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저 사람들, 어차피 진짜 아픈 사람은 몇 없잖아요? 반야원이 숙식도 공짜고 아픈 곳도 봐주니까 빈대처럼 눌러붙어 있는 거뿐이지.]
확실히 이곳 반야원의 실태는 개선이 필요했다. 의원이 아니라 구빈원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모여들어 터를 잡은 이들이 자리를 차지해서 진짜 아픈 환자가 발 뻗고 누울 자리가 없지 않던가?
“하여간 염치들도 없지. 이번에 관자재암의 피해자들이 오는데도 말입니다, 저자들이 한사코 자리를 안 내주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좀 덜 아픈 사람들이 놀란 산모와 아기들에게 자리를 내주겠다고 반야원을 나갔어요. 피 섞인 가래를 뱉는 할아범부터 다리를 절던 어린애도 있었는데.”
“어제는 말이야, 제 먹을 것도 없어서 반야원이 주는 밥을 먹던 이들이 아기 먹일 피죽이라도 끓이라고 좁쌀 한 줌을 가져왔다네. 하여간 착한 사람들만 손해 보는 세상이야.”
내 곁에 모여든 환자들이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침을 놓았다. 모두 맞는 말이고, 나도 이곳의 상황이 답답했지만 내가 나서서 뭘 하기는 좀 그랬다.
[아이참, 뭐가 좀 그렇긴 그래요? 답답하게! 그냥 확 때려 부수고 반야원 의원들도 늘어놓고 검면으로 볼기짝을 팍팍 때려버리자고요! 자고로 칼 앞에 장사 없다니까요? 저자들은 글렀어요. 당신이 아무리 성의껏 환자를 돌본다 해도, 그거에 감격해서 사람이 바뀌진 않을 거라고요.]
가끔 과격해지긴 하지만 나름 정도를 추구하던 홍령이 웬일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반야원 의원들과 이에 기생하는 환자들의 작태가 혀를 찰 정도이긴 하지만, 저번에도 안 그러더니 갑자기 왜 그래?
[열 받잖아요! 모용갑 녀석도 그렇고, 반야원도 그렇고! 저들은 마음껏 치사하게 구는데 우리만 정도를 지켜가며 대응해야 하는 게, 그러면서 매번 손해 보고 다치고, 으악! 이젠 싫어요!]
나는 홍령이 분을 토해내고 씩씩대다 한 풀 꺾일 때까지 환자들을 보며 기다렸다.
아마도 저게 진심이 아닐 테니까.
내가 아는 홍령은 그렇게 쉽게 자신의 길을 버릴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화를 내던 홍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예상대로였다.
[……그냥 다 싫어요. 당신이 다치는 것도, 손해 보고 속상해하는 것도. 비겁한 사람들 앞에서 정도를 지키느라 모욕을 감수하는 것도요. 그냥 다 엎어버렸으면 좋겠어요. 평판이 걱정되면 가면 벗고 깽판을 치는 건 어때요? 그럼 되잖아요. 누구도 검을 휘두른 사람이 당신인 줄 모를 거예요.]
나는 오늘 마지막 환자의 몸에서 침을 제거하며 고개를 들었다.
패도(覇道)라.
힘으로 거침없이 찍어 누르는 건 유혹적이고, 동시에 중독이 강하지.
나도 안다. 전생에 대기업의 어깨에 올라 그 기분을 잠시 맛봤으니까.
홍령도 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쉽고, 빠르고, 통쾌한 길.
그건 결국 영원하지 못하다는 걸.
[……됐어요. 그냥 잊어버려요. 답답이. 바보. 호구. 당신은 속이 문드러져도 바른 길을 가겠죠. 그죠? 그러니까 속상한 건 내가 할게요.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요.]
홍령이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홍령은 나를 너무 고평가 한다니까.
내가 반야원의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은, 그저 그것이 끝내 모든 것을 망치는 패도의 길이라서가 아니다.
반야원을 뜯어고치려면 시간이 많이 들겠지.
