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각령. 차사는 멀리 쫓았느냐?”
“뭘 또 그걸 묻고 그려요. 알아서 잘 처리했겄지.”
“차사를 소멸시키는 것은 중죄이다. 우리는 선조들께 유예를 받아 이곳에서 생활하는 몸이 아니냐. 그분들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아아, 이 사람이 이렇다니께. 다른 사제들은 안 오고 나만 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다들 이리저리 수 써가지고 차사 고꿀박에 박아놓고, 못 나오게 빙빙 돌리고 있으니 걱정이야 붙들어 매십셔. 그건 그렇고, 아해야 이리 와라.”
각령이라는 도인은 척 봐도 굉장히 장난스럽게 생긴 사람이었다. 이 사람도 홍령의 사형제겠지.
“사숙을 뵙습니다. 금태양입니다.”
“사숙? 아, 근가? 내가 야랑 숙부와 조카가 되나? 그네! 아따, 그래. 너가 강해지고 싶다고?”
“예, 화산을 이어받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싶습니다.”
나는 각령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무령보다 이쪽이 더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표정 좋고! 그래, 이거부터 시작해 볼까?”
각령이 내 양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덥썩 들어서 절벽 아래로 멀리 내던졌다.
* * *
으아아아악―!
당황한 금태양의 비명이 절벽 아래로 멀어졌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무령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금태양을 구해오려는 것을 각령이 붙잡았다.
“아 괜찮아요. 안 죽는 거 알면서 사형도 호들갑은.”
“그래도 그렇지. 저 아이의 혼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다.”
“소멸되기야 하겠으요? 이거 좀 떨어졌다고 못 하겠다 그러면 있는 동안 푹 쉬라고 하면 되는 게지. 돌아가면 좋은 제자나 하나 찾아보라 하고.”
각령은 무령의 팔을 놓고는 느긋하게 뒷머리에 손깍지를 얹었다.
“어떻게 기어나 올라오면 끈기는 있는 거니께 이제 잘 가르쳐 봐야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예로 데려올 수는 없잖수? 애 기저귀 갈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제.”
각령의 험한 말에 무령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행동이 거칠긴 했지만 그가 틀린 건 아니다.
“하암, 간만에 혼 풀러 나갔더니 나른해지네. 난 들어가서 야화첩이나 봐야겠으니 아 올라오면 알려주쇼.”
“이 녀석. 아무리 그래도 도인이 되어서 야화첩이라니. 너는 언제 철이 들려고 그러느냐?”
“뒤진 도인이 야화첩 좀 본다고 뭐 탈 날 거 있나? 안 그래도 한 권뿐이라 달달 외다 못해 내가 그릴 판인디. 소소한 취미 정도 가지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쇼.”
무령의 핀잔에 각령이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잠깐만, 각령. 가지 마라.”
“아 왜요. 잔소리는 그만하면 됐잖습니까?”
“이리 와봐라.”
“됐네요. 난 가서 화첩이나 볼랍니다. 아가 걱정되면 내려가서 엉덩이라도 받쳐주시든가. 아는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 탈 납디다.”
“그러니까 돌아보래도.”
각령은 귀찮다는 듯 뒤로 손을 휘휘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도 그를 붙잡는 낯선 손길에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 올라 왔습니다, 사숙. 다음은 뭡니까?”
분명 만장단애의 밑바닥까지 집어던졌던 금태양이 어느새 올라와 제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저를 붙잡고 있었으니까.
“……엥.”
“그러니까 좀 돌아보래도.”
무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죽은 귀신이 오늘 하루만 세 번이나 놀라는 바람에 없는 간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처음 한 번은 귀한 전승자가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번은 겨우 데려온 전승자를 각령이 만장단애에 던져버렸을 때. 그리고 겨우 반 각도 안 되는 시간에 그 전승자가 만장단애를 기어 올라오는 데 성공한 지금이 바로 세 번째다.
