔이며 다 공짜로 운영하게 지원도 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태까진 선조들이 쌓아온 재물과 덕으로 생활하였으나 후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네. 속가제자를 받아도 가르칠 여력이 없어 부득이 거절해왔지. 이번 화재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면 소림의 재정은 파탄이라네. 이제라도 속가제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소림에 누가 자식을 보내겠는가. 보낸다 해도 후원의 규모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겠지. 아이들에겐 소홀할 거고 돈은 부족할 테니, 괜한 미움만 만들 것이 뻔하지.”

“그 외에 대책은 생각해두신 바가 없습니까?”

“다들 경황이 없어서인지 좋은 계책을 내는 이가 없다네. 시주가 말했듯 돈을 버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도 많다 보니. 허허, 아미타불.”

“계획이 있다면, 이를 추진할 수는 있으시고요?”

“타당한 것이라면 아니 그럴 이유가 없다네. ……혹 시주에게 괜찮은 생각이라도 있으신가?”

방장의 목소리엔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괜찮은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방장을 뵈러 온 건 아닙니다.”

소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아니다.

말마따나 예비 제자일 뿐인데, 내가 소림을 크게 키워서 뭐에 쓸 건데.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는 회복해주어야 한다. 아주 폭삭 망해버리면 소림을 방패막이로 삼는 것도 의미가 없다. 내게 힘이 될 정도로는 일으켜 세워야지.

“이걸 봐주십시오.”

나는 미리 준비한, 제갈다영하고 얘기를 끝낸 후 적어온 두루마리를 꺼내 방장에게 내밀었다. 방장은 그것을 펼쳐 보고는 한참 동안 꼼꼼히 읽었다. 간간이 방장의 미간이 구겨지고 때로는 끄응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이 방법뿐인가? 반야원의 환자들에게 돈을 받고, 객잔도 돈을 받고, 지금껏 중생들을 위해 베풀던 모든 것에 돈을 받으라?”

“다른 건 안 하셔도 좋지만, 그 부분은 이참에 꼭 고치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비싼 값을 받으라거나 제대로 수익을 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최소한의 비용을 받으셔야 합니다.”

“허나―.”

“몸과 정신이 건강치 못한,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예외로 두셔도 됩니다. 허나 신체 건강하고 사리분별이 가능한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건 그들을 오히려 나락으로 빠트리는 일입니다.”

복지 좋지.

누군가는 그러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거다. 꼭 필요하진 않아도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면 불도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그건 소림의 의도에 부합한다.

허나 반야원의 실태가 정말 소림이 원한 바 그대로던가?

“소림의 의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소림은 힘이 있지요. 그 힘을 기반으로 진짜 도움을 받아야 할 이들을 분류하고 반야원을 관리했다면 원하시는 대로 됐을 겁니다. 하지만 소림은 지금 다른 곳에 전력을 쏟느라 그럴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섬서에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소림이 원하는 그림대로 갈 수 있었을 거다. 돈과 힘, 그리고 의지가 있으니 가능했겠지.

“최소한의 비용을 받으세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최소한의 책임감을 갖게 할 겁니다.”

나는 복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공유지의 비극에 대해서는 안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마땅히 그러해도 괜찮다’라는 신호를 받으면 한없이 추해질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이다.

최소한의 비용은 이를 막기 위한 마지노선인 셈.

“돈을 받는다고 해서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알량한 돈푼이나마 냈다며 더욱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도 생기겠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썩지는 않을 겁니다.”

“……이 부분은 다른 이들과 상의해보도록 하겠네. 허나 시주의 말을 유념하도록 하지.”

방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가슴으로는 아직 못 받아들인 모양이로군.

[자신이나 주변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생각할 시간을 주면 납득할 거예요.]

하긴, 전생에도 보면 헬스 트레이너 같은 사람들이 딱 그러더라. 자기들이 타고나길 운동을 잘해서 트레이너를 한다는 생각은 안 하고, 운동 못 하는 사람들이 왜 못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더라고.

방장을 비롯한 소림승들은 선(善)에 재능이 있다고 보면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모두가 방장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합심해 섬서를 돕고 있는 걸 거다.

“그렇다면 그 다음 부분은 어떻습니까? 그 부분은 빠르게 시행하는 게 소림에 좋을 거 같습니다만.”

“소림의 약재를 태양의원에 판매하는 부분 말인가?”

“숭산에서 상당히 질 좋은 약재들이 많이 나온다더라고요.”

그간은 반야원의 의원들이 이를 시중에 팔아 돈을 착복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소매만큼은 아니지만 도매보다는 값을 쳐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오 년간 공급 계약을 맺고 일 년치 대금을 미리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급한 불은 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태양의원에는 당장의 손해가 크지 않은가?”

“당장 저희도 필요한 거라 괜찮습니다.”

안정적인 약재 공급처는 꼭 필요하다. 무당 때문에 호북 일대의 약재를 수급하기 어려워졌으니까. 무한에서 공급하는 루트를 뚫었지만 이동거리가 너무 길다 보니 가격이 높다. 하지만 소림과 거래를 트게 된다면 이 손해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다.

아니, 손해를 상쇄하는 걸 넘어서 남는 약재를 무한으로 팔아넘길 수도 있을 거다. 우리가 중간거래상 역할을 하는 거지. 산지에서 약재를 사들이는 것이니 약초의 씨앗이나 그 생리에 해박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거고.

일단 한 걸음만 옮겨 놓으면 그 뒷일은 금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걸로는 분명 부족할 겁니다. 소림이 자립할 길을 찾으셔야 합니다. 후원에만 의존하면 후원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니까요. 과거 섬서사변 때, 소림이 함부로 화산을 돕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거 아닙니까?”

“……!”

이번에야말로 방장의 눈이 화들짝 떠졌다.

단순한 짐작이 아니다. 무령에게 들은 얘기니까.

뒤에서 암약한 다른 세력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들은 침묵했다. 상당한 금액을 후원한 이들이 그 일에 휩쓸리지 말고 중립을 지키라 요구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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