검을 들고 그들을 협박한다 해도 새는 바가지는 어떻게든 새기 마련이라, 검을 피해서 저들의 원래 본성을 이어갈 구멍을 찾으려고 애를 쓸 거다.
그럼 나는 그걸 또 막으려고 헛된 힘을 써야 할 거고.
그렇게 힘을 써서 반야원을 정상화하면?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면?
기분은 좋겠지. 그게 다다.
여긴 태양의원도 아니고, 이곳을 고친다고 내게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다. 당장 태양의원이 가맹을 받아야 하는 의원들도 리스트가 넘칠 지경인데.
그곳들을 관리하는 게 환자들에게도 더 낫다.
이곳을 그냥 두고 가는 게 찝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건 소림이 할 일이지.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아니지, 잠깐만요. 그러면 화풀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축 처져 있던 홍령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가면 벗고, 나는 불의를 눈 뜨고 못 보는 정파협객 김진이다! 하고,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피를 보는 건 좀 그러니까, 그래요! 검면으로 양 볼 싸다구를 찹찹찹! 이 한 대는 네놈들이 횡령한 약재 값이고! 이 한 대는 네놈들 때문에 더 아파야 했던 환자들 몫이고! 마지막은 내가 빡친 값이다! 하고 딱 그렇게 세 대만 때리자고요. 한 놈 당 세 대씩,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각이면 되지 않아요? 그리고는 내가 언제나 네놈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시 돌아와 네놈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러고 딱 사라지는 거죠! 그러면 놈들이 무서워서라도 조심하면서 살지 않을까요? 효과가 잠깐이면 어때요? 벌레 약 치듯이 주기적으로 챱챱챱 하면 되지!]
홍령이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보면서 슬그머니 물었다.
[……이것도 안 돼요?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주기적으로 하기 좀 그러면, 어떻게 한 번만요. 나 한 번만 속 시원하게 해줘요. 응?]
한 번 겁주는 거로 되겠어? 아무리 그래도 소림의야. 웬만한 무력행사에는 눈도 깜빡 안 할 거라고. 소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을 거고.
다른 거보다 반야원이 소림의라는 게 크다. 그 뒤에는 소림이 있다. 내가 어떻게 할 명분도 없고, 반야원이 잘 되든 망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거다.
[하아. 세상 일 하나 귀신 맘대로 되는 게 없네요.]
하지만 상관있는 일이 되면 얘기가 좀 다르지.
“금 의원님? 소림이 왔어요. 좀 보자던데요?”
양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곤 소림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이제야 움직이다니, 하여간 소림도 엉덩이가 무겁구만.
[뭐예요, 당신? 소림이 올 걸 알고 있었어요?]
완전히 확신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
“뒤에 반야원 의원들 숙소 있죠. 거기로 오래요. 뭐 얼마나 비밀 얘기를 하려고 사람을 구석진 데로 부른담.”
양진이 투덜거렸지만 나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렴, 대 소림이 알거지가 된 채로 도움을 청하는 걸 남들에게 보여서 좋을 건 없겠지.
[도움을 청해요? 당신한테요?]
아마 그러려고 온 걸걸?
요 며칠 간의 일을 생각해봐.
우선 관자재암의 사건.
관자재암은 아미파의 승려들이 운영하고 있지만 엄연히 소림의 관할 하에 있는 암자다.
약탈이나 방화 같은 손해는 없었지만 피해자가 적지 않았고, 소림이 이들의 이름으로 공양을 하고 명복을 빌어주었단다.
전생에서도 평범한 사람의 사십구재를 올리는 데도 몇백만 원이 들었는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천도재를 지내려면 그 돈이 얼마나 들겠어?
거기에 본산에 불이 났다.
사실 천도재야 평소 소림의 위세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허나 소림 본산에 불이 난 것은 얘기가 달랐다.
화재로 불탄 전각들을 보수하는 비용이며 싹 타버린 재물들. 거기에 완벽하게 잿더미가 된 소림의 위상까지.
