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모용갑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발 늦게 알아차렸나 보지?
녀석은 내 허벅지에서 거칠게 검을 뽑아내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번 드러난 정체가 숨겨질 리 없다.
“요녕의 모용세가?”
“저자가 모용갑―!”
양원과 양진이 이미 그의 얼굴을 봤다. 제갈다영은 거리가 있는 데다 여러 적에게 둘러싸여 이쪽을 보진 못했지만 내 목소리를 들은 듯 자꾸 이쪽을 힐끔거렸다.
“같잖은 수작을!”
나는 허벅지의 출혈을 지혈하며 녀석의 검을 피했다. 분노로 거칠어진 녀석의 검은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점혈이 듣지 않는다.
어째서? 당황할 새도 없었다. 녀석의 검은 궤적이 거칠어 알아보기 쉬웠지만 그만큼 폭풍 같은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그에 더해 하나같이 급소만 노렸다. 칼끝에 귀 끝이 뜯기고 가슴께의 옷자락이 잘려 실밥이 너풀거렸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한순간 가무러졌고 쩌걱 소리와 함께 얼굴이 화끈해지고, 시각이 넓어졌다.
대각선으로 잘린 가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시 봐도 토 나올 거 같은 얼굴이라니까. 병신 같은 새끼.”
모용갑이 저벅저벅 걸어와 바닥에 떨어진 내 가면을 쥐고 제 얼굴을 가렸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얼굴임에도 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찝찝했던 걸까?
“백귀단은 들어라. 계획 변경이다!”
녀석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칼을 휘두르던 백의인들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 이름을 들은 자, 내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인다. 그 어떤 것에 해당이 없어도 죽인다. 목표인 애새끼들만 빼고, 전부 죽여!”
“존명!”
모용갑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외치자 백귀단이 다시 움직였다. 아까도 검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지만, 모용갑의 명령이 떨어진 직후 그들은 그야말로 수라나 야차와 같았다. 양원과 양진에게도 각기 상대하는 자가 대여섯씩 붙었다. 그저 방해를 하지 못하게 막는 움직임과 상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겠다는 움직임은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 뻥뻥 치더니, 고작 칼 한 방 맞았다고 무릎을 꿇나? 시시한 새끼.”
지속되는 출혈에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못해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어째서 점혈이 듣지 않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과한 출혈보다 내부 기의 흐름이 문제였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처럼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조금씩 더 욕심을 부려, 무림인처럼 날뛰었던 게 문제였을까.
두 팔의 경혈은 비명을 질렀고 백회부터 흘러내려 가는 중맥은 비비 꼬이는 느낌이 났다.
“윽―, 쿨럭! 컥!”
필사적으로 녀석의 공격을 피했지만 결국 강한 발차기가 명치에 꽂혔다.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걸로도 모자라, 녀석은 다가와 바닥에 쓰러진 나를 자근자근 짓밟았다.
“그렇다고 시시하게 죽일 순 없지. 자, 봐라. 눈 뜨고 봐! 네까짓 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렀는지!”
눈을 떠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녀석이 내 눈앞에 콱 내리박은 검 때문에 눈가가 베였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에 시야가 더욱 붉어졌다. 손도 화끈했다. 머릿속이 멍해서 감각이 한 발짝 늦었다. 눈에 힘을 주어 고인 핏방울을 흘려버리고 나서야 나는 모용갑의 검이 내 오른손을 꿰뚫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 모두 죽어 나갈 거지만, 단 한 사람, 네놈 하나는 살아날 거다. 오로지 살아 있게만 해주마. 참으로 진부하지, 그렇지? 하지만 아버지는 말하셨지. 제대로 된 복수는 원래 진부한 법이라고 말이야.”
녀석이 또 한 번 명치를 걷어차고 나는 거칠게 기침을 했다.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멀리서 양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양진의 앙칼진 외침이 멀어졌다. 제갈다영은?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래선 안 돼, 이렇게 넋 놓고 쓰러져 있을 수는―
서걱―
“아악!”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도 기어가려 하다니. 진짜 지긋지긋한 놈이군. 안심해라. 네놈의 같잖은 양심이 울며불며 빌어도 꼼짝도 못 하게 손을 잘라 버렸으니.”
죽을듯한 통증 속에서 이십여 년을 보냈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손목에 불이 붙은 건가? 뜨겁다. 불을 끄고 싶은데 손이 닿지 않았다. 내겐 손이 없었다.
내 양 손이 희멀건 시야 앞에서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져 있었다.
