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82화 (182/350)

182화

“슬슬 때가 된 것 같구나.”

봄이 되었음에도 꽃이 피지 않는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던 내게 무령이 다가와 한 말이었다.

이곳에서도 어떤 가지들은 영영 죽음을 맞았고 봄마다 나는 이를 솎았다. 죽은 가지를 방치하면 어린 가지가 자랄 자리가 없고, 가늘고 불이 잘 붙어 여차하면 큰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 땔감이 되기도 해서 화산의 어린 제자라면 봄이면 이 가지를 자르는 일을 반드시 거쳤단다.

이 수많은 가지를 일일이 손으로 분질러 자를 수는 없었기에 역대 화산의 제자들은 검을 들었고, 촘촘하게 뻗은 가지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미숙한 이들의 검에 꽃망울이 맺힌 가지들이 분분히 떨어져 나갔다.

화산에선 목검으로 기본 수련을 마치고 진검을 받은 제자들이 성한 가지를 베어내는 걸 가리켜 ‘매화를 피웠다’라고 일컬었단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후엔 실수 없이 죽은 가지만을 잘라냈다고.

그러니까 세간에서 ‘화산의 검은 매화를 피워 낸다’라고 하는 말은 그 검이 아직 미숙함을 조롱하는 것에서 시작된 거지.

“……아직 영육의 연결이 충분치 않다고 하셨던 게 지난 겨울입니다만?”

허나 부드러운 매화는 내 검에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내 발걸음이 가는 곳마다 죽은 가지만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것이 없지 않느냐. 이제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러나 내 검에는 붉은 기운이 아스라이 흘렀다. 분명한 매화를 그리진 않았지만 그 짙은 향기처럼 존재감이 뚜렷했다.

처음 검을 쥔 제자는 움튼 꽃잎을 자르고, 그 실력이 수위에 달한 제자는 죽은 가지만을 깔끔하게 잘라낸다. 어느덧 어떤 제자는 검 끝으로 매화의 향기를 뿜어낸다. 이 경지에 다다른 제자는 강호에 나가 매화검수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들 중 제일 빼어난 이는 장문인의 허가를 받아 자하신공을 수련할 수 있게 되는데, 그때 검 끝에는 붉다 못해 검어 자줏빛을 띠는 매화가 궤적마다 피어난다고 했다.

“홍령이 기다릴 거다. 사매는 강한 사람이지만 꽤나 외로움을 타거든. 너는 그런 사매의 유일한 벗이 아니냐.”

홍령이 기다린다.

그 말에 나는 마지막 가지를 자르고 검을 집어넣었다.

현세로 돌아가면 찰나의 꿈처럼 느껴질 세상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여든 개의 계절을 지났다. 그 시간의 밀도를 생각한다면 현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없는 세상이고, 나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무령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네가 뵈어야 할 분이 있다.”

나는 무령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화산 어디론가 가는 줄 알았더니 산을 한참 내려가 화산 어귀를 벗어났다. 지금껏 보아왔던 풍경이 아닌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입구에서 무령은 발을 멈추었다.

“나는 여기까지만 갈 수 있다. 허나 길을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바로 헤어지는 겁니까? 아직 다른 사숙고에게, 장문인께 인사드리지 못했는데―.”

내가 다시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무령이 나를 잡았다.

“무엇을 염려하느냐? 우리는 원래부터 없었다. 허나 앞으로는 네 검의 궤적에 남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나를 가볍게 밀었다.

다른 풍경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내 뒤에 있던 것들이 사라졌다. 꽃 피는 화산의 봄은 사라지고 기암괴석과 낯선 동식물이 가득한 산속에 남았다. 당황하며 허리춤을 살폈다. 다행히 그 검만은 남아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자 어딘가 눈에 익은 것들도 보였다. 매화를 닮은 가지 하나에 희고 붉고 분홍을 띠는 꽃들이 다닥다닥 피어 있었다.

저 꽃을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자 어느덧 너른 평지가 보였다. 아주 평지는 아니고 그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는, 그런 땅이었다.

발목까지 자란 부드러운 풀들을 밟으며 나아간 그곳엔 아주 작은, 얼핏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그 나무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령이 말한, 내가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저 사람임을 알았다.

