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87화 (187/350)

187화

대답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정확히는, 시야와 감각을 차단하던 먼지와 흔들리는 기의 파동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즈음.

“……무사하더냐.”

내 앞에 선 단단한 벽과 같은 둘째 형님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괜찮아요. 형님은?”

“나 또한 괜찮다.”

그러나 돌아선 형님은 썩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철벽과 같던 얼굴은 고통을 참는 흔적이 뚜렷했고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피가!”

“작은 내상을 입었을 뿐이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확실히 맥이 불규칙했지만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수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회복이 빠르거나 회복할 여력이 있는 자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세요.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위험하다, 내가―.”

“어차피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요. 의원의 말을 따르세요. 당장 치료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쩡한 것도 아니라는 거, 맥 한 번 짚어보면 다 압니다. 누굴 속이려고.”

거듭된 만류에 둘째 형님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는 먼지가 더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폭발이 가시고 바로 형님부터 찾은 건, 주변에서 더 이상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도망쳤거나 기척을 숨기고 기회를 엿본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음 속엔 분명 단말마의 비명이 여럿 섞여 있었다.

[……이거 살점이죠?]

그리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은 누군가의 흔적도 있었다.

나는 무언가의 폭발로 인해 푹 팬 바닥 아래로 폴짝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가장 깊게 팬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무언가 난데없이 터졌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벽력탄을 터트리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에 미리 매립을 해두고 적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 자리는 우리가 서 있던 자리가 아니라 놈들이 서 있던 자리였으니까.

누가 멍청하게 폭탄을 매설해놓은 곳을 선점하고 싸움을 벌이겠는가? 자폭이 목적이 아니고서야.

게다가 이 자리, 가장 깊이 팬 이곳은, 내가 기억하기론 분명 모용갑이 서 있던 자리였다.

“확실하네.”

가장 깊게 팬 중심부로 가 살피자 내 의혹에 하나둘 근거가 더해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나간 피부와 근육, 지방, 그리고 뼈와 내장의 조각들. 그중 그나마 큰 조각을 찾아 모양을 맞추자 답이 나왔다.

“안에서부터 터졌어. 그러니까 이런 모양으로 터졌겠지.”

그러면 누군가 뱃속에 벽력탄을 삼키고 있었다는 건가?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전생의 기술도 아니고 이곳에서 어떻게 뱃속에 있는 벽력탄을 터트린다는 거야?

“과도한 내공 순환으로 인한 기의 폭발이구만요.”

그때, 머리 위에서 한 늙은이가 웃음기를 지운 목소리로 말하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은 파파! 그쪽은 어떻게 됐어?”

“으음…… 뭐, 비슷했다 치지요. 이 늙은이가 아주 폐물이 됐나 봅니다.”

자조하며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은 파파가 쫓아간 쪽도 비슷하게 몸이 터져 죽은 모양이었다.

“짝이 안 맞는 팔 한 짝이 있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갔군요.”

은 파파가 중앙에서 떨어진, 나와 형님이 있는 쪽의 반대쪽으로 가 주위를 살피더니 반쯤 뭉개진 팔을 집어 들고는 혀를 찼다.

“잔챙이는 전부 죽거나 용모를 확인할 수 없고, 살아남은 놈은 도주했으니, 소림만 허탈하게 되었습니다그려.”

소림만 허탈할까.

나도 허탈했다.

그날의 치욕을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는 갚은 거죠. 녀석을 몰아붙였고, 놈이 최후의 수를, 아마도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의 수를 쓰게 만든 것 같았으니까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갚은 셈이니 공평하다면 공평하죠. 썩 달콤한 복수는 아니지만.]

그렇게 공평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나는 그 무엇 하나 자신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갈가리 찢겨나간 모용갑의 흔적을 보며 쓰게 웃었다.

win―win은커녕 win―lose도 아니고, 그냥 lose―lose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녀석은 패한 채로 끝이 났지만 나는 아니라는 점 정도일까.

그런 점에선 차라리 내가 낫군.

혼자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보며 입이 써지고 있었는데, 은 파파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헌데…… 설마 진짜로 도련님이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머리 아프니까 이상한 농담은 관둬.”

“둘째 도련님. 와서 이 늙은이의 물음에 답 좀 해주십사. 이 훤칠한 청년이 진짜로 우리 막내 도련님이오?”

은 파파의 엉뚱한 말에 저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형님이 몸을 일으켰다.

“맞네. 태양이가 누워 있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내가 직접 봤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쇤네는 쇤네가 늙어가지고 이제 눈도 삐꾸가 된 줄 알았지 뭡니까. 도대체 어떻게?”

“내가 갔을 때 방 안에서 큰 기의 흐름이 느껴지더군. 선사 여덟 분의 기를 받았으니 환골탈태라도 한 것이 아니겠는가.”

환골탈태?

훤칠한 청년?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뭐더라? 착각계? 그런 주인공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신 얼굴을 좀 봐요. 다들 안 놀라게 생겼나. 환골탈태 과정을 직접 지켜본 나도 놀랄 판인데요.]

나는 의아한 상태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옷자락에 검을 슥 닦았다. 거울도 없고 연못도 없으니 내 얼굴을 확인하려면 검면에 얼굴을 비쳐보는 수밖엔.

