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어디선가 금동이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부유하는 수초처럼 멍한 상태로 흐릿해지는 울음소리에서 멀어졌다. 무엇 하나 지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떤 상념만이 내 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 이게 약하다는 거였지.
사람은 항상 약자이지만은 않다. 공사장에서 제일 시다 노릇을 하는 인부도 집에 돌아가면 왕처럼 군림하곤 한다. 전생의 나는 적잖은 권력을 쥐었지만 본부장과 회장일가 앞에서는 노예나 다름없었다.
비참함은 약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나보다 강한 자가 내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짓뭉갤 때, 그 상황에 찍소리조차 하지 못할 때. 비참함은 패배 그 자체보다 그 부조리한 압력에 찍소리도 못할 때 찾아온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간다. 인생은 원래 운명 앞에 비참해질 수밖에 없기에 사람은 어느 정도의 비참함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있다.
비참함 그 이상의 감정은 찍소리라도 내본 사람에게 찾아온다. 순응하지 않고 발악했을 때, 참지 않고 덤볐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넘기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의 약함을 비관하게 된다.
옳음 이전에 그 무엇보다 강함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된다.
젊은 시절에 옳은 가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이들이 나이를 먹고 정치를 하며 변절하는 것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기분을 느끼고 있다.
최선을 다해 아기와 산모를 살렸지만 내가 살린 것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낌새를 알아차리고 달려갔지만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아픈 몸이 아니라 수련에 열중할 수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져 그 자리의 사람들을 한 마디로 끌고 갈 수 있었더라면―
끝없는 후회가 비참함에 절여져 생각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저갱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그때.
터벅, 터벅―
누군가가 무심히 산길을 걷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봄이 가면 꽃이 지고 가지엔 잎이 무성하네, 꽃 진 가지 열매 맺어 가을이면 노랗게 영그니, 꽃도 가고 잎도 가고 열매도 간 자리에 허망함만 남누나―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그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시금 눈이 나려 붉은 매화가 움트니, 꽃 진 가지는 봄이 온다는 약속이렷다―
그 노래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그에게 업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조금씩 돌아오는 감각.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확인했다.
맑은 하늘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고 구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싱그러운 풀냄새와 흙의 냄새 사이로 짙은 꽃향기가 났다.
“정신이 들었구나. 아름답지 않느냐?”
나를 업고 있던 이가 말을 걸었다.
“……예, 아름답네요.”
그자의 말대로 이곳은 아름다웠다. 깎아지른 절벽마다 붉은 매화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바람은 기분 좋게 속살거렸고 새와 나비, 벌 등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꽃과 꽃 사이를 오고 갔다.
천국이나 무릉도원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여긴 어딥니까? 내가 죽었습니까? 분명 나는 관자재암에 있었는데.”
모든 감각이 단절되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 순간과 달리 지금 내 몸은 멀쩡했다. 감각이 흐려지기는커녕 모든 것이 또렷했고, 죽기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통증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허벅지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댔으나 이어지는 통증도 묻어나오는 피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죽은 걸까.
“아니, 너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지.”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겠지만, 사제들도 그렇고 사숙들께서도 어찌나 노발대발을 하시던지. 겨우 얻은 전승자가 그깟 일로 삼도천을 건너게 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하.”
아아.
“해서 우리 중 일부는 차사를 쫓아내러 갔고, 또 일부는 너의 육신을 살피러 갔다. 아직 영육이 온전히 분리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바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는 아니거든. 삿된 것들이 들지 못하게 막는 동안 그 끈을 단단히 연결해보려 한단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만난 이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리만큼 다정했고 또한 평온했다. 낯선 이의 등에서 이처럼 안락함을 느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구나, 이곳은……
“이곳은 화산입니까?”
“화산이지만, 화산이 아니기도 하지.”
그야 그럴 것이다. 진짜 화산은 삶이 존재하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다고 했으니까. 이곳은 화산을 재현한 신선의 땅 같은 곳일 거다.
“안타깝게도 선계는 아니다. 그런 곳은 우리처럼 도를 얻지 못한 이들이 가기에는 너무나 맑고 정결한 곳이지. 허나 그곳에 계신 우리의 선조들께서 우리를 안타까워하심에 이런 곳을 마련해주셨다. 쌓인 한과 분을 풀어낸 후 천천히 가라고 말이다. 생전의 화산과 상당히 흡사하지만 다른 점도 많지.”
마침내 그가 어딘가 목적지에 도착해 나를 내려주었다. 아담하고 고아한 전각들이 늘어져 있고 구석에 연무장도 보였다. 한 늙은 도인이 하늘 아래 절경을 보며 경전을 읊다가 이를 멈추고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홍령의 아해가 왔느냐.”
“예, 사부님. 그 아이입니다.”
“과연. 각령이 말하였던 것처럼 생사의 경계가 없구나. 죽을 명도 살 명도 정해지지 않아 운명에서 자유로우나, 때가 아닌 죽음이 닥쳐도 이를 받아들여야 하고 고통뿐인 삶이라도 이를 살아야 하리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은 나의 운명에 대해 논하면서도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해야, 이리 가까이 오거라.”