“네가 그 아이더냐?”

노인이 몸을 돌렸다.

깊은 눈과 오묘한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깊이가 느껴졌다. 동시에 무척 친근한 마음도 샘솟았다.

처음 보는 낯선 이임에도 어쩐지 꿈에서 몇 번 본 거 같은 익숙함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 나에게 노인이 그런 느낌이었다.

“노선생께서는 혹시?”

“이리 와라.”

노인은 내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볼품없는 나무. 그 나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투명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다, 투명한 꽃.

얼음으로 피워낸 것 같은 꽃은 어쩐지 기시감을 주었다.

“이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호오.”

“그건 색이 이렇게 투명하진 않았고요, 흰색과 분홍색, 그리고 붉은색의…… 여기 오면서도 보았는데. 여기서 말고 그 전에도 봤습니다. 현세에서, 그러니까 그 이름이―.”

“확실히 돌아갈 때가 되긴 했구나. 더 이상 머물면 혼이 영영 육신을 떠날 게다.”

현세에서는 분명히 알고 있던 그 이름들이 떠오르지 않아 내가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그는 투명한 꽃이 핀 가지를 꺾었다.

“이 꽃의 이름은 혼생화(魂生花)다. 천 년에 한 번쯤 필까 말까 한 것인데, 나 또한 이 꽃이 피는 것을 처음 보았지. 이것이 있다면 명이 다한 자도 다시 생을 얻을 수 있다더군. 그 애들이 이걸 내어달라 했을 땐 저승에 못 가고 남은 것들이 드디어 미쳤나 했다.”

나는 그가 꺾어든 혼생화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간 사숙고들이 차사를 방해하는 한편, 내 영육의 연결을 단단히 할 수단을 찾아보고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귀한 걸 내게 주라고 했을 줄이야.

“아이야. 너는 너 스스로 이것을 받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기준을 모르니 답도 모릅니다. 어떤 자격을 갖춰야 이걸 받을 만합니까?”

“……그걸 되물어 본 녀석은 네가 처음이구나.”

노인은 잠깐 중얼거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다시 산다는 것 아니냐. 한 번 실패를 했다는 거지. 그럼에도 다시 살 기회를 얻는 자는 어떤 자여야 할 거 같으냐?”

이런 질문은 어차피 정해진 답이 없다. 듣는 사람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리면 그만이다. 어떤 점에서는 전생의 입사면접과 닮았다.

어떤 답이 그럴싸할까. 삶을 향한 불굴의 투지를 가진 자? 타인과 세상을 위해 한없이 희생할 수 있는 자? 그도 아니면 역사에 길이 남을 원대한 계획을 가진 자?

정해진 답은 없지만 모범 답안은 많았다.

그러나 내가 고른 답은 그런 모범적인 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살고자 하는 자면 됩니다.”

“그냥 살고자?”

“어떤 꿈을 갖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 지치고, 실수를 하고 쓰러졌다가도 또다시 살아가는 그런 삶 말입니다. 그 꿈이 얼마나 크든 작고 소박하고 보잘것없든, 아무리 깊은 좌절에 빠졌든, 그 실수로 하여금 죽음에 가까운 뼈저린 상실을 얻었든.”

맞다, 아까 본 꽃은 삼생화라고 불렀다.

“다시 나아가는, 그리하여 그냥 계속 살아가는 삶.”

어렴풋하던 현세의 기억들이 또렷해졌다. 이어지던 전생도, 그때의 죄악도, 이를 갚고자 살던 현생도.

“살고자 하는 이에게 삶이 있지, 그럼 누구에게 살 자격이 있겠습니까?”

생전의 어두운 기억을 더듬어가면서도 소소한 것에 쉽게 울고 웃는 귀신과 아픔을 뒤로하고 내게 미소를 보이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더 나아가지 못함에 후회하거나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마무리하던 이들과, 누군가의 죽음을 보내고 꿋꿋하게 내일로 가던 이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주십시오. 저는 그 꽃을 받아야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찾는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돌아가야 했다.

