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반야원장은 찝찝한 표정을 하곤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길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법 먼 거리를 후다닥 뛴 다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걸었다.
그가 좀 전까지 있던 곳은 반야원도 자주 찾던 기녀가 있는 기루도 아니었다. 원장은 그곳을 신당이라고 불렀다.
그는 병이 잘 낫지 않는 환자들을 이곳으로 보내 기도하게 했다. 큰 공양을 바치는 제사는 필수였다. 매일매일 소림의 대웅전에 올라 백팔 배를 올려도 병이 낫지 않는 이들이 원장의 꾐에 빠졌다. 그들이 바치는 돈이 많을수록 원장은 슬그머니 처방을 바꿨다.
그렇게 챙긴 재물이 상당했다. 특히 쉽게 들고 나를 수 있는 작고 비싼 패물이 많았다. 만약을 대비한 것이다.
‘신당에 있던 패물은 다 챙겼다. 이제 반야원에 있는 짐만 챙기면 돼. 준비를 해놓고 분위기를 봐서 몸을 빼는 거다.’
관자재암의 일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이 꿀 같은 자리를 집어던지고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씻을 수 없는 참사지만 어쨌든 소림승들이 나서 상황을 마무리 지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거머리처럼 얼마 안 되는 예산을 빨아먹던 아미승들이 면을 제대로 구겼으니 앞으로 자신의 목소리는 더 커질 거였다.
허나 소림이 불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니었다.
바로 진화된 것도 아니고 삼 일을 타올랐다. 그건 그 자체로 소림의 몰락을 뜻했다.
반야원에 배정되던 쥐꼬리만 한 예산은 더 줄어들 거고 거렁뱅이는 더 몰려들고 소림의로서 명성도 빛이 바랜다.
원장은 자신이 가진 소림의의 이름이 아주 헐값이 되기 전에 몸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장강 이남으로 간다. 방장을 꼬여 그곳의 부자와 아는 사이라고, 후원을 받아오겠다고 하고 사라지면 추적이 붙진 않겠지. 내가 도주했다는 걸 알아도 쫓을 여력이 없을 거다. 강호 의원들의 텃세가 심하다고 들었지만 중원 의원을 찾는 수요도 적지 않다니, 잘만 하면 이곳에서보다 더 떵떵거리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원장은 곧바로 신당의 패물을 정리하진 않았다. 그래도 반평생을 바친 곳이며 아직도 반야원 내에선 건재한 권력이다. 언제가 좋을까 때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혹시 아는가? 이름난 부자가 소림의 화마에 큰돈을 쾌척할지도 모르고, 저 산속 어딘가에 굴을 파고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었고 지냈으나 소림의 위기를 좌시하지 못한 절대고수가 나타나 소림의 이름을 다시 천하제일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소림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허나 정작 나타난 것은 자신이 모용갑과 함께 대번 쫓아냈던 그 가면쟁이였다.
거기에 현금법사가 그자를 찾아오기까지!
‘안 그래도 그 모용 공자가 흉수라는 소문이 도는 판이다. 그의 말만 듣고 그자를 전염병의 원인으로 몰았으니 현금 법사도 내게 감정이 좋지 않을 터. 자칫하면 소림에게 버려질 수도 있다.’
반야원장은 최악의 최악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의 상상력으로는 기껏해야 그게 한계였다.
금태양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불?”
불이었다. 한동안 지긋지긋하게 본 불. 반야원이 불타던 소림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
아직도 코에 탄내가 배어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 일어날 때가 있는 반야원장은 기겁을 하면서 불타고 있는 반야원으로 뛰어갔다.
그가 반평생을 바쳐 일군 과업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숭산을 태우던 잔불마저 다 꺼졌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디서 불이 붙었단 말인가?
“원장님!”
“아이고, 원장님. 어딜 갔다 이제 오십니까! 저놈이 반야원을!”
황망한 표정으로 불타는 반야원을 지켜보고 있던 의원들이 원장을 발견하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원장은 그중 한 놈을 붙잡고 상황설명을 요구했다.
