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85화 (185/350)

185화

불타는 소림을 배경으로 더 붉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원하는 것만을 베어내기 위해 섬세하게 조형된 검법이 백귀단이 뒤집어쓴 흰 천을 찢고 그 안의 살과 근육을 베었다.

나를 막아서는 자들 하나하나의 실력엔 부족함이 없었다. 어떤 자들은 나보다 더 뛰어나기도 했다. 둘째 형님이나 좌수검 정도 되려나 싶은 이들이 내 검을 막았을 때는 내 걸음도 막혔다.

허나 잘 갈린 검도 가야 할 길이 명확할 때나 그 예리함이 빛나는 법!

“막아! 저놈을 막아!”

“아직 두 명의 행방을 찾지 못 했습니다!”

“저 녀석들을 빨리 처리해야, 으악!”

놈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빠진 거 같았다. 소림에 붙잡혀 있던 백귀단원, 그들을 구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처리하고 얼굴을 녹여버린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이 저항을 시작했다.

백귀단원들은 순식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모양새가 되었다. 붙잡힌 이들의 숫자가 적었기에 결국 그들은 도살되는 돼지처럼 한때 동료였던 이들의 칼에 찔린 채 산 채로 황산을 뒤집어썼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실력자 중 하나가 빠져나가 내게 여유가 생겼다. 놈들은 나를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내 검이 놈에게 가 닿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애처럼 보호받으며 처박혀 있을 생각이지? 네놈도 무인이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라!”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무림인들의 생리를 이제는 안다. 나는 놈을 도발했고 놈은 우습도록 한 번에 걸려들었다.

“비켜! 저놈은 내가 처리한다!”

“안 됩니다!”

“빨리 상황을 처리하고 물러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서겠다는 거잖아! 비켜! 막아서는 놈은 벤다!”

누구 하나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저놈이 모용갑이다. 실력자들을 제치고 검을 뽑아 내게 달려드는 그 기세가, 부딪치는 검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이자들은 내게 맡겨라!”

어느새 다른 방향의 적들을 처리한 건지, 산불로 인한 연기가 가라앉기 시작한 곳에서 달려온 둘째 형님이 나를 묶어놓던 실력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모용갑이 저들과 합공을 했다면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덕분에 모용갑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녀석은 강했다.

한 호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몇 합을 겨룬 후의 감상이었다.

심상 속에서 이십 년의 수련을 거치고 적을 상대했을 땐 나 또한 무척이나 강해졌다고 느꼈고, 지금 실력이라면 모용갑은 단칼에 꺾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볼 수 있다면 너 또한 그만큼 강한 것이다.

무령 사숙의 말이 이제야 와 닿았다.

녀석의 칼에 쓰러졌을 때, 그때는 이 녀석이 이처럼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상대의 실력을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덤볐던 애송이였다, 나는.

하지만.

“흐읍―!”

“왜, 내 검이 벅차? 왜 벌써 호흡이 그래?”

두 검이 팽팽하게 맞댔을 때, 나는 녀석의 두건 너머로 눈을 마주치며 이죽거렸다.

녀석은 강하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칼을 맞대고 있는 그대로 녀석을 밀쳐버렸다.

“너는 그곳의 그 누구보다 약해.”

그대로 나는 도약했다. 검 끝에 자줏빛의 기운이 짙게 응축되었다.

[말도 안 돼……! 이 기운은……!]

몽우리 진 꽃이 눈을 녹이며 피어나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가.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자신이라는 방점을 찍기 위해서는 그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피워내는 검은, 죽음 그 이후의 세계에서 생(生)에 대해 고뇌한 선인이 검으로 이에 대한 답을 내어놓은 것이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 재생(再生)의 서(序).

그 어떤 힘이 꽃망울을 뜯고 가지를 꺾어도,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한 그 가지는 다시 꽃을 피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의 절대명령.

삿된 오해와 비극 속에서 진 화산의 검이 죽음에서 다시 피어난다.

[이건, 이건……!]

홍령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새로 태어난 매화검법이 모용갑을 몰아붙였다. 서막의 검은 갓 검을 쥔 제자가 피어나야 할 꽃망울을 베어내듯 거칠고 폭압적이다. 베지 않는 것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목표를 베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검!

그 검이 모용갑의 검을 쳐내고 뒤집어쓴 흰 두건을 베었다.

“도련님!”

“안 돼, 도련님을 지켜라!”

“막아!”

젠장, 얕았어.

검 끝에 피가 묻어났지만 그뿐이었다. 뼈를 긁는 느낌은 확실히 있었지만 놈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리진 못했다. 사선으로 찢겨나간 두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가셔야 합니다!”

“웃기는 소리, 내가 저놈을!”

“도련님을 붙잡아라!”

그러나 저중에 머리회전이 빠른 놈이 있다는 것은 별로 내게 위안이 아니었다. 놈들은 어느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뺐다.

모용갑은 칼을 휘두르며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둘째 형님을 상대하던 이들이 아예 모용갑을 붙잡고 산 속으로 몸을 날렸다. 몇 명은 자리에 남아 우리의 추격을 막았다. 죽음을 불사한 듯 놈들의 공세는 매서웠고 누구 하나 자리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거 같았다.

“가라, 이자들은 내가 상대하마!”

그때 둘째 형님이 크게 외치며 내게 향하던 검을 붙잡았다. 남은 적은 다섯, 여기 있는 것은 둘째 형님 하나뿐인데.

“무사하세요, 형님!”

나는 형님을 믿고 놈들이 도주한 방향으로 뛰어갔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다.

