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 때, 땡중, 아니 당신 둘째 형님, 지금 뭐라는 거예요?!]
나와 홍령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둘째 형님은 낯빛이 환해져선 내 두 손을 덥썩 잡았다.
“내가 너의 스승이 되마. 원래는 너의 무위가 뛰어나니 달리 스승을 정하지 않고 이대제자 모두가 너를 제 제자로 생각하며 정성을 다할 예정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네 네 세속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서였지. 허나 네가 부처님의 품에 안긴다면! 아아, 사제지간은 부자지간과 다를 바가 없다지, 아미타불!”
글렀어, 이미 눈이 만(卍)자 모양이야.
“형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만. 출가하겠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형제인데, 사제지간이 되는 게 그렇게까지 감격할 일이던가? 물론 소림의 현 상황상 개인적으로 제자를 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 그럴 법도 하지만…….
“오해라니, 출가하지 않는다고?”
내 말에 형님은 갑자기 물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오해가 발생한 것 같은지 차근차근 설명하자 형님은 어색한 얼굴로, 무슨 귀한 보물을 쥔 듯 쥐고 있던 내 손을 어색하게 놓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
[아니, 멋대로 오해해놓고 왜 버림받은 비련의 연인 같은 표정을 짓는 건데요?! 그러니까 이쪽이 엄청 잘못한 거 같잖아요!]
내 말이.
여태 무뚝뚝한 걸 넘어서서 길가의 돌 보듯 대하더니, 갑자기 왜 이러냐고!
“죄송합니다. 소림의 동량이 될 삼대제자를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아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듣자 하니 너는 어깨에 짊어진 것도 많지 않더냐. 태양의원이라 했지?”
“예. 제 이름을 건 의원입니다.”
“그래. 사내로서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하물며 그 뜻에 동참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들에게는 네가 부처나 다름없는 존재다. 귀히 대해주거라.”
“물론입니다.”
갑자기 출가당할 뻔한 일은 거기서 적당히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형님도 마음을 추스르신 거 같으니 그러면 반야원의 얘기를 꺼내볼까.
“헌데 형님, 어떻습니까? 아까 말한 대로, 제게 반야원을 한번 맡겨보시죠. 태양의원만큼 잘 키워 보이겠습니다. 소림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으면서도 든든한 곳간이 되어줄 겁니다.”
홍령에게 했던 얘기를 둘째 형님에게도 그대로 했다. 저 둘째 형님이 대뜸 와서 소림의 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냔 얘기를 했으니 아마 윗선하고도 다 끝난 얘기겠지. 그렇다면 반야원에 대한 얘기도 형님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거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허나 태양아.”
잠깐만. 이렇게 얘기할 때는 꼭 거절의 말이 돌아오는데?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반야원은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곳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다 한들 고통받는 중생만큼 어렵겠더냐? 이 또한 우리의 고행이요 수행이라 여기면 그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숙식과 의료를 제공하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느냐.”
“형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 숙식과 의료도 훨씬 낫게 할 수 있다니까요?”
“그래도 안 된다. 반야원을 외부인이 관리한 적도 없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형님은 단호했다. 천년을 내려온 소림의 역사. 망할 때 망할지언정 그 역사를 거스르지는 못하겠다는 건가?
“허나, 네가 출가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아니, 포기한 거 아니었어요?!]
형님의 눈이 다시 그 민 머리만큼이나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이미 방장과 장로분들도 그리 설득했다. 어린 동자승부터가 아니라 다 큰 성인을 제자로 받는 것 또한 전례에 없었다. 오래도록 이어져 온 관습이라는 것은 하나가 깨지면 그 다음은 더욱 쉽게 깨지는 법. 허니 네가 소림의 제자가 된다면, 반야원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후에 뱉어버린들 그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안 그러느냐?”
어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네.
형님의 주장에 혹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확실히 설득력이 있어서다.
지금 형님도 나보고 제자가 되라며 눈에 불을 밝히고 있는데, 다른 이대제자들은 어떨까. 비록 공유하는 제자라지만 제자, 제자가 생기는 거다!
[거기에 이미 실력이 완성형인 제자인 거죠. 소림의 무공은 아니지만. 흥. 땡중들이 좋은 건 알아가지고!]
홍령은 콧방귀를 뀌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 그래도 안 됩니다. 그러면 반야원을 뜯어고쳐 봤자 뭐해요? 저한테 돌아오는 이득이 없는데.”
원래 내 반야원 개선안에는 태양의원도 적잖은 이득을 보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지만 품 들이는 만큼 손해는 안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림의 제자가 되면 말짱 황이다. 출가자가 세속의 의원을 가질 수는 없으니, 그렇게 된다면 제자인 신생이나 조카 금리, 이도 저도 안 되면 장 의원한테 넘겨야겠지.
[신생은 너무 어리고, 조카님은 의술은 모르고. 넘긴다면 장 의원이 되겠네요. 어휴, 그 돌팔이한테 의원을 넘겨주다니. 돌팔이는 로또 긁은 거네요.]
내가 소림의 제자가 될 때의 얘기지. 하지만 머리 깎고 중이 될 맘은 없으니 아마 장 의원이 죽을 때까지 그럴 일은 없을걸?
“어째서 이득이 없느냐? 반야원이 전부 너의 것이 되는 거다. 그뿐이더냐? 출가한다면 너는 소림의 하나뿐인 삼대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겠느냐?”
“모르겠는데요?”
