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심상 속 화산에서 익힌 것은 검뿐이 아니다. 상승의 검법에는 자연 상승의 보법이 따라야 하는 법.
나의 두 다리가 이전과는 다른 복잡한 놀림을 보이며 내게 향하는 공격들을 몇 번이고 피해냈다.
그렇다고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 또한 쉬지 않고 그들이 미처 막지 못한 틈새를 찾아 교묘하게 끼어들어 갔다.
“으윽!”
“물러나라!”
“젠장, 단숨에 끝낸다!”
상대가 조급해할수록 틈은 확실해졌다. 전이었다면 이런 다수를 상대하는 공격에 맥을 못 추고 쓰러졌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내가 검을 수련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해를 거듭할수록 내 수련에 부정적이던 이들도 나를 돕기 시작했다.
그 전이라면 전승이 끊긴 검이니 좀 허접해도 넘어갈 수 있지만, 심상일지라도 진짜 화산에서 화산의 사람들에게 지도받은 검을 가지고 어디 가서 쪽팔리게라도 하면 저승 와서 가만 안 둔다나 뭐라나.
하여간 홍령의 사형제들다웠다.
특히 그들이 공을 들인 것은 지금처럼 다수를 상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강호에서는 일대일로 싸우는 경우보다는―
[다대일, 혹은 다대다로 싸우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맞죠?]
아하?
[무령 사형이에요? 정말 그들을 만난 거군요?]
그렇다니까, 검만 봐도 그렇지 않아? 내가 어디서 이런 상승 검법을 갑자기 뚝딱 배워 왔겠냐고.
[다들 그곳에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홍령이 감격에 찼지만 차마 그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 혼을 희생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각도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방어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그런데 왜 그렇게 밀려요? 이십 년을 수련하고 왔다면서요? 사형이 고작 그 정도만 가르쳤을 리가 없는데? 영혼의 수련을 육신이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건가요?]
그것도 있고, 지금은 좀 의도하는 게 있어서 말이지.
나는 홍령에게서 신경을 끄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전에 비하면 아무리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었다지만 한가롭게 수다를 떨면서 상대할 만큼 이들이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허억, 허억……!”
몇십 합을 나눴을까.
녀석들 중 하나는 가슴팍에 깊은 자상을 내 주었고 한 놈은 검을 부러트렸지만 녀석들 중 가장 약한 두 놈일 뿐이었다. 나는 벅찬 숨을 내쉬면서 상황을 돌아보았다.
상대할 숫자가 줄었으니 내게 더 유리한 상황이 되었어야 하는데, 나는 더욱 강맹해진 놈들의 검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힘을 적당히 분배해야죠! 남은 적들이 있는데 두 놈 베어 넘기는 데 그렇게 체력을 소모하면 어떡해요! 환골탈태하고 이제 막 일어난 건데! 빨리 도망쳐요!]
도망치긴 왜 도망쳐?
슬슬 물고기가 미끼를 물려고 하는데.
챙―!
강한 일격에 검을 맞대자 폭음 같은 소리가 터졌다.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듯 나는 바닥에 발자국을 깊게 남기며 한참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를 흘깃거리며 퇴로를 살피는 척하다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만!”
물었다.
“다들 물러나. 내가 상대하지.”
“도련님! 안 됩니다! 선약을 과복용한 상태로 내공을 쓰시면―.”
“내가 괜찮다니까! 니들이 뭐 돼? 왜 자꾸 잔소리야?”
모용갑이 신경질을 내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다 생각했는지 피가 흐르는 복면을 집어 던졌다.
그래, 와라.
[……당신, 갑놈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지친 척한 거예요?]
나도 내 상태는 잘 알고 있다고.
갑자기 천하무적이 된 것처럼 날뛰고 있지만 이제 막 심상의 세계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다.
한계를 끌어낸다면 여기 있는 자들을 바닥에 눕히고 모용갑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할 거다.
그러나 그때가 지금은 아니다.
누가 돌려준 목숨인데,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함부로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할 수는 없지.
“네 녀석, 이름은 뭐지?”
근데 저 녀석, 아까부터 나를 왜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거야?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네 녀석에게 아량을 베푸마. 네 녀석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다. 이제 그만 내 밑으로 들어와라.”
“하아?”
“명예나 야망이 아니라면 돈을 주마. 내가 너를 비싸게 사겠다. 얼마면 되지? 얼마면 돼? 백금이면 너를 살 수 있나?”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의 눈엔 진짜 기이한 열망이 보였다. 자기 얼굴에 사선으로 금을 그어버린 자를 영입해보겠다는 열망.
“……이게 어디서 같잖게 큰 그릇 행세를 하고 지랄이야? 카악, 퉷.”
나는 없는 가래를 부러 끓여 놈의 발치에 퉤 뱉었다. 진짜 속에서부터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 같은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 하여간 그 동생에 그 형이네.”
저런 식으로 인재를 꼬셔서 제대로 책임지는 놈 한 놈을 못 봤다.
전생의 본부장, 모용을 그놈은 지가 꼬신 인재들에게 열폭해서 뒤에선 있는 대로 씹어대다가 인재가 성과를 거두기 직전 작은 실수를 빌미로 걷어차고 자기 성과로 만들어버렸지.
아예 업계에 다신 발 못 붙이게 나쁜 소문까지 곁들여서.
……그 뒤처리를 내가 했으니 나도 참 업보가 깊다.
“부하들까지 물리고 나설 정도면, 자질구레한 말 없이 남자답게 와라. 아니면 내가 가지!”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다.
놈이 멈칫하는 사이 나는 곧바로 검을 찍어 누르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재생의 서막이 검 끝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다급하게 휘두른 모용갑의 검은 피지 못한 꽃 한송이처럼 그 궤적이 맥없이 후두둑 끊겨버렸다.
