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제갈다영은 갑자기 바짝 붙어선, 작게 속삭이며 저가 들고 있던, 돌돌 만 종이 몇 장을 보여주었다.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명부에요. 지금쯤 중원 전역으로 향하고 있어서 제대로 본 사람은 아직 없을걸요? 금 의원님한테만 특별히! 보여줄게요. 빨리 봐요.”
누가 볼세라 들이민 그 종이에는 <천하백대의원>, 그 다음 종이에는 <천하백대명의>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고 밑에는 나도 몇 번 들어본 이름들이 작게 순위를 매겨 적혀 있었다.
있다.
[태양의원, 24위!]
생각보다 높은 순위다. 높아야 30위권 언저리를 생각했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의원인데 확장세도 공격적이고, 또 기반 없이 시작한 점이 흥미로웠거든요. 관자재암에서 엿본 체계도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금가장이 뒤에서 시작한 사업이라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반전~!”
그리고 그 다음 장.
<천하백대명의>.
내 이름, 어디 있지?
[그러게요. 왜 안 보이지?]
“왜 그렇게 밑에서 찾아요? 요기 있잖아요.”
제갈다영이 한 부분을 찍었다. 내 시선이 헤매던 곳보다 훨씬 위쪽이다.
“……6위? 6위라고?”
“결정을 내리는 게 오늘이었으면 4위였을 텐데, 하루 늦었네요. 아쉬워라~!”
6위라니.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수다회가 천하백대명의 중 여섯 번째에 자리에 날 놓은 거다.
[이 정도면 의맹 회의에 가서도 절대 안 꿀리겠어요. 어떻게 꿀려요? 당신이랑 댈 만한 사람이 손에 꼽는데!]
홍령도 흥분해 소리 질렀다.
나도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해나간다고 해도, 주변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도, 이런 식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니까.
“너무 기뻐하네? 재밌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얼떨떨한 표정 보게 1위에 올려줄걸!”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무섭습니다.”
“뭘 그거 갖고 무서워요? 이제 그 순위 보고 몰려드는 환자들이 무섭겠죠, 까르륵. 우리야 그냥 화제성 있고 유망해 보이는, 그리고 흥미를 돋울 만한 의원들을 명단에 올리는 거뿐이에요. 진짜 판단은 그걸 보고 몰려가는 환자들이 하죠. 조금만 지켜보면 순식간에 옥석이 갈린다니까요. 그걸 보는 게 진짜 재밌다고요! 한순간에 유명해졌다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이들을 보는 짜릿함이란!”
제갈다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걸 반영해서 또 새로운 순위를 짜죠. 기대되네요. 태양의원, 그리고 금 의원님이 과연 다음번에도 그 명단에 들어있을지, 더 올라갈지, 아니면 내려갈지. 후훗, 생각만 해도 짜릿찌릿해……!”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땐 내숭을 부린 건가?
“결국 제갈 소저가 수다회의 회주였던 거군요.”
고작 호사가들이 모여 수다 떠는 모임이 중원에서 알아주는 공신력 있는 순위를 낼 수 있었던 건, 그 뒤에 제갈세가라는 뒷배가 있는 덕분에 가능했던 거다.
“뭐야, 알고 있었어요?”
“혹시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본 적은 있죠. 여기 융중다원도 사람들 모여서 수다 떨기 딱 좋잖아요.”
처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접근했을 때도 그렇고. 수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였어야지. 비밀에 싸여 있는 수다회의 회주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다 뿐일까,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군.
[위의 네 명이 그 유명한 사대신의인 거죠?]
그렇지.
첫 번째가 민초신의, 두 번째가 무당신의, 세 번째가 마의. 그리고 마지막이 황금신의군.
[다른 건 대충 알겠는데 황금신의는 뭐예요? 이상한 별호네.]
뭐긴 뭐겠어.
돈이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의원이지. 천금이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던데.
[허풍이 심하네요.]