전각을 보수하려면 돈을 융통해야 하는데, 직접 돈을 버는 산업에 종사하는 게 아닌 이상 후원을 받거나 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누가 이 소림에 돈을 퍼주겠는가? 자기네 대웅전에 불붙은 것도 못 끄는 무림문파를, 누가?
여기에 연등회를 진행하던 중이었으니 그 비용도 만만찮을 텐데, 이런 행사는 마지막 날 보시가 제일 활발하기 마련이다.
그 행사마저 중간에 끊겼으니 소림은 잿더미가 아니라 빚더미 위에 앉아버린 상황이랄까.
이 난관을 타개하려면 구사일생의 한 수를 둬야지.
[내가 돈은 잘 몰라서 그런데요, 우리 돈 많아요? 아니, 처음 개업할 때에 비하면 많은 거 아는데요, 그 정도로 많이 벌어요? 소림을 먹여 살릴 만큼?!]
설마.
우리가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소림은 지금 밑 빠진 독이다.
금가장 정도 되면 모를까, 여기에 돈 주다간 태양의원 대들보까지 팔아먹어야 할걸.
[그러면요? 왜 소림이 당신을 찾는 건데요?]
이게 있잖아.
나는 소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반야원의 원장실을 가리켰다.
그렇다.
소림에겐 아직 반야원이 남아 있다.
곧바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그러나 애로사항이 많은 의원.
소림이 내게 반야원을 맡긴다면 해볼 만하다.
[아! 그렇군요! 지금까지 공짜를 유지하던 소림이 직접 돈을 받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한테 위탁하면! 그러면 우리가 원장 되는 거예요? 저 재수 없는 의원들 다 쫓아버릴 수 있는 거죠?!]
거기에 수익률이 괜찮으면 태양의원에 보탬도 될 거고, 무엇보다, 의맹의 정회원이 될 수 있는 표를 하나 더 확보할 수 있다.
소림의 표가 곧 내 표가 될 테니까.
[맞아, 그거! 요새 하도 일이 많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렇게 반야원과 소림을 손에 넣으면, 한 개 문파만 더 포섭하면 된다.
언제 무당이 뒤통수를 치려 할지 모르니 빨리 세력을 키워서 정회원 자격을 따내야지.
“오셨어요, 형님?”
방 안에는 둘째 형님이 앉아 있었다.
형님 혼자만 오다니 좀 의왼데. 온다면 소림 방장이나, 아니면 소림승 중에서도 재정에 감이 좀 있는 사람이 함께 올 줄 알았더니.
“앉거라.”
“예. 무슨 일이세요?”
나는 다 알면서 괜히 물었다. 모용갑이 폭사하고 소림으로 돌아올 때, 은 파파와 얘기하면서 은근슬쩍 현 소림의 상황이나 이를 타개할 방법은 반야원을 손대는 것뿐이라는 말을 은근슬쩍 흘렸으니, 내가 예상하는 거 외의 용건은 아닐 거다. 둘째 형님도 우리 남매 중 한 사람이니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내가 오늘 너를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형님은 서두만 꺼내놓고 한참을 주저했다. 평생을 무공과 불공에 헌신한 승려가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불편하시면 제가 말할까요? 제가 필요하시죠?”
“그래. 작금의 소림에는 네가 필요하구나.”
둘째 형님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개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허나 나로서는 소림을 생각할 수밖에 없구나.”
“형님께서야 당연히 그러시겠죠. 저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요.”
“……정말이더냐? 진실로 생각이 있었다고?”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요? 단지 소림의 허락이 필요했을 뿐이죠. 제 마음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구나. 네 마음이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방장께 얘기를 꺼냈다. 전과 달리 너도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는 몸이니까. 우리의 상황도 있고 너 또한 그러니 여러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고 장로님들과 입씨름을 하다 온 길인데, 네 마음이 그렇다면야!”
둘째 형님이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진짜 소림의 상황이 심각한가 보네. 무뚝뚝한 형님이 이렇게까지 화색을 띨 줄은 몰랐는데.
“지금 바로 소림으로 가자. 가서 머리를 밀고 출가하는 거다!”
……잠깐만요.
뭘 해?
출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