“놈입니다! 금가장 그 놈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 말대로, 불타는 반야원 앞에 금태양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가면을 쓰고 돌아보는 그 모습이 반야원장의 눈에는 차사나 악귀처럼 보였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소림승들도 보였다. 그들은 반야원의 불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 소림이 미쳤는가?”
반야원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숭산을 태운 불도 그를 낙담하게 하진 못했는데.
원장은 자신이 도주하더라도 반야원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여겼다. 강호로 가는 일이 여의치 않으면 후원을 구하지 못했다고 둘러대며 다시 돌아오는 수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허나 원장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상상력은 금태양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 * *
원장이 돌아오기 전.
나는 반야원의 정문 앞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환자들은 허겁지겁 문을 빠져나왔다. 반야원을 폐쇄할 테니 일 각 이내에 귀중품만을 챙겨 나가라는 말에 모두들 당황했지만, 그 소림승들이 그 뒤에 시립한 와중에 내 말을 거역할 이는 없었다.
살림을 차리다시피 한 이들은 불퉁한 얼굴로 그 짧은 시간 안에 가진 것을 모두 챙기느라 분주했다.
의원들도 갑작스러운 반야원 폐쇄 명령에 갈팡질팡했지만 원장도 없는 마당에 소림에 말이라도 뻥긋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들 또한 서둘러 짐을 챙겨 들었다. 살림을 차린 이들보다 배는 크고 많은 짐이었다.
가장 늦게 빠져나온 이들은 양원과 양진을 비롯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노인, 아이들을 돕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일 각을 넘겨 밖으로 나왔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기다려주었다.
저들을 괴롭히려고 부러 일 각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정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소림승들이 반야원 전체에 넉넉하게 기름을 부으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태워야만 하겠느냐.”
마지막으로 횃불을 던지려는데, 형님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듯 횃불을 잡고 있는 내 손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이 자체로도 반야원은 소림이 베푸는 자비의 상징이다.”
[하아, 이 땡중이. 다 이유가 있다고 설명을 해도 또!]
홍령이 버럭 화를 냈지만, 나는 차분하게 내 손에 얹힌 형님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미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야원은 지나치게 부패했습니다.”
나는 내 주변을 한 번 쓱 돌아보았다. 이미 할 만큼 한 얘기를 여기서 또 꺼내는 이유는 뻔하다. 눈앞의 이들에게 들려주라는 거다.
“사람이 문제라면 사람을 바꾸면 되고, 체계가 문제라면 체계를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반야원은 아닙니다. 이 의원은 건물 그 자체가 썩었습니다.”
반야원에 온 지 삼 일밖에 안 된 양원과 양진도 온갖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의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불결할 수 있냐고 말이다.
“벽과 바닥을 빽빽이 메운 곰팡이. 오래된 침구를 털기만 해도 우수수 떨어져 나오는 이와 진드기, 정체 모를 것들의 알. 서까래와 대들보가 썩어서 나는 악취. 썩은 나무를 파먹고 사는 흰개미들이 밤이면 환자들의 상처를 물었고 덧난 상처는 뒷간을 제때 치우지 않아 퍼지는 변독에 수시로 덧났으며 약과 밥을 짓는 우물 또한 이 때문에 오염됐습니다. 이런 창고에 보관되는 약재와 식자재는 말할 것도 없죠. 전염병이 퍼지는 게 당연한 환경입니다. 아니, 전염병 이전에, 건강한 사람도 여기서 한 달만 있으면 시체가 되어서 나갈 겁니다.”
이곳에서 열흘 넘게 온갖 잡일을 해치웠던 만큼, 건물로서 반야원의 부패에 대해 나는 스물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부패는 사람의 부패로부터 왔다.
그 부패에 기생한 이들로부터 왔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으로 바닥만 긁는 의원들은 물론이요, 진정 아픈 이들을 쫓아내며 의원들과 야합한 터줏대감들, 그럼에도 아직 마음속에 선량함을 간직하고 있어서 타인을 의심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던 보통 사람들까지.