“……이게, 나?”

피와 먼지가 묻은 지저분한 옷으로 닦은 탓에 완벽하게 선명하진 않았지만, 검면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화상을 입은 듯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혹과 딱지, 부스럼이 가득하던 피부는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어릴 적 독한 약을 복용해야 했던 탓에 거의 눈썹이 나지 않았던 자리엔 깔끔하고 짙은 눈썹이 유려한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눈, 항상 부어 있거나 고름이 새어나오던 눈은 살짝 웃음을 짓고 있는 듯 유순하고 나른했으며 검은자위 흰자위 할 것 없이 깨끗하고 맑게 빛이 났다.

곧고 바르게 선 콧대며 가지런한 입술, 그 어디 하나 툭 튀어나오거나 기괴하게 휘어지지 않은 턱뼈는 너무나 낯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 부위를 하나하나 더듬어보았다.

전생에도 그리 못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준수한 축에 속했다.

“이리 보니 어릴 적 얼굴이 보이는구만요. 감축드립니다, 작은 도련님. 아이고, 이 쇤네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요, 흑흑…….”

은 파파가 과장되게, 그러나 진짜 감동을 받은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얼굴 외에도 내 손이며 발 등을 훑어보느라 바빴다. 고통에 웅크리던 몸이 펴진 것인지 키도 좀 큰 것 같았다.

“……네 어미를 닮았구나.”

둘째 형님 또한 묘한 얼굴로 나를 보며 축하를 전했다.

몇 번이나 내 얼굴을 만져본 후에야 나는 내가 진정으로, 이십여 년간 천형이었던 그 저주스러운 외모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다시금 검면에 얼굴을 비추자, 괜히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지옥과 같은 병, 그리고 저주스러운 외모를 나의 업보다 받아들이고 살았다 생각했지만 그 안에도 분명 억울함과 서러움이 있었던 것인지.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꾹 참고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지금은 지난 감정을 털어버리는 것보다 눈앞의 일이 중요했다.

“일단 소림으로 돌아가죠.”

“그래야겠지.”

둘째 형님이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은 파파가 소림으로 발을 돌리는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 가기 전에 이 늙은이 조언을 한 마디 듣고 가십시오, 도련님.”

* * *

백의인들은 일시에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붙인 불길이 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소림의 건물들은 실로 오래된 데다 부쩍 물이 가문 계절이라 주변 산도 불이 붙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물며 연등회 중이 아니던가?

관자재암의 일로 인해 연등회 자체는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소림의 창고에는 몇 날 며칠 동안 진행되는 연등회를 위해 준비된 많은 자재들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날 연등 행진을 위해 창고에 대기 중이었던 대형 연등, 종이와 밀랍, 그리고 오래도록 불을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두었던 기름들은 불이 크나큰 화재로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물론 불이 쉬이 꺼지지 않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소림의 승려들과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물론, 연등회를 찾았던 이들까지 달려들어 불을 껐지만 모든 불이 완전히 꺼지는 데는 닷새가 소요되었다.

“잿더미가 되었구나, 허허, 아미타불…….”

소림 방장은 아직도 연기가 풀풀 올라오는 숭산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잿더미라니요, 방장 스님. 아직도 소림은 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대웅전은 불타지 않았고 많은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소림에는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몇몇 승려들이 어두운 낯으로, 그러나 없는 기력을 쥐어짜내 외쳤다. 그것은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아니라, 지금 기세에서 지면 운명 앞에 무릎을 꿇을 것만 같다는 절실함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다들 상심한 것을 아네. 허나 대웅전이 불탔다 해도, 우리 또한 일부가 사라져 소림이 무너진다 한들 어떠한가. 모든 것이 공수래공수거인 것을.”

“방장 스님…….”

허탈함을 넘어 불도를 깨달은 것 같은 방장의 모습에 모두들 염려를 표했다. 나이 든 노승이 큰 상심으로 열반 아닌 열반을 하지는 않을지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방장은 인자한 낯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천 년 소림, 그러나 천 년 전의 소림도 이처럼 웅장했겠던가? 그 어떤 명성이 있었겠나? 달이 뜨고 이지러지는 것을 슬퍼함은 아니 될 일이야.”

그리 말하는 방장은 실로 평화로워 보였다. 소림의 승려들은 방장의 그런 모습을 보며 다시금 불호를 외었다.

“그래. 그 백귀단이라는 자들은 끝내 배후를 찾지 못한 것이더냐?”

“현금이 뒤를 쫓았으나 일부가 폭사하고 소수만 남아 도망친 듯하답니다. 그 이상은 제자들을 보내 쫓을 여력이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허면 그 의혹에 대해서는?”

금태양이 모용갑의 얼굴과 이름을 밝힌 일에 대해서였다. 그 자리에는 두 아미승과 제갈다영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본 얼굴의 용모파기와 모용갑을 본 사람의 증언을 대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용모는 일치합니다만, 혈교의 무인이라 주장하기도 해서 확실히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허나 작은 모용공자의 말로는, 모용갑이 수상한 무리들과 어울리곤 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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