“하아, 생각해 보거라. 나이가 차면 너는 자동으로 소림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그렇네. 자동으로 방장 스님이 되긴 하겠군.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소림이 되는 거죠. 소림의 힘과 명성을 상징하는 존재랄까. 지금 상황에서야 빛 좋은 개살구 같지만 이삼십 년쯤 후, 그러니까 당신이 장문인이 된 후에는 얘기가 다를걸요?]
너까지 왜 내가 출가하는 걸 전제하고 얘기하는 건데?!
“거기에 소림의 절세 무공과 모든 환약, 질 좋은 약재까지 전부 너의 것이 된다. 솔깃하지 않느냐? 태양의원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들을 반야원에 편입시키거라. 그러면 너의 것을 손해 보지 않고도 소림의 제자가 될 수 있지 않느냐?”
블랙유머도 이런 블랙유머가 없다. 소림승이 제자 하나 받겠다고 적극적으로 소림의 사유화를 권하다니.
애초에 영업 방식이 이상하다고. 소림이잖아. 사람을 출가시키는 데 세속적인 단위로 꼬시는 게 말이 돼?
“그래도 안 됩니다. 제가 소림의 제자가 되어야만 반야원의 일에 관여할 수 있다면, 그냥 미련을 버리겠습니다. 반야원의 일은 소림에서 알아서 하십시오.”
“태양아. 좀 더 고민해보면 안 되겠느냐? 너에게 나쁜 조건이 아닐 텐데. 머리를 미는 것이 싫더냐? 혹은 정인이 있는 것이냐? 그 또한 네가 새로운 예외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형님, 과합니다. 거기까지 가면 소림이 소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떠냐. 네 새 얼굴로 새 신분을 만들었으니, 그 얼굴로만 소림의 제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금태양의 삶은 따로 살려무나. 그러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느냐?”
형님의 말은 이제 처량하기까지 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제자로 들이려는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구나 싶었다.
그런 간절함에는 진심을 보이는 수밖엔.
“형님, 제게도 스승과 사문이 있습니다.”
“……!”
“사정상 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형님이 어린 시절부터 소림에 와 소림의 정신을 체화하신 것처럼 제게도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당신…….]
“제가 그저 자연인이었다면 형님의 제안을 고려해봤을 겁니다. 허나 형님도 그렇겠지요. 어느 위세 좋은 문파가 좋은 조건을 들이민다 하더라도 형님은 소림의 제자로 남으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비록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다 해도, 내가 그들과 보낸 나날들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그저 이름만 소림의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제 사문을 존중하듯, 소림 또한 존중되기를 원합니다. 진짜 소림의 제자에게 말입니다.”
서로 나눈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짜가 아니겠는가.
내가 말을 마치자 형님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아니, 앉아라.”
나는 확실히 거절했고 더 이상 여지가 없는데,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여 나는 일어나다 말고 자리에 앉았다. 형님은 다시금 소림의 무승 현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의 뜻은 알겠다. 허나 네게는 빚이 있지 않더냐.”
“빚이요?”
“방장께서 지니신 삼생화라는 영초를 네게 쓰셨다 들었다.”
[이잇, 치사하게! 그때 당신이 아니었으면 소림의 명예는 더 바닥에 처박혔을 텐데, 승려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오기야?!]
홍령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사실 소림 측에서 큰 보물을 사용한 건 맞았다. 그야말로 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거니까. 혼생화가 내 영육의 끈을 이어주었지만, 소림 방장이 삼생화를 쓰지 않았더라면 내 혼이 돌아갈 육신이 남아 있지 않았을 거다.
“좋습니다. 어찌 갚으면 되겠습니까? 제자가 되는 것만 빼고는 들어드리겠습니다.”
소림의 명예를 지켰다고 하지만 내가 완벽하게 그들의 만행을 막아낸 것도 아니니, 계산할 건 계산해야지.
“소림의 제자가 되거라.”
얼마 정도 내어주어야 할까, 금리에게 달달 볶이겠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둘째 형님이 고장 난 앵무새 시계처럼 또 똑같은 말을 뱉었다.
“단, 그게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올 거다.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속세의 미망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을 부지해야 할 때.”
아.
그런 얘기구나.
“그때 소림으로 오거라. 그때가 언제든 상관없다. 십 년, 이십 년 후 그 언제든 상관없다. 아예 머리를 밀고 출가하는 게 아니라 사미가 되거나 우바새가 되어도 좋다. 아니, 그냥 오거라. 소림이 너를 품으리라, 너를 지켜 주리라. 내가 소림에 없을지라도 그 약속은 유효할 것이다.”
삼생화를 받은 대가를 치르라 하시더니, 오히려 더한 걸 주겠다 한다. 제자가 되라 하더니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고 한다.
이것이 형제의 우애라는 걸까.
“반야원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내 너를 소림의 예비 제자로 소개할 테니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해라. 혹 다른 방식으로 그 빚을 갚고자 한다면 그 또한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마. 허니, 너는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거라.”
“형님…….”
괜히 목이 멨다. 피가 이어졌을 뿐, 서로를 형제라 여길 시간이 없었던 나와 둘째 형님이 이제야 진짜 형제가 된 것만 같았다. 형님도 목이 메는지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내가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반야원을 제 뜻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죠?”
“그래. 무엇을 원하느냐? 다만, 너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구나.”
“걱정 마세요. 불합리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니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세워둔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팽팽 속도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이 반야원부터 좀 불태워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