그렇게 허풍도 아닐걸. 아버지가 초청하는 데 성공한 사대신의 중 한 사람이 그 황금신의니까.
막대한 돈을 받고 내 명줄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늘여놓는 데 성공했지.
내게 죽을 길을 가르쳐줬다는 걸 알고는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고 쫓아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군.
“여기 세 명은 행방불명 아니던가요?”
“잘 아시네요? 뭐, 정확히 말하면 행방불명까진 아니고, 민초신의랑 마의는 거주지가 불분명할 뿐이죠. 민초신의는 고달픈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분이고, 마의는 흥미로운 환자가 있으면 어디든 가니까요. 만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는 있어요. 상대를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의 문제지.”
보아하니 만나러 갔던 모양이군.
[그리고 까였군요. 저런.]
“무당신의는 어디 있는지는 확실하니까요. 면벽동에서 안 나온 지 십 년이 훌쩍 넘어서 그렇지. 최근에 정보통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여전히 거기 살아계시긴 하다더라고요.”
그렇다. 해서 우리 아버지가 네 명 중 한 명을 초대하는 데 그쳐야 했던 거다.
[마의는 당신을 산 채로 해부해보고 싶다고 해서 쫓아냈댔고, 무당신의는 틀어박혀서 안 나왔고, 그럼 민초신의는요? 고달픈 환자를 보러 어디든 간다면서요?]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저 거절당했단 얘기만 했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비사를 전해 들었지.
별호에서 보다시피 민초를 생각하는 의원이니까, 아버지 같은 상인을 지독한 돈벌레로 봤나 보더라고.
전 재산을 내놓으면 아들을 고쳐주겠다 해서 차마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못하셨던 모양이야.
[어휴,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네요. 그 사람도 진짜 전 재산을 받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을걸요. 그냥 거절이지.]
제갈다영은 목록을 보는 내 반응이 흥미로운지 명단을 돌려달라고 하는 대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으, 부담스러워.
[화살표가 있는 것도 있네요? 지난번 순위에 비해 얼마나 오르고 떨어졌나를 표기하는 건가? 아, 여기 태청의원 있어요! 푸하핫, 여덟 단계나 떨어졌어요! 반야원은 어딨지? 여기 있네요, 제일 말석인데? 소림이니까 끼워는 준다는 느낌이네요. 또 어디 보자~]
넌 그거 봐. 난 뒤에 다른 거 좀 볼게.
제갈다영이 건네준 종이는 천하백대의원과 천하백대명의 외에도 다른 항목들이 있었다.
그래, 이걸 좀 보고 싶었거든.
<천하백대후기지수>.
어디 보자, 창천이나 당당이 있으려나?
[있지 않을까요? 어제 명단을 최종 확정했다고 했으니까, 연등회전 결과도 반영됐겠죠. 아, 여기 있다! 여기요! 당당 있어요!]
나쁘지 않은데?
당당은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당가 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왼손잡이 무인이다. 집을 나와서도 크게 두드러지는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하지만 화산지회 예선도 돌파했고 무엇보다 남들이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제 형님들을 쓰러트렸다. 그게 제대로 인상에 박혔던 모양이지?
[아까 천하백대명의 명단에도 당당이 있었어요. 그건 못 봤죠?]
어, 진짜?
[중위권쯤에 있더라고요. 하여간 관심이 없어. 친구인데 신경 좀 쓰라고요.]
신경 쓰고 있잖아. 그러니까 바로 후기지수 명단에서 당당부터 찾아봤지.
“당신의 다른 친구라면 여기에 있어요.”
뭐야, 왜 이렇게 낮아?
제갈다영이 창천의 순위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는데 그 순위가 내 예상보다 한참이나 낮았다.
당당보다 조금 위에 있다니, 이 녀석이 이 정도는 아닌데?
화산지회 양양 예선 우승자에 흥미로운 백 스토리까지 있는 녀석이 이렇게 순위가 낮다고?
