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이게 어째서 여기에?
아니, 일단 여긴 어디지? 절간? 근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진짜, 진짜군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아니다, 지금은 일단 피해야 해요! 밖에 난리가 났어요!]
난리? 일단 여기가 어딘데? 내가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어?
[삼 일이요! 여긴 소림이에요! 사람들이 쓰러진 당신을 여기로 날랐고 추명스님이 은 파파였고 아아, 지금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지금 그놈들이 다시 쳐들어 왔어요, 빨리 도망쳐요!]
홍령이 나를 밖으로 떠밀었고(별 의미는 없지만) 금동이도 다급한 표정으로 털을 세우곤 앞장섰다. 문을 나서자 둘째 형님이 걱정스러운, 그러나 놀람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관자재암에 쳐들어왔던 그자들이 다시 소림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을 보니 붙잡힌 자들을 되찾거나 할 생각인 듯하다.”
“근데 형님은 여기서 뭐 해요?!”
소림에 난리가 났는데 소림 제일의 무승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고작 삼 일을 누워 있었을 뿐인데 따라잡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았다.
[피해욧!!!]
파바밧―!
밀린 물음들을 할 새도 없이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들었다. 형님의 수도가 비수를 쳐냄과 동시에 반 보 움직여 공격에서 벗어났던 내가 비수가 날아온 방향으로 발을 박찼다.
[?!?]
한 달음에 지붕을 타오르자 홍령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따라붙었다. 급격하게 좁혀진 거리에 백의인이 당황한 눈동자로 검을 뽑아들었다.
……느린데?
쇄도하는 백의인의 검은 강맹했다. 절대적인 평가 기준에서 보자면 그는 창천에 맞먹는 실력자였다. 전이었다면 그 검을 막아내거나 흘려내는 데 급급하다가 몇 번의 상처를 허락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움직임이 전부 눈에 보였다.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치는 검날을 엄지와 검지만으로 잡아냈을 땐 나도 놀라고, 검을 내리친 상대도 놀라고, 홍령은 물론, 심지어 뒤따라온 금동이까지 놀랐다.
먀? 먀아―! 냐아?!
[뭐, 뭐, 뭐, 뭐예요?! 방금 뭐예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물론 홍령에겐 할 말이 많았다. 환상 속의 화산이나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 그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하려면 며칠 밤이 있어도 모자랐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꺄악!”
“사, 사람 살려!”
“불이 안 꺼진다! 물을 더 길어와!”
눈앞의 상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붕 너머 저편, 낯이 익은 산모들이 허둥지둥하며 소림을 집어삼키고 있는 화마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백의인들은 불이 붙은 폭약을 집어던져댔다. 산모들을 해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좋지 않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익, 익! 억!”
눈앞의 상대는 내 손가락에서 칼을 빼내려고 애썼다. 나는 그대로 칼날을 쥐고 그대로 놈의 명치를 가격했다. 빼내려던 힘이 두 배로 작용했다. 놈의 눈이 핑글 도는 순간 칼을 뺏어 다시 명치에 쑤셔 박았다.
푸욱―
남의 살을 가르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이런 식으로 타인을 해하는 일은 어색했다. 예전엔 말이다.
“일단 하나.”
이제는 다르다. 이유가 없는 것을 해치진 않겠지만, 이유가 있다면 망설임은 없다.
복부를 꿰뚫린 채 피를 토하는 놈을 걷어찼다. 지붕에서 떨어진 녀석을 보고도 아직도 바닥에 붙박인 듯 서 있던 둘째 형님이 멍한 표정으로 나와 녀석을 번갈아보았다.
“형님은 저 아래쪽! 저기 놈들이 많아요! 전 북쪽으로 갈게요!”
왜 저런 얼빠진 표정인지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설명을 할 상황이 아니다.
난 저놈들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고!
“웬 놈이냐!”
“쳐라!”
북쪽의 가장 큰 건물로 향할 때마다 백귀단이 하나씩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내게 날아오는 공격들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비켜!”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상대의 움직임 중 빈 공간에 주먹을 찔러 넣거나 발차기를 가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면 다음 지붕으로 뛰어넘기 위한 발판으로 삼든가.
마침내 나는 내가 목표한 곳에 다다랐다.
소림의 대웅전.
아직 불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 한 사내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이들을 베어 넘기며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모용갑!”
부러 이곳으로 뛰어온 이유.
바로 모용갑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놈의 이름을 부르자 모용갑이 고개를 홱 돌렸다. 지난번에는 깊게 두건을 눌러 쓰고 있더니 이번엔 두건 없이 맨 얼굴이었다.
“또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놈이군?”
“뭐?”
녀석은 내게 몸을 돌리고는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이 몸의 이름은 척혈사! 혈교 백혈귀단의 단주다! 변방에 처박혀 있는 모용 나부랭이와 착각을 하다니, 오늘 내 그 눈알 두 개를 파 개 먹이로 주마!”
뭔 개소리야?!
누가 봐도 모용갑인데!
개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놈이 바닥을 박차고 내게 덤벼들었다. 모용갑의 것과 흡사하게 생긴 칼날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목젖 앞을 갈랐다.
어, 좀 빠른데?
하지만 따라잡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다. 녀석의 검은 다른 백귀단 녀석들에 비해 강하고 매서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검을 뽑지 않고 한참동안 요리조리 몸을 빼며 놈의 검을 관찰했다. 녀석은 나를 빨리 해치우고 싶은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동작이 커서 피하기가 편했다.
일전의 나였다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잃었겠지만―
챙―!
놈이 휘두른 회심의 일격을 정공법으로 막아내자 녀석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넌 아냐.”
