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안 될 이유 없잖아?
나는 거울 너머, 아직도 낯선 내 얼굴을 보며 수염을 깨끗하게 다듬었다.
처음부터 달라진 내 모습을 다른 신분으로 이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환골탈태로 인해 얼굴이 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 얼굴을 사람들이 나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고.
은 파파와 둘째 형님의 말에 내가 전과는 전혀 다른, 내 원래 얼굴을 알던 사람들이 나라는 걸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뭐 하러 귀찮게 두 신분을 갖고 산단 말인가? 내가 범죄자도 아니고. 발상을 떠올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쪽이 맞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내 생각은 그랬지만 은 파파의 의견은 달랐다.
“모용세가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지만, 그들의 세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됩니다. 중원의 변방에 있지만 다른 이름난 명문가를 제치고 오대세가에 한 자리를 차지한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다시금 내륙 진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가문의 후계자가 죽었다면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후계자를 죽이고 그들의 대계를 초장부터 엎어버린 자를 찾아 복수하려 하겠지요.”
은 파파가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모용갑과 백의인, 즉 백귀단이 관자재암에서 벌인 일들을 터트리면 되지 않겠냐 했지만 은 파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용세가는 부당한 누명이라고 할 겁니다. 증거도 없지요. 여기 널린 살점들만으로는 그가 모용가의 적장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을 겝니다. 설사 그렇다 쳐도 꼬리를 자르겠지요. 모용가 둘째의 증언도 그렇고요. 제 자식이 아니라고 하거나, 제 자식의 일이라 하더라도 집안의 문제가 아닐 거라 할 겁니다. 모용가주는 실로 비정하고 잔혹합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제 자식 하나쯤 버리는 일은 일도 아닐 겁니다.”
게다가 이 일은 소림의 일이지 다른 구파일방의 일이 아니다. 소림의 힘이 약해진 만큼 무림맹 내에서 입지가 좁아졌기에, 이 일을 크게 벌일수록 다른 문파들이 소림을 업신여길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소림이 직접 모용세가에 사과를 요구할 만한 힘이 없다면, 차라리 조용히 사건을 묻어버리는 편이 나을 거다. 은 파파는 그렇게 설명했다.
“도련님 얼굴을 본 쥐새끼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남김없이 잡아 족쳤다 하나, 쇤네도 늙어서 하나쯤 놓쳤을 수도, 애초에 사람들 사이에 껴서 아닌 척하는 놈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놈들이 모용가주에게 돌아가 후계자를 죽인 자를 도련님으로 고한다면, 그 분노를 받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 현판을 달았을 때에 비하면야 엄청나게 규모가 커졌지만, 여전히 무림명문 오대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물며 후계자로 키워지던 자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용세가는 나를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그러면 덜 찝찝했을 텐데) 저 혼자 난리를 치다가 폭사한 것이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는 그 상황까지 몰고 간 내가 범인이겠지.
“감추세요. 도련님 자신을 감추고, 실력을 감추고, 모용가의 일을 덮으십시오. 때마침 가족들마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용모가 변하셨으니 더욱 잘되었습니다. 그리 감춰둔 비밀들은 훗날 중요할 때 도련님을 지키고 적을 칠 예리한 칼이 될 것입니다.”
은 파파의 조언은 일리가 있었다.
거기에 새 신분이 있다면 심상에서 수련한 화산의 검을 감추는 데도 유리했다.
‘금태양’의 어린 시절은 지난한 투병의 연속이다. 딱히 비밀도 아니라 공들여 조사할 필요도 없다. 무한에서 오래 산 사람 하나만 붙들고 물어보면 알 일이다.
갑작스럽게 얻은 의술에 대한 기술과 지식은 그런 투병 생활과 얼추 버무릴 수 있었지만 검은 아니었다. 고작 한두 해 연마한 검이 아니라 척 봐도 수십 년의 공력이 보이는 검을 ‘금태양’의 삶에 끼워 넣는 것은 어려웠다.