“뻔해요. 우리는 새로운 걸 원한다고요.”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제갈다영이 뚱하게 대꾸했다.
“무림사에 이런 후기지수가 한둘 있는 줄 알아요? 연등회전 때도 기대만큼은 아니었어요. 다들 그거 때문에 점수를 많이 깎더라고요.”
“그거야 상대가 상대니까―.”
“그래서 당 소협이 점수를 많이 받았어요. 재밌잖아요?”
얘깃거리가 될 수 있어야 점수가 높다는 건가. 하여간 호사가들의 기준이란. 창천이 이걸 보고 길길이 날뛰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은근 자존심 강하니까요. 당당이랑 한바탕 붙는 거 아니에요?]
……잠깐만.
당당이랑 한바탕 붙는 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
이 이름이 왜 여기 있는데.
왜 이렇게 순위가 높은 건데?
[……자하신룡 김진, 3위? 뭐, 뭐, 뭐예요? 이거 당신이에요?!]
그럼 나겠지. ……그치?
그냥 김진이었으면 모용을이 쓰는 이명이 올라갔나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자하신룡이라는 별호도 붙어 있잖아.
……그러면 나겠지?
“그죠! 그 정도는 되어야 흥미진진한 후기지수인 거라고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름도 얼굴도 쓰는 검마저 처음 봤다니까요? 믿어져요? 나 제갈다영이 전혀 출처를 모르는, 실력이 대단한 후기지수가 나타나다니! 얘기라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제보 들어올 때마다 뛰어갔는데 그 자줏빛 검기만 남기고 사라지지 뭐예요? 그런 검기,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하아, 흥분돼!”
“그, 그렇군요…….”
“자하신룡이라는 별호도 제가 붙였거든요, 너무 잘 어울리죠? 아아, 이런 보물을 찾아서 처음 이름 붙이는 순간이 제일 좋아요. 호사가로서 최고의 영예라고요! 다음번에는 꼭 만나서 그 자줏빛 검기의 출처가 어딘지 물어볼 거예요. 생각만 해도, 하아……!”
[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거 같아요…….]
……응, 나도.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제갈 소저에게는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
그 뒤가 어떻게 될지, 아냐, 알고 싶지 않아. 상상하지 말자.
“후후, 충분히 즐겼으면 이제 돌려줘요. 이걸 소림에 전해주고 빨리 떠나야 하거든요.”
“나도 방장을 뵈러 가야 하니까 내가 전달해드리죠. 어디 급하게 가야 할 곳이라도?”
“뭘 당연한 걸 물어보세요? 당연히 자하신룡이 나타날 만한 곳으로 가야죠! 제가 봐둔 곳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 꼭 나타날 거예요.”
……거기가 어딘데?
난 어딘지도 모르는데, 내가 거길 갈 거라는 저 확신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금 의원님도 관심 있으세요? 후후후, 알려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그쪽으로는 절대 안 가야지.
“거기가 어디냐면 말이죠―.”
제갈다영이 작게 속삭였다.
* * *
제갈다영을 배웅한 후 나는 숭산을 올랐다. 뼈대만 남기고 다 타버린 절간은 을씨년스러웠다. 황망한 표정으로 오고 가는 승려들을 지나쳐 나는 대웅전에 올랐다. 소림 방장이 홀로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왔구료, 금 의원. 아니지, 자하신룡이라 불러야 하는가?”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러지. 그럼 앉으시게.”
나는 앉기 전 가볍게 예를 취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진 상황에 따라 방장에게 건방지게도 말하고 반감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소림의 예비 제자이니 나름 예의를 갖춰야겠지.
예비제자라, 다시 생각해도 이상해.
“내가 그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현금을 탓하지 말아 주게나. 그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소림을 우선해서 말이야.”
“소림에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그 정도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자하신룡에 대해서 아는 이는 나와 현금, 그 외에 장로 한두 명뿐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