계속해서 검과 검이 맞부딪쳤고 나는 적절하게 놈을 몰아붙였다. 놈의 흰 옷 여기저기가 찢겨나갔고 피가 흘렀다. 놈은 순식간에 보잘것없는 넝마처럼 변해갔다.
고작 이런 녀석에게 내가 당했다고?
그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검은 더욱 매서워졌다. 지금은 한계를 끌어낼 때가 아니다? 알 게 뭐야!
[―!!!]
검 ‘홍령’의 끝에 한 자가량의 검기가 맺혔다. 다시금 펼쳐진 서장의 검이 놈의 검을 마구잡이로 파훼했다. 틈새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틈을 만들었다. 실금이 구멍이 되고 구멍이 박살이 났다.
“끝이다!”
“도련님!”
“안 돼, 막아라!”
떨어져서 지켜보던 백의인들이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질렀지만 늦었다. 나의 검은 이미 녀석의 목을 가르고 있었―
콰과과광―!
격한 폭발음과 함께 나는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를 구른 후에야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격렬한 기의 폭발에 정신이 멍했다. 일부 기가 역류한 듯 피가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가로 흘러내렸다.
억지로 힘을 끌어올려서? 그게 아니었다.
“감히…… 감히 내게……!”
내가 모용갑의 목을 거의 베기 직전이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모용갑이 서 있었다.
칼이 분명 닿았던 것은 맞는 듯 목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지만, 그보다 눈과 귀에서 흐르는 피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만두지 않겠다!”
순간 모용갑이 사라졌다. 그리고 등에 불이 붙은 듯 화끈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나마 순간 반응을 해서 화끈한 정도로 끝났다. 반응하지 못했다면 몸이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미친, 저 속도는 대체!]
놈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후 다시금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아까는 내가 놈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면 이번엔 반대였다.
놈의 검이 내 눈알을 긁었다. 그 화끈함을 느낄 새도 없이 검면이 내 뺨을 후려쳤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목뼈가 부러질 정도의 힘이었다. 서른 합이 넘도록 나는 놈의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속도, 압도적인 힘.
갑자기 어떻게? 이런 힘이?!
“안 됩니다! 더 이상은! 참으셔야 합니다!”
“도련님을 막아라!”
“방해하면 죽인다!”
멀리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모용갑의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갑자기 상황은 난전이 되었다.
일부는 모용갑을 상대했고 소수가 나를 막아섰다. 내상을 입었지만 눈앞의 소수를 뿌리치고 모용갑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모용갑을 막아서던 자들이 내게 검을 뿌렸고 그 검에 내가 뿌리쳤던 자들이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모용갑은 앞을 가로막는 제 수하를 베고 내게 달려들었고 내가 그 검을 받아내려다 놈의 수하를 베었다.
엉망진창,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무림의 싸움은 항상 정석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숙들의 조언과 그들이 제공한 실전에 가까운 경험이 없다면 이미 내 몸은 사지 한두 개쯤 떨어진 너덜너덜한 상태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허억, 허억…….”
싸움이 거칠어질수록 모용갑은 이상해졌다. 미친 것처럼 광소를 터트리고 드러난 피부의 실핏줄들이 팽팽하게 도드라졌다. 붉게 흐르던 피는 검어졌다. 저 정도면 과다출혈로 쓰러져야 정상인데 그럴수록 녀석은 기이하게 강해졌다.
놈의 눈이 뒤집혔다. 불거지던 핏줄은 아예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로 부풀었다. 더 이상 인간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흐흐, 흐흐흐흐. 감히 나를 비웃어? 흐흐흐, 흐하하하하!”
칼에 흐르는 피와 뇌수를 핥거나 싸움이 급박한 와중에 바닥에 널브러진 제 수하의 떨어져 나간 팔을 집어 들고 으드득 씹어 먹기까지.
“죽인다…… 전부 죽여…… 죽이고 그 피와 살을 취하리라……!”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라!”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백의인들은 내가 있거나 말거나 모용갑에게 달려들었고 불길에 달려든 부나방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제발……!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나를 막아섰던, 그 실력이 고강해 나를 고전에 빠트렸던 이가 모용갑의 칼에 심장을 꿰뚫렸다. 모용갑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시체가 된 수하에게서 칼을 뽑았다.
놈이 내게 몸을 돌렸다.
“먹어 치울 것이다. 전부……!”
저게 주화입마라는 것인가? 살귀가 된 건가?!
안 그래도 지난날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지만, 검을 쥔 내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저런 것을 살려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다.
허나 어떻게―?!
아까까지 내 안을 가득 채우던 자신감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놈이 나를 향해 바닥을 박찼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깡―!
여태까지 검을 부딪칠 때 났던 폭발음과는 달리 초라한 소리가 났다. 검 ‘홍령’이 날아가 저만치 바닥에 푹 박혔다. 나는 갈가리 찢어진, 피 묻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 힘이 비등할 때나 큰 소리가 나는 거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의 힘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놈의 검이 내 목을 향해 날았다―
[안 돼!!!!!!!!!!!!!]
갑작스레 무언가가 내 옆을 바람처럼 스치고 날아와 녀석과 나 사이에 섰다. 놈의 검이 그를 갈랐다. 다시금 폭음이 터졌고, 이번에는, 소리뿐 아니라 진정 무언가가 터져나갔다.
기의 폭발이었다.
엄청난 압력으로 흙바닥이 터져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뿌연 흙먼지가 눈앞을 가렸다. 어찌나 분진이 심한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내 앞으로 달려 나가 녀석의 앞을 막은 사람을 불렀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