은 파파도 둘째 형님도 그 자리에서는 묻지 않고 넘어갔지만 분명 무슨 기연이 닿은 건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
그러나 세상에 없던,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무인 ‘김진’이라면 가능하다.
사문과 내력을 밝히지 않는 무인은 흔하다. 개중 손에 꼽을 정도로 실력 있는 무인은 드물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모든 이들의 이목을 ‘김진’ 개인에게 모을 수 있다.
……만약 모용세가의 보복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은 ‘김진’에게 향하지, 금태양과 내가 금태양으로서 이룬 태양의원에 향하지는 않을 터.
내가 죽더라도 내 이름으로 세운 것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요! 그런 말을 자꾸 하니까 귀신이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러니까 만약, 만약이라잖아.
누군들 이렇게 더 나아진 몸으로 살고 싶지 죽고 싶겠어?
살기 위해서도 신분을 위장하는 게 더 유리하다 판단한 거라고.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듯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는 귀신을 두고 나는 머리를 묶고, 옷을 단정히 하고, 그리고 가면을 썼다.
밤새 ‘김진’의 이름을 각인시키러 돌아다녔으니, 이제 ‘금태양’의 일을 할 시간이다.
“뭐야, 어디 감? 환자 안 봄?”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오자 바쁘게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던 당당이 나를 붙잡았다.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나와 일행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융중다원에 머물러 있었다. 관자재암에서 변을 당한 이들이 이곳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고 있는 탓이었다.
시작은 백대의원에 들기 위함이었지만, 그들은 내 환자다.
사태의 피해자들을 돌보고 지원하는 것이 화제가 되는 등 큰 이득이 되진 않겠지만 한번 맡은 환자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오늘은 다른 데 가보려고. 여기를 부탁한다.”
“반야원에 가려고?”
“거기도 내 환자들이 있으니까.”
융중다원은 원래 차를 마시는 곳이다. 규모는 크지만 정원과 연못 등이 부지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마땅찮았다. 때문에 다급한 환자가 융중다원에 남고, 나머지는 시설은 낡아도 수용할 공간이 있는 반야원으로 향했다.
이틀간 융중다원에 온 환자들을 돌봤고 위급환자들의 상태는 많이 괜찮아졌다. 그러자 반야원으로 간 환자들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양원과 양진이 가 있긴 하지만, 그곳 의원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도 간다.”
어디선가 나타난 창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녀석은 왜 하루하루 얼굴에 불만이 늘어가지?
“넌 또 왜?”
처음 반야원에 갈 때도 자기는 강자들을 찾으러 가겠다며 빠진 녀석이, 이제 와서?
“반야원 근처에서 그놈을 봤다는 소문을 들었다. 놈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봐야겠다.”
“그놈?”
“소문을 못 들었나? 자하신룡인지 자하검룡인지 하는 녀석 말이다.”
움찔.
창천의 입에서 나온 내 새로운 별호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가면의룡도 어색하긴 했는데 자하신룡이라니. 하여간 이놈의 별호 문화는 어색해 죽겠다니까.
게다가 ‘김진’으로 활약한 건 고작 삼 일이다.
그 사이에 신룡 같은 거창한 별호라니.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중원에서 이십 년에 심상 속 화산에서 이십 년이면, 이제 당신 전생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산 건데.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매번 그렇게 어색해하기는.]
그러면 그냥 본능인가 보지. 솔직히 낯간지럽다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나도 그렇게 빨리 별호가 붙을 줄은 몰랐어요. 원래는 중원 출도 하고도 굵직한 일을 두어 개쯤은 해야 소문도 돌고 별호도 붙는 법인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가? 원래 사람들은 난세일수록 영웅을 원하잖아요.]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자하신룡은 왜 찾음? 받을 돈 있음?”
“창천 얘가 떼먹힐 돈이 어딨다고. 또 뭐 강자니 뭐니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거겠지.”
창천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이, 그냥 강해서 붙어보고 싶은 게 아닌 모양인데.
