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94화 (194/350)

194화

“제가 지면 반야원이 아닌 여러분에게 백금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이 반야원에서 제가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가겠습니다.”

몇몇 이들이 내 조건을 기억했는지 얼굴이 사색이 됐다.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간다는 조건은 사실 굉장히 큰 내기거리다.

정확히 무어라 정하지 않았으니 그냥 반야원을 달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

뭐, 반야원 자체는 소림의 거니까 실제로 그런 내기가 성립하진 않겠지만, 그때 저들이 내 조건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은 건 내가 실패할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성공했죠.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서 내기를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을 뿐이지. 후후, 받아낼 건 절대 잊지 않는다고요!]

무림인이 은원을 잊지 않는다도 아니고, 수전노가 돈은 절대 안 떼먹힌다는 투의 말을 하는 귀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불타는 반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썩어빠진 대들보 하나가 화마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기둥이 쓰러진 탓에 지붕이 기울었다.

“원래는 반야원에서 제가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기로 했었는데, 저렇게 다 타버리고 있는데 뭐가 있을 리는 없고. 곤란하네요.”

저들의 운명이 저렇듯 기울 거다.

“하지만, 여기 반야원의 의원님들이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건물과 장원은 불타 사라져도, 그게 다 뭐예요. 치료하는 사람이 없는 의원이 의원입니까? 하지만 의술의 대가들이 있다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도 의원이 되겠죠. 의원님들 하나하나가 반야원 아니겠어요? 그렇죠?”

나는 상전에게 손을 싹싹 비비듯 싹싹한 얼굴과 목소리로 의원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표정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갑자기 왜 이래? 이런 느낌이랄까?

“자아, 반야원은 불탔지만 여기 반야원 그 자체인 의원님들이 있으니, 의원님들이 가진 걸 받아내면 그럭저럭 내기 조건에 들어맞겠군요. 그렇죠, 의원님들?”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차린 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러나 이미 소림승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거나 어깃장을 놓는 등 눈탱이는 칠 수 없는 상황.

“무, 무엇을 원하시오?”

결국 누군가가 모든 걸 포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의맹 자격은 잘 챙기셨죠?”

“자, 잠깐만, 금 의원. 그건―.”

“주세요.”

모든 걸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포기할 게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천외천이 있다면 지외지(地外地)도 있는 법 아니겠어?

“주세요.”

의맹 자격증 하나를 받는다고 그들의 자격이 박탈당하는 건 아니다. 허나 자격증이 없다면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자격을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자격의 발급은 소림에서 한다. 그들은 소림의니까.

썩은 건물을 태웠으니, 썩은 사람을 도려내야지.

“……여기 있습니다.”

“여, 여기…… 크흡…….”

[어휴, 세상 서러운 척은 다 하네. 지금까지 해 처먹은 거 생각하면 열 번은 내놔야지. 빨리빨리들 내놓으라고!]

홍령이 듣지도 못할 말을 윽박질렀다. 처음 한두 명이나 서러워하며 겨우 자격증을 내놨지, 나머지는 포기한 듯 내 손에 척척 자격증을 얹었다.

나는 그것들을 쥐고 다시 몸을 돌렸다.

마지막 한 장을 받아내야 했다.

[원장실에는 없었죠? 의맹 자격.]

불태우기 전 원장실에 있는 물건들을 싹 검토했다. 행정을 정리한 책 같은 건 챙겨야 하니까.

그곳에 원장의 의맹 자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갖고 다닌단 뜻이겠지.

“주세요.”

아직도 격통이 가시지 않은 듯 바닥에서 몸을 바르르 떨고 있던 원장이, 내가 내민 손을 보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발악하며 뒤로 기어갔다.

“모, 못 준다! 안 돼! 안 된다!”

기어가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하기에 가볍게 발을 걸었더니 그 자리에서 볼썽사납게 자빠졌다. 그 바람에 그의 품에 있던 소지품 따위가 빠져나와 땅바닥에 우르르 흩어졌다.

[비녀? 노리개? 왜 저런 걸 품에 넣고 다닌대요?]

그러게. 상당히 비싸 보이는데?

어쨌든 당장 내가 받아낼 건 원장의 은밀한 취미(?)용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옆에 떨어진 잘 접힌 종이, 의맹 자격증을 집어들었다.