모두가, 내가 횃불을 들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이런 썩어빠진 건 아예 태워버려야 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야, 그 자리에 제대로 된 걸 다시 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정히 그래야만 한다면, 알았다. 더는 방해 않으마.”
“그럼 갑니다.”
반야원 안쪽까지 꼼꼼히 기름을 부으러 갔던 승려들마저 다 빠져나온 후, 나는 횃불을 던졌다.
정확히 반야원의 정중앙 지붕에 떨어진 횃불이 반야원 전체를 집어삼키는 화마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요. 잘 탄다! 어디 구워먹을 거 없나? 당신 전생에 먹던 군고구마라는 게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뭐 비슷한 맛 나는 거 없어요?]
잘 모르겠는걸. 여긴 고구마는 물론 감자도 옥수수도 없으니까.
아쉽지만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라도 마셔볼까?
“원장님!”
“아이고, 원장님. 어딜 갔다 이제 오십니까! 저놈이 반야원을!”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더니. 이제야 왔네요?]
“놈입니다! 금가장 저놈이 불을 질렀습니다!”
“소, 소림이 미쳤는가?”
원장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일이 믿기지 않는지,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귀신같이 눈치채고 도망쳤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네요. 일을 덜었어요.]
그러게. 안 오면 찾아가려고 했더니.
나는 저벅저벅 원장의 앞으로 걸어갔다. 원장은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황당함과 불신, 그리고 분노. 그는 자신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뻔했다.
어째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은 이처럼 뻔한가.
“이, 이, 이 미친 새끼가!!!!!”
그리고 또 어쩜 이렇게 뻔뻔한가.
원장이 자리에서 펄떡 일어나 내게 주먹을 날렸지만, 이제 나는 그자의 공격 정도는 날아다니는 파리보다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익, 이익!!!!”
내 손에 손목을 붙들린 원장이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악을 썼다.
나는 그 뻔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표정에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기억하십니까, 원장님? 우리, 내기를 하나 했었는데요.”
나는 나직하게, 그러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루한 악에 그 이상의 반응을 할 필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제가 처음 반야원에 왔을 때, 다들 내기를 하셨잖아요.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버티는지. 뒷간에 가득 쌓인 똥을 치우고, 우물을 새로 파고, 지붕을 이고, 수많은 빈자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주는 잡일을 시키면서 그 일을 얼마나 버티는지 내기를 했죠. 뭐에 뭘 거셨더라.”
나는 손목을 붙들린 채 힘을 못 쓰는 원장의 어깨너머로 두려움 가득한 반야원 의원들과 하나 하나 눈을 맞췄다.
“거기 계시는 분은 하루.”
“그 옆에 계신 분은 삼일.”
“뒤에 계신 분은 이레였죠? 그래도 제일 길게 봐주셨네요. 감사해라.”
물론 진짜 감사하다는 뜻은 아니다.
“각기 거신 것들도 그렇고, 맞아, 우리 원장님도 거셨죠. 남초였나? 근데 그건 방금 반야원이랑 같이 다 타버렸을 겁니다. 보니까 다 썩어빠져서 금연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중독자도 안 피게 생겼더라고요.”
“이익, 이놈이, 아악!!!!”
남들 눈에는 손목을 붙잡고 있는 걸로 보이겠지만, 지금 나는 원장의 손목으로 기를 흘려보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중이었다. 거인이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은 덤이었다.
“아, 그리고 제가 열흘에 걸었죠. 제가 지면 백금을 드린다고 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이겼으니 백금은 물 건너 가셨네요.”
나는 그대로 원장을 놔주었다. 놔주었다기보다는 패대기쳤다는 말이 맞았다. 몸에 흘려보낸 내기를 견디지 못한 원장이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격통에 몸을 떨었으니.
“근데, 제가 이겼을 때의 조건도 기억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