놈들은 미리 도주로를 정해둔 모양인지 거침없이 뛰었다. 놈들이 향하는 방향마다 불타 쓰러지는 거목과 굴러 떨어지는 바위 등 장애물이 나를 막았다.

하지만 차라리 뛰어난 무인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는 내게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화산에서 보낸 이십 년 세월을 얕보지 말라고!”

험하기로 치자면 숭산은 화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물며 그곳은 심상의 화산이었다. 산은 차마 인간이 그 산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위험하고 높아야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경이로운 경치로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화산이다.

이보다 더한 거목과 더한 바윗덩어리를 겪어본 적이 없을쏘냐!

단칼에 성인 남성이 두 팔을 둘러도 한 아름에 들어오지 않을 거 같은 거목이 두 동강났고 굴러 떨어지던 바윗덩어리들은 벨 것은 베고 몇 개는 발판으로 삼아서 뛰어올랐다. 다급하게 따라온 홍령이 외쳤다.

[화산에서 이십 년 세월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문자 그대로 이십 년 세월이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요?!]

지금 그런 거 설명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놈들이 둘로 갈라진 거 같은데?!

백귀단을 척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모용갑이었다. 나는 그 녀석을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선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잘 수 없을 거다.

[일단 내가 한 쪽으로 가볼게요, 당신이 저쪽으로 가요!]

이럴 때면 늘 같은 방식으로 홍령과 나누어 흩어졌지만, 놈들의 기척은 동과 서, 완전 반대쪽으로 갈라졌다. 틀린 쪽을 고른다면 놈을 놓아주게 된다.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자는 저쪽이네, 젊은이.”

나무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들자 복면을 쓴, 그러나 눈에 익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은 파파!”

“?!”

“좋아, 내가 저쪽으로 갈 테니까 은 파파는 반대쪽을 잡아줘. 부탁해!”

나는 은 파파가 가리킨 쪽으로 달렸다. 은 파파라면 나머지를 잡아서 데리고 올 거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간 놈들은 내가 맡는다.

[괜찮겠어요? 만만치 않은 자들도 있었잖아요!]

괜찮아. 내 힘은 아직 백 퍼센트가 아니니까.

영육의 연결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 몸이 심상의 수련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령사숙도 내 생전의 상태에 대해서 듣더니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미리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숙은 동시에 그에 대한 해결책 또한 제시해주었다.

[사형을요? 사형을 만났어요?!]

그래. 그곳에서 만난 홍령의 사형제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의 상태에 대해 의논한 후 내놓은 해결책은 하나였다.

―한계를 부숴라.

약한 육신은 막대한 양의 내공과 깨달음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랬기에 어린시절의 나는 추궁과혈을 버틸 기력조차 없다는 판단 하에 그러한 처치 없이 약으로만 밑 빠진 독을 채워가며 연명해야 했다.

허나 화산은 내게 말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쓰는 고강한 무공, 그것은 원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던가?

어찌 한낱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를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그리 약한 몸으로 이십 년의 세월 동안 죽음에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면, 보통의 인간보다 엉망진창인 몸을 가지고도 그 경계를 부술 수 있을 거라고.

전생의 나는, 내게 엄습한 죽음 앞에 항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무참히 망가져 있었다.

시한부를 선고한 내 몸 안의 병보다도 나를 옥죄어 오는 그룹의 압박이 더 고통스러웠으며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세상의 무심함으로 이미 한 번 정신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무심함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의지로 암을 극복하고, 또, 또 어떤 이들은 정해진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지만 그건 나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했다.

이미 한 번 내 것이었던 힘.

그것을 다시금 내 손에 쥐기 위해서.

“왔어?”

나는 일부러 놈들보다 조금 앞서나간 후, 그 자리에서 놈들을 기다렸다. 녀석들의 도주에는 패턴이 있었다. 계획이래 봤자 고작 하루 이틀 정도 세웠겠지. 그걸 넘겨짚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네놈은 대체, 대체 누구냐! 누구기에 우리를 이렇게 막아서는 거지!”

“누구? 날 몰라?”

“정파 녀석들의 멍청이 같은 대의나, 소림에 잘 보이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면, 다른 제안을 하나 하지. 나는 그놈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을 줄 수 있다! 돈? 명예? 아니면 여자? 그 어떤 거라도 주지!”

얼굴의 상처에서 흐른 피는 멎었지만 그 피로 두건이 온통 엉망이 되어 허접한 꼴이 된 모용갑이 마구 지껄여댔다.

“너처럼 젊고 강한 자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함께 새 시대를 만드는 거다! 이 구태의연한 기존 질서에 편입되어 늙은이들이 던져주는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것보다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게 낫지 않나?!”

전이었다면 한 번 얘기를 들어보자 했을 것이다.

놈들의 개수작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그 구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겸 들어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짜증만 났다.

“시끄럽고, 검이나 뽑아.”

나 또한 검을 겨누었다. 모용갑 주변의 백귀단원들이 모용갑을 지키듯 둘러쌌다.

“혓바닥이 길다 했더니, 결국 남들이 대신 싸워주나 보군.”

“뭐, 뭐라―!”

“안 됩니다!”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참으셔야 합니다!”

“가자! 처리하고 도련님을 보내라!”

모용갑을 제외한 이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아니, 이 자리는 치욕을 갚는 자리다.

한계를 넘어서는 정도의 힘은 필요 없지만, 치욕을 갚을 정도는 충분하다.

수 개의 검이 나를 향해 시차를 두고 찌르고 베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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