정작 원장은 내 손에 잡힌 자격증이 아니라 그의 소중한 물건들을 후다닥 집어 챙겼다.

“그, 그건 가져가라! 그래! 이제 끝난 거겠지? 그걸로 끝이겠지!?”

원장이 황망한 표정으로 발악했다.

나는 십수 장의 자격증들을 부욱 찢었다. 한 번 찢고, 또 찢고, 또 찢었다. 아주 가루가 될 때까지 찢어 그것들을 불타는 반야원 쪽을 향해 집어던졌다. 바람에 날린 종이 쪼가리들은 그대로 불똥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림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들이 다시 의원이라고 고개를 쳐들 일은 없을 거다.

이제야 좀 개운하군.

“그럼 우리끼리 계산은 끝났네요.”

“그, 그래! 이만 난 가봐야겠다! 비켜라!”

“아, 가기 전에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이거 아세요?”

나는 품 안에서 서책 두어 권을 꺼냈다. 내가 그랬지, 천외천이 있으면 지외지가 있다고.

당신들이 가야 할 바닥은 아직 끝이 아니야.

“원장님 방에서 나온 건데, 장부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스님들이 원장님의 상세한 설명과 해설을 듣고 싶어 하던데.”

그럼 우리끼리 계산은 끝났고, 이제 소림하고 계산을 마쳐야지.

[대충만 봐도 대단하던데요, 그 이중장부. 제대로 털면 엄청나겠어요. 아까 그 패물들도 설마 빼돌린 돈으로 사놓은 걸까요?]

그렇겠지. 돈에 비해서 작고 휴대가 간편하니까, 재산 은닉용으로 딱 좋지. 내 눈에도 비싸 보일 정도면 보통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 아닐 테고.

아까 그것들만 다 팔아도 어디 가서 평생 부족함 없이는 살 거다.

[어휴, 소림승들이 당장 저놈을 쳐죽이지 않는 게 용하네요. 역시 소림이야~]

나는 한 발짝 물러나며 형님에게 장부를 넘겼다. 형님은 장부를 받아들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반야원장에게 다가갔다. 소림승들이 의원들을 둘러쌌고, 이내 그들은 인의 장막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소림의 율법당 같은 곳에 끌려가 호된 대가를 치르든지 하겠지.

거기서 살아 나온다 해도 다시는 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없으리라.

[하! 속이 다 시원하네요! 하하하하하! 꼬시다, 꼬셔!]

나도 홍령처럼 속 시원하게 웃고 싶었지만, 이건 아직 시작일 뿐이다.

반야원을 태웠다.

그 안에선 소림의 예산을 거머리처럼 빨아먹던 시정잡배들도 있었지만, 치료와 간병, 요양이 필요한 환자도 존재했다. 이들에게 제대로 치료를 제공할 곳이 필요했다.

반야원을 태우긴 했지만, 반야원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한 일은 아니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자, 이쪽에 계신 분들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저를 따라오세요!”

미리 한쪽에 분류해둔 이들이 불안한 표정을 하고 나를 따랐다. 그 이외의 사람들이 불안과 초조, 분노, 허탈함을 담아 나와 떠나는 이들을 응시했다. 내게 뭐라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소림승들 때문인지 누구 하나 나서서 큰 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저 사람들은 그냥 둘 거예요?]

그냥 둬야지, 뭐 어쩔 거야.

난 소림과 달리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그들 중에서도 정말 병의원에서 치료와 관리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이쪽에 끼워 넣었다.

남은 자들은 사지 멀쩡하고 활기가 있어서 뭐라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남을 등쳐먹는 편리한 생활에 지나치게 길들여져 있을 뿐이지.

당장은 알량한 박탈감에 분노를 표하거나 엇나갈 수도 있겠지만 곧 내가 세우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트러블이야 소림에서 커버해줄 거고.

나는 그들을 무시하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곧 융중다원 앞에 도착했다.

“이 환자들은 다 무슨 일인가요?”

어딜 가려던 참이었는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제갈다영이 우리를 발견하고 놀라며 물었다.

“오늘 보니까 잘 퇴원한 환자가 제법 되기에 이쪽으로 데려왔습니다. 반야원을 태웠거든요.”

“반야원을요? 저쪽에서 큰불이 보인다 했더니 그거였어요?”