“아니, 어찌? 내가 뭐 실수했나? 우리 조카님이 현세에서 벽타기 장인이거나 그런 건가? 홍령에게 배워서 의원을 한다고 들었는디?!”
“벽 타기 장인은 아니고 의원을 하는 것도 맞습니다만, 벽타기 또한 홍령에게 배웠습니다.”
금태양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다시 포권을 취했다.
내던져졌을 때는 순간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착하기 좋은 바위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반대쪽으로 장력을 발출해 절벽에 달라붙은 후 타고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경혈을 열고 무공이라는 것을 익히기 시작했을 때 홍령이 제일 강조한 수련이 절벽타기였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을 뿐.
“그땐 몰랐는데, 확실히 이런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면 절벽타기가 기본 중 기본이긴 하겠네요.”
게다가 몸이 가벼웠다. 가뿐했다!
육신이 없고 혼만 있는 상태이니 가벼운 건 당연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육체의 족쇄 없이 자유로이 움직인다는 것은 남다른 쾌감이었다.
어떤 것들은 없어야 후회하고 고마운 줄을 깨닫게 된다는데 금태양의 경우는 반대였다.
그 정도도 충분히 살 만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보통 사람의 컨디션은 된다고 자부했건만 모든 제약을 벗어난 영혼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으흐흐, 흐흐, 으하하핫! 그러취! 그치! 홍령 그 녀석이 허투루 가르쳤을 리가 없지! 으하하하!”
각령은 한참 동안 눈물이 날 정도로 배를 잡고 웃어댔다. 무척이나 유쾌한 웃음이었다.
“이야, 사형! 이거 잘만 하면 우리 조카님 대에 화산이 중원 제패를 할 수 있을지도요? 아니면 그 뭐야, 천하, 천외, 그 뭐지?”
“천하제일인 말이냐.”
“그래요, 그거! 으하하! 화산이 천하제일인을 내는 거 아닙니까?”
“호들갑은 적당히 하거라. 언제부터 화산이 그런 것에 욕심을 내었다고.”
“아, 왜요! 거 무인이 검을 들었음 천하제일인 정도 노려볼 수 있는 거지. 안 그런가, 조카님?”
“천하제일인까진 아니어도, 억울하게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면 좋겠죠.”
금태양의 말에 각령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금태양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다 좋은데 표정이 영 아녀. 웃어! 우리도 웃는데, 조카님이 벌써 세상 부조리는 다 짊어진 표정을 짓고 있어?”
“……!”
확실히 그랬다. 지금은 이처럼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재현한 곳이다. 모든 것이 죽어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된 곳. 그곳에서 이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금태양에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실력을 쌓는다 해도, 심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돌아가 영육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해 주화입마에 들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쉼을 권한 것이야.”
“듣지 마, 듣지 마. 사형 같은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달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좀 움직이고! 돌 같은 것도 좀 부수고! 빡세게 몸을 굴리면서 가라앉히기도 한다고. 구르다 보면 다 정리되는 법입니다. 이야, 우리 조카님의 필요와 욕구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니 어찌 이보다 더 좋을까? 좋다! 이 각령, 사매 홍령의 이름을 걸고 조카님을 천하 제일인까진 아니어도 어디 가 꿀리지 않을 정도로는 굴려주마!”
“후우, 마음대로 해라.”
각령의 당당한 선언에 무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괜찮다. 내게 얘기하면 되니 각령의 눈치를 보지 말거라.”
“눈치는! 사형은 가끔 나를 눈치도 없는 머저리로 보는데 말입니다? 내가 이번에 그 인식을 확 바꿔 버릴 테니까 말이오!”
“그러니까 도인이 그런 험한 말을 쓰면 안 된다고― 하아, 아니지. 그래. 마음대로 하거라.”
무령이 손을 휘휘 내젓고는 자리를 떴다. 각령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금태양의 두 손을 맞잡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함 해보까?”
* * *
육신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입에서 단내가 날 수 있을까?
“허억, 허억…….”