“썩 정답이라 여기진 않는다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물을 주고 키웠지만, 애초에 이걸 주고 말고 할 권리가 내게 있는 건 아니었으니.”

“예?”

노인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내 손에 혼생화를 툭 떨어트렸다. 시릴 만큼 투명한 꽃잎이 녹아 내 손에 스며들었다.

“그 꽃은 그저 천 년을 기다린다고 피는 꽃이 아니다. 그 꽃은 어떤 이들의 혼과 넋으로만 피어난다. 그것을 명심하거라.”

“……잠깐만요. 그렇다면 이 꽃은 혹시―.”

멀리서부터 주변의 모든 것이 질량을 잃기 시작했다. 혼생화의 꽃잎처럼 모든 것이 투명하고 옅어졌다.

“그리고 네 녀석의 답은 틀렸다. 너 혼자 살려 한다고 살아지는 줄 아느냐? 누군가 너를 부축하기에 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영혼만 있을 때의 감각이 아닌, 육체의 감각이.

“하나 남은 후손이라는 것이 참으로 손이 많이 가누나.”

노인의 목소리가, 손에 녹아내린 혼생화의 촉감이 사라졌다.

살아라. 너를 살리고자 한 이들의 마음을 먹고.

살아라. 그럼에도 살고자 한 마음을 잊지 말고.

그렇게 다시, 살아라.

* * *

관자재암을 적신 피가 마르기까지는 삼 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달려온 소림으로 인해 사태는 진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관자재암을 찾아온 수많은 산모가 유명을 달리했고 아기들도 그 와중에 여럿이 죽었다. 그야말로 참담한 일이었다.

소림은 이 일을 적극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군주는 이 일을 조사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천명했고, 일대는 철통같은 방비에 둘러싸였다.

금가장의 그림자, 은 파파는 금태양에게 일격을 가한 흉수를 찾겠다며 불쑥 나타났던 것처럼 불쑥 사라졌다.

금태양은 삼생화를 갖고 있던 소림에 맡겨졌다.

소림 방장은 사로잡은 백의인들을 심문하는 와중에도 금태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삼생화를 쓴 것만으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방장을 비롯해 섬서로 떠나지 않고 소림을 지키고 있던 노승 여덟이 금태양에게 추궁과혈을 할 정도였으니, 소림으로서는 본산의 제자도 아닌 이에게 큰 것을 베풀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금태양은 깨어나지 않았다.

[좀 일어나 봐요. 몸은 이제 괜찮잖아요. 괜찮다 뿐이에요? 소림 땡중들이 평생 그러모은 기를 당신에게 쏟아부었다구요. 솔직히 효율이 무지 나쁘긴 한데, 그래도요, 경혈에 의존하던 것보단 제법 내공이 쌓였거든요? 진짜 무림인처럼 내공을 쓸 수 있을 거라고요. 물론 다시는 무공 같은 거 못 쓰게 할 거예요. 화산의 무공을 잇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건 적당히 자질 괜찮은 애 하나 찾아서 가르치면 돼요. 당신은 그냥 건강하게만 있어 줘요. 응? 들려요? 들리면 들린다고 뭐라고 반응이라도 해봐요. 벌써 삼 일째잖아요.]

금태양이 있는 소림의 심처, 숭산에서도 가장 맑은 기운이 흐르는 곳에서 귀기를 회복한 홍령은 슬픈 낯으로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있는 금태양의 옆에 앉아 흐느꼈다.

긴긴 세월 자신이 쓰던 침에 깃들어 홀로 세월을 보낼 때보다 지금 이삼일간의 기분이 더욱 처량했다.

사후 이십 년의 세월은 사람의 온기를 잊기에 충분했으나, 금태양과 함께한 일 년여간은 그 온기를 다시금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귀신이 추위를 탄다니 개도 웃을 말이다. 그러니 지금 홍령은 너무나도 마음이 시렸다. 마음이 얼어붙어서 그대로 또 한 번 죽을 것만 같았다.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제발…….]

홍령의 그 말을 들은 것일까.

금태양의 손. 화산인들의 넋을 담은 혼생화가 닿아 녹아내렸던 그 손이 작게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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