[창천도 사람인걸요. 연등회전에서 이름을 날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녀석이 자기보다 유명해지면 기분이 나쁠 만하죠. 일 났네. 들키면 창천이 가만 안 있겠는데요?]
유명세에 있어서 선수를 친 데다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까지 더해지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내가 저 녀석을 단숨에 꺾을 수 있을 만큼 고수가 되어도, 절대.
저 녀석은 그럴수록 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을 타입이야. 으으.
“당당 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나? 네 별호를 그 녀석이 가져갔는데?”
“음? 난 아무렇지 않음.”
당당은 정말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전보다 표정이 밝았다. 원래도 명랑한 녀석이긴 했지만 뭐랄까, 근심걱정을 내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개운하달까.
“제갈 소저가 그러는데, 나한테 새 별호가 붙음!”
“새 별호? 뭔데?”
“백엽(百葉)의 해독룡! 멋지지 않음?!”
백엽의 해독룡이라.
백엽은 당당의 비도술을 얘기하는 걸 거고, 해독룡(解毒龍)은 당철의 독에 면역이라 붙은 이름인가?
내가 관자재암으로 달려간 이후 당씨 형제들과의 대전에서 당당이 대단한 활약을 했단 얘기를 듣긴 했는데, 별호가 바뀔 정도였다니. 직접 못 봐서 좀 아쉽군.
[아쉬운 정도가 아닌데요? 해독룡이라잖아요! 사천당가 사람이 독룡도 아니고 해독룡 별호를 받은 건 무림사에서 최초일걸요?!]
사천당가는 독만큼이나 해독에도 해박하니 별로 이상할 건 없지만 뭔가 기묘하긴 하다. 당가는 자신들의 독술을 자랑으로 삼지 해독술을 자랑으로 삼진 않으니까.
“원래 당가는 자연독을 해독하는 것부터 시작함! 그야말로 근본! 최고의 별호임!”
이로써 당당 녀석이 집안에서 더 내돌려질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은 만족스러운 거 같으니 상관없겠지.
“아무튼 창천 넌 따라오지 마. 그거 다 헛소문이야.”
“헛소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다 아는 방법이 있어. 내가 정보에 좀 밝잖아.”
“그렇다면 자하신룡이 다음번 나타날 위치도 알고 있나?”
그걸 알면 내가 하오문주나 개방 방주겠지.
……아니다.
나만 그걸 알 수 있구나?
나 바본가?
“……자하신룡은 산적들을 때려잡는 게 취미라던데. 서북쪽에 작은 산채가 하나 있지 않나? 거기에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렇군. 서북쪽 산채라면 지금 출발해야겠다. 나중에 보지.”
창천은 그대로 몸을 날려 새처럼 서북쪽으로 사라졌다.
그 산채는 김진으로서 위명을 날리기 위해 은 파파가 골라준 산채 후보 중 하나였는데, 규모가 좀 작아서 황산채를 쓸어버리고도 이름이 충분히 각인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쓸어버릴 예정이었으나, 황산채 하나로 충분한 효과를 본 덕에 미뤄진 일거리(?)였다.
좀 이상한 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보통의 윤리 감각 정도는 있는 녀석이니, 그 산채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 하면 알아서 쓸어버리고 오겠지.
산채는 녀석에게 맡기고, 융중다원의 회복기 환자들은 당당에게 맡긴 후, 나는 반야원으로 향했다.
한동안 집처럼 들락거렸던 반야원의 정문을 보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모용갑, 그놈 때문에 저곳에서 쫓겨났었죠.]
그랬지.
보다 정확히는 공포에 질린 환자들에 의해 쫓겨났었지.
그때는 감추던 얼굴이 드러나고, 그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 상황 속에 패닉이 와서 제대로 항변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지만……
나는 잘게 떨리는 손을 단단히 쥐었다.
저곳에는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다.
다신 그렇게 맥없이 물러나지 않을 거다.
나는 정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