“조카님, 힘들어? 그만할까?”
“아닙니다. 반 각만 쉬었다가, 꿀꺽, 계속하시죠.”
수련을 받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든 건 사실이었다. 우리는 먹거나 자지 않아도 지치거나 쓰러지지 않는 상태였고 각령은 그것을 기반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뭔가에 몰두해 본 것은 이곳 중원에 태어나서는 처음이었다. 그간 내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투병뿐이었으니까.
“자, 그럼 오늘은 여기 있는 무공서를 다 읽어보자! 이해 안 가는 거 있으면 물어볼 것! 다 본 다음에는 연무장에 가서 전부 몸으로 복습할 거다, 시작!”
각령의 주도하에 나는 화산의 모든 것을 제약 없이 흡수했다. 원래대로라면 장문제자나 후대를 이끌어갈 매화검수에게만 전수된다는 무공도, 장문인이 이곳에 와서야 겨우 완성했다는 비전도, 그리고 이미 선인이 되어 현세와는 먼 존재가 되었다는 화산 시조의 심득까지도 모두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하루가 갈수록 달라졌다.
“이해력이 나쁘지 않아. 뭐, 이해력이 좀 달려도 시간은 무한히 있으니까. 이해가 안 가? 그럼 될 때까지 하면 되지!”
돌에 문자를 새기면 천 년을 간다는 투의 말을 하며 각령이 신나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의 몸놀림에 맞춰 새로 받은 검을 휘둘렀다. 낭창낭창한 검은 유려하게 휘어지다가도 이내 꼿꼿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했다.
그 검에는 홍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무한히 시간을 낼 수는 없어요.”
이곳에는 몇 자루의 검이 주인 없이 남겨져 있었다. 그 순간 미련 없이 죽음으로 떠난 이들은 이곳에 오지 않았고 그들의 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아직 이름을 새긴 검이 있는 이들은 미련이 남아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라고 했다.
홍령과 화령, 그 두 자루 중 한 자루가 이곳에서 나의 검이 되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현세에서의 시간은 이제 겨우 찰나가 지났을 뿐이란다.”
적어도 백 일의 시간이 지난 거 같았는데 현세에서는 겨우 찰나란다. 압도적인 시간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정확히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의 시간은 그저 그 사람의 인식에 따라 달리 흐른다. 네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천 년도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무령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호접지몽과 같았다. 나비의 일생을 살았으나 찰나의 꿈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은 하덜덜 말고 모든 것을 수련에 쏟아! 둔재도 천 년이면 천하 고수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너라면 더할 나위 없지! 자, 또 가자! 이번에는 화영난무다!”
“예!”
처음에는 오로지 수련, 수련, 그러다 공부, 그리고 다시 수련의 반복이었지만 그것이 삼 년이 지나자 화산에서의 나의 일상도 조금은 변화했다. 각령 사숙이 말했듯, 몸을 바쁘게 굴리다 보니 과연 처음의 원념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어느덧 나는 이곳에서 일상을 살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수련을 하고 장문인의 독경을 들었으며 점심나절이면 차사를 이리저리 골탕 먹이다 교대를 하고 돌아온 사숙, 사고와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했다.
밤이면 그들에게 술잔을 받으며 그 시절의 화산이 어땠는지, 홍령은 어떤 아이였고 또 어떤 무인이었으며 얼마나 훌륭한 무인이었는지를 들었다.
나도 질세라 귀신으로서의 홍령이 어떤지 늘어놓았다. 그러면 모두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닥을 쳤다. 왁자지껄 시간을 보내고 사숙고들이 잠이 들면 나와 새벽녘까지 수련을 하다가 다시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데, 어쩌면 그런 시간에 수련을 하는 것이 더 이득일 텐데도 나는 그러한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장문인이 독경하는 경전의 구절이 퍼뜩 이해가 가고, 그 깨달음이 검에 닿았다.
그렇게, 나는 화산에서 스무 번째 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