내가 다가가자 도인은 자신의 옆에 앉으라며 가리켰다. 그 자리에 앉자 화산 아닌 화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답지 않느냐.”
“예,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화산이란다. 여기 있는 동안 눈에 담고, 마음에 담은 후 돌아가거라.”
“저기, 그 말씀은―.”
“너를 현세로 돌려보내기 위해 혼만 남은 이들이 애쓰고 있으니, 푹 쉬었다가 돌아가라는 말이다. 정처 없는 운명에겐 필시 혼란이 따르는 법이다. 이처럼 마음을 놓을 일도 잘 없을 테니 이 기회에 마음을 정결히 하거라.”
도인의 말에 나를 업고 왔던 이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사부님. 그 말씀은 생전 저희도 잘 따르지 못했는데, 이처럼 혈기왕성한 나이의 아해가 잘도 그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너희는 스무 해가 더 지나도 내 말에 고분고분하질 않구나. 하필 고렇게 팔팔할 나이에 죽어선, 쯧.”
이미 죽은 이들의 블랙조크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음 편히 있으라니, 이런 상황에서 따라 웃어야 할지 장례식처럼 표정을 굳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질 않았느냐? 차사를 쫓아낸답시고 나섰다가 괜히 망령 취급을 받아 붙들려 가지는 않을지, 원.”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저희 모두 생전의 실력을 그대로 갖고 오지 않았습니까. 분명 잘 처리하고 올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별 걱정이 없지.”
도인은 다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독경을 읊기 시작했다. 나는 도인에게 인사를 하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님도 뵈었으니 이곳을 소개해 주마. 먹고 자지 않아도 죽음이 다시 올 일이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현세의 생활을 버리기는 어려운 법이지. 있을 것은 다 있단다.”
“저기, 그 이전에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나를 데리고 화산파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려던 이는 멈칫하더니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하, 내가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구나. 사제들만 들떠 있다고 할 게 아니었군. 나는 무령이라 한다. 네가 알고 있는 그 홍령의 사형이니라.”
사형제가 아닌 사제라고 지칭하는 걸 보니 이 무령이라는 도인이 그 배분의 대사형인 모양이다.
“다시금 인사드립니다.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그래. 오래지 않아 돌아가게 되겠지만 그동안 잘 부탁한다. 어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 얼추 현세의 화산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지금은 볼 수 없는 명소가 가득하단다.”
이제는 사라진 화산의 명소들. 홍령이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얘기해대서 이제는 지긋지긋할 지경이었지만 그중에서 설명만 들어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긴 했다.
절벽의 잔도를 통해야만 갈 수 있는 길, 깊은 계곡 아래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연못, 유리와 같은 종유석이 반짝인다는 비동 등…….
그러나 내가 지금 가보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다.
“연무장도 있지요?”
“음? 그렇지. 연무장 또한 우리가 쓰던 그대로 존재한단다.”
“그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무령은 숱한 명소를 두고 내가 왜 흔한 연무장에 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지만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화산의 이모저모에 대해 홍령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 가장 여운이 남는 얘기는 단연 연무장에 관한 얘기였다.
그곳에 진정한 화산이 있다.
홍령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그것이 있었다.
연무장 바닥은 물론, 그 주변의 바닥과 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검흔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바닥의 검흔을 손으로 쓸었다.
“서툰 연습의 흔적을 그리 주의 깊게 보다니, 부끄럽구나.”
“서툴다니요. 아닙니다. 강해지기 위한 과정이 아닙니까.”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저도 할 수 있습니까?”
“음?”
“저도 이곳에서 검을 수련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무령의 앞에 섰다. 홍령을 사부로 친다면 무령은 내게 사숙이 되겠지.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아해야.”
“생전의 무위를 그대로 갖고 오셨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수련도 현세로 돌아가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단다. 이곳에서의 수련을 너의 육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그래도 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현세였다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을 것이다.
“쉼은 필요 없습니다. 검을 갈고 닦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화산의 무공을, 이곳이 아니면 익힐 수 없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화산을 향해 구배지례를 올렸으니 또다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각오가 그랬다. 다시는 그런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비참함 그 이상 가는 참담함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은 한 생애에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억울함은 고된 수련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허나 억울함만으로 잡은 검은 종래 자신을 해치는 법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푹 쉬었다가 돌아가거라.”
무령이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무릎을 꿇은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현세로 돌아가 화산의 대를 이을지 안 이을지는 내게 달려 있다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가르쳐 주진 않아도 나 스스로 익히고 수련하는 건 막지 말라고만 할까?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 누군가의 경쾌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에이, 사형.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마소. 우리가 그거 가르친다고 뭐 밑지나? 오히려 뭐라도 좀 더 배우고 가달라고 온 화산이 무릎 꿇고 사정해야 할 판 아잉교? 아따, 네가 태양이냐? 듣던 대로 잘생겼구마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