모용갑의 얼굴을 한, 자신을 혈교의 무인이라고 주장하는 자.
이자는 모용갑이 아니다.
검에서 기세에서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일격을 가했던 그놈, 내가 정체를 밝혔던 그놈은 분명 모용갑이었다.
“얕은 수를 쓰네. 같은 얼굴을 한 수하를 보내놓고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게 하는 건가? 고작 그 정도로 네놈들의 수작이 덮어질 거 같으냐!”
진심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심상 속에서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날 관자재암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가던 이들을 떠올릴 때면 이를 갈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뭐? 이런 조잡한 방식으로 사실을 은폐하려 들어?
“이놈이 끝까지 망발을!”
“감히 어딜!”
놈은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듯 질풍 같은 기세로 칼을 휘둘렀다. 아까까지 존재하던 어색함이 사라진, 빈틈이 없는 검. 좀 전의 빈틈은 모용가의 무사가 아닌 척 다른 검을 모방하느라 만들어진 틈새였을 터.
빈틈이 존재하지 않는 검의 태풍 같은 몰아침, 그곳에 나는 검 ‘홍령’을 비스듬히 찔러 넣었다.
어떤 완벽한 것은 단 하나의 티끌만으로도 불완전해지곤 한다.
빽빽하게 들어찬 압력 사이 진공의 공간이 생겼다.
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그 공간을 넓혀갔다.
바람 한 줄기 끼어드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공백.
자줏빛 검기가 눈이 시리게 빛나며 공백의 몸집을 부풀렸다.
[모든 공격을 무효화 하고 있어……!]
홍령의 놀란 탄성과 동시에, 공백이 숨 막힐 듯 상대의 검을 집어삼켰다.
“으윽, 큭―! 컥……!”
검은 허공을 날아 돌바닥에 내리꽂혔다. 나의 검은 상대의 안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마 뇌를 휘저었을 것이다. 놈은 꼬챙이에 꿰뚫린 낙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다 축 늘어졌다. 검을 휘둘러 녀석을 팽개치자 검 끝에 피와 뇌수가 묻어 흘렀다.
“인피면구가 아닌데?”
검 끝으로 얼굴 가죽을 긁자 그대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제아무리 얇은 인피면구를 썼어도 이렇진 않을 거다. 모용갑과 지독하리만치 똑같은 얼굴이지만, 이건 이놈의 얼굴이 맞았다.
“성형수술이라도 한 건가?”
일단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모용갑인 줄 알고 전날의 복수를 하러 왔더니 전혀 다른 놈이라. 허탈했지만 곧바로 다시 바닥을 박차 대웅전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가짜가 있다면 진짜도 있겠지.
모용갑을 깊게 겪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가짜를 보내놓고 혼자 멀리서 다리 뻗고 누워 있을 거 같진 않았다. 놈은 그러기엔 지나치게 오만했고 또 혈기왕성했다. 모든 게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돌아가야만 직성이 풀릴 거다.
그렇다면 바로 이 자리, 흰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와 있거나 적어도 근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저기요, 저기!]
둘째 형님이 불을 지르는 백귀단 녀석들을 반으로 접어버리고 있는 쪽의 반대편. 홍령이 무언가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사람, 사람을 녹여버리고 있어요! 저긴 감옥이라 그랬는데, 확보한 백귀단 놈들을 가둬놨을 거예요! 아아, 또!]
홍령이 말한 곳으로 몸을 날리자 과연 지독하리만치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이처럼 산과 건물들이 타오르고 있는데 냄새가 날 정도라니!
그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선 이상한 병을 들고 있는 놈들의 팔에 검을 휘둘렀다. 한 명의 손목을 끊고 다른 두 명은 피했지만 손에 들고 있던 병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이 깨지자 부글부글 소리와 함께 돌바닥이 끓으며 녹아 내렸다.
“그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적당히 해 두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녹아버린 시체가 두 구, 그리고 그 앞에 선 백의인들.
홍령이 왜 이곳을 가리켰는지 알 거 같았다.
단순히 그들이 사람을 묻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지키듯 서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묻는 외침과 검이 날아오는 속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겹의 검이 교차해 날아들었지만 나는 그 검을 흘리고 받아치고 걷어찬 다음 다시금 날아오는 검면을 발판 삼아 놈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놈들이 지키고 있는 한 명의 백의인에게 검을 휘둘렀다.
놈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보다가 다급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깔끔한 발검.
이걸 한 번 본 적이 있지.
지난번에는 겨우 그 검을 막아서는 정도에 그쳤지만―
나는 검을 피하거나 흘려보내는 대신 그대로 놈의 발검에 맞부딪쳤다.
두 검이 부딪치는 순간 수 개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터졌다.
“윽―!”
놈은 내 검에 실린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변의 백의인들도 당황해 거리를 벌렸다.
나는 놈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형국이 되었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나는 사자요 호랑이였고 놈들은 거침없이 짓밟힐 잡초나 들풀이었다.
내 몸에 흐르는 부드럽고도 강맹한 기운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당신 도대체―,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주변을 짓누르는 기운.
내 몸에서 피어난 자줏빛 기운에 홍령이 말을 더듬었다.
자기가 가르쳐놓고 까먹기는.
[잠깐만요, 설마?!]
손끝에서 피어난 기운이 검 끝에 맺혔다.
홍령이 내게 가르쳤으나 그 이름을 끝내 떠올리지 못한 내공심법.
나는 심상 속 화산에서 그 신공의 이름을 배웠다.
자하신공.
신선의 깨달음을 얻은 이가 꿈속에서 핀 자줏빛 흑매화를 보고 만들었다던 그 신공이 나와 심상 속 화산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깨달음이 지금, 내 검 끝에서 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