“뭘 그리 놀라요? 다 알고 불 구경 하러 나가시던 거 아닌가?”

“어머, 들켰네!”

제갈다영은 까르르 웃었다.

“내가 환자들을 더 들이지 말라고 하면 어쩌려고 대뜸 불부터 질렀어요? 이만한 숫자를 들일 곳이 마땅찮잖아요? 이 동네 객잔들이야 반야원이랑 거기서 거기고. 응? 왜 그랬어요?”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내가요? 싫은데요!”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닌 거절을 말하며 제갈다영이 웃었다. 지금 나와의 얘기를 무슨 재밌는 게임처럼 느끼는 눈치였다.

“어차피 제갈세가에게 이곳의 융중다원은 계륵이잖아요. 좋은 말로 할 때 자리를 내주시죠.”

“계륵이라니!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곳인데요? 소림이 있으니까 괜찮은 손님들도 많이 오고요. 금 의원님도 그런 좋은 손님 중 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계속 환자들을 들이겠다고요? 누가 아픈 사람들이 널려 있는 데서 차를 마셔요?”

“그 손님들이 이제 안 오잖아요.”

제갈다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여간 귀찮은 아가씨라니까. 그냥 돈으로 척척 처리하면 얼마나 좋아.

[내가 누누이 그랬죠? 제갈세가 사람들이 다 그렇다니까요.]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돈이 아니라 재미로 상대의 물건을 사야 하니.

“소림이 망했는데 여기에 누가 차를 마시러 옵니까? 적어도 근 오 년간은 손님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을걸요? 그렇다고 아주 철수를 하기엔 소림과 제갈세가의 관계가 금이 갈 거고. 제갈세가의 위신을 위해서 융중다원은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해야 할 거고. 지금부터 날이 갈수록 적자겠네요. 와, 돈 먹는 덩어리네 아주.”

“생각보다 많이 안 들걸요? 융중다원은 제갈세가의 특제 차를 이 일대에 판매하는 유통망 역할도 하거든요. 큰 이득은 못 봐도 적자는 안 봐요.”

“보니까 약차를 팔려고 애쓰고 있던데, 그거 우리가 팔아주죠. 아예 처방에 넣어줄게요. 그냥 몸에 좋다고 팔리는 거랑 실제 약으로 처방되어서 환자가 낫는 거랑은 파급력이 달라요. 제가 제갈세가를 돈방석에 앉혀드리죠.”

“……뭐라고요? 풉, 푸흡! 꺄하하핫! 아, 어쩜 좋아. 우리 집안을 돈방석에 앉혀준대, 세상에! 꺄하핫!”

된 건가? 하아, 피곤하네.

“어떡해, 미치겠다. 딴 사람이면 거들떠도 안 봤을 텐데 당신 그거잖아요, 그거! 아드님! 너무 설득력 있어요. 어떡하지?”

제갈다영은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까르르 웃었다.

“좋아요, 편하게 써요! 돈은 안 줘도 돼요. 약차나 열심히 팔아줘요, 돈방석 좀 앉아보게.”

“돈을 안 받는다고요?”

제갈세가에게 계륵인 물건을 싸게 빌릴 생각이었지, 공짜로 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의도가 좋아 보이잖아요. 그거 알아요? 고귀한 분들은 또 그런 거엔 사족을 못 쓰시거든요. 이 얘길 하면 군주마마가 훨씬 더 비싼 값을 쳐줄 텐데, 뭐 하러 금 의원님한테 푼돈을 받아요. 돈 벌었다, 신난다!”

……엄청나네. 이게 제갈세가라는 건가.

“그러면 얘기는 끝난 걸로 알겠습니다. 다들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와 제갈다영의 얘기를 듣고 있던 환자들이 그제야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다영의 말을 들은 하인들이 귀한 손님을 대하듯 환자들을 안으로 옮겨주었다.

“재밌어요, 당신이란 사람. 아아, 아깝다. 하루만 빨랐어도 당신 순위를 좀 더 올렸을 텐데! 반야원 화끈하게 태운 데서 3점 가점하고, 우리 다원 홀랑한 거에서 2점 가점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나? 청운진인보다 순위가 높나?”

“그건 무슨 순윕니까?”

“천하백대명의 말이에요. 그게 당신 목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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