“으음, 그래도 화근은 그냥 두는 게 아닌데.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근데 눈이 맛이 갔는데? 좋아, 네놈이 정신을 차리면 끌고 가고 이 자리에서 죽으면 시신은 그냥 둬 주지. 근데 웬만해선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너한테는 편할 거야. 그치?”
녀석의 목소리가 머나먼 저편에서 들리는 것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암전.
* * *
그때, 그들은 관자재암에서 두 봉우리 정도 떨어진 작은 암자에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깨끗하게 민 머리에는 주름이 졌고 거뭇하던 모근마저 새하얗게 샌 두 명의 비구승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벌써 볼일이 끝나셨는가?”
“뭐, 그런 셈이지.”
놀랍게도 두 승려는 똑같이 생겼다. 키도 같고 생김새도 같았다. 그를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아니, 추명스님이?! 어째서 두 분?!”하며 화들짝 놀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중 한 명만이 확실하게 아미의 승려였고, 다른 하나는 승려는커녕 불자가 될 가능성이라곤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가짜’가 입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이 어찌나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는지. 나는 이번에도 그냥 구경이나 했지, 홀홀. 자네가 얼굴을 빌려줘서 의심도 덜 산 거 같고 말이야.”
그래도 그 눈치 빠른 도련님은 ‘혹시?’하는 눈으로 자신을 종종 쳐다보곤 했지만 말이다.
“머리가 하도 빠져서 아예 밀어버렸더니, 이렇게 쓸 일이 있구만.”
은 파파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매끈한 머리를 어색하게 쓸어보았다.
“가발도 쓰기 편하니 더할 나위 없으시겠구려.”
“그러게 말이야. 임자는 수행은 다 끝나셨고?”
“수행이야 항상 하는 것이지요.”
“홀홀, 괜한 것을 물었구만. 그러면 이제 관자재암으로 돌아가면 될―.”
봇짐에서 가발을 꺼내려던 은 파파의 몸이 움찔했다.
“시주, 왜 그러시는지?”
“아무래도 그때가 지금이 아닌 거 같구만.”
그 순간 은 파파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바람처럼 왔다 가는 이지만 그처럼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추명은 은 파파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눈을 토끼같이 떴다. 그리고는 그가 사라진 방향, 그 끝에 자리한 관자재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 아미타불…….”
* * *
금태양이 떠난 연등회전은 다소 심심하게 끝이 났다. 당씨 형제의 위력을 본 대부분의 참가자가 기권을 선언한 탓이었다. 얻을 수 있는 명성과 돈은 보잘것없는데 이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이 자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이들만이 비무대에 올랐다.
그게 바로 당당이었다.
“어깨 펴. 저놈들과 너를 비교하지 마.”
“넌 저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하니까.”
당당은 금태양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같이 비무대에 선 창천이 거슬린다고, 마음은 이해하지만(이런 말을 덧붙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창천은 자신이 충분히 배려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만 좀 하라고 한마디 할 정도였다.
다섯 개의 경기가 하나로 줄어 볼륨은 심심해졌지만 그 싸움은 결코 심심하지 않았다.
당 씨 형제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내보였고 살수도 거리끼지 않았다. 창천이 제법 실력을 발휘했지만 당 씨 형제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당당이 보조를 맞춰도 불리한 형국이 이어졌다. 날 때부터 함께였던 쌍둥이를 합격으로 이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 창천! 정신 차리셈!”
싸움이 보다 심심해진 것은 당철의 독에 결국 창천이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 씨 형제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심심하고 또 시시했다. 창천과 당당은 어차피 쓰러질 예정이었고 사람들은 당당이 당 씨 형제의 동생이기 때문에 완전히 쓰러지는 데 시간이 소요될 거라 예상했다. 누군가가 지루해 하품을 했다.
당당의 눈빛이 돌변한 건 그때다.
창천이 쓰러지자 그는 제 상처를 다시금 베어내어 그의 입에 제 피를 흘려 넣었고, 그가 충분히 이를 삼킨 걸 확인하자 곧바로 일어나 제 형제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꼴을 우습게 여기며 킬킬대던 형제는 당황했다.
그들의 동생이 이렇게 자신들에게 덤빈 적이 있었던가?
구경꾼들에겐 그저 뻔하게, 악에 받친 이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덤벼든 것으로 보였지만 형제에겐 아니었다.
한 수 한 수가 그들 합격의 흐름을 끊었다. 공격은 무색해졌고 방어는 무의미했다.
당랑이 자랑하던 암기는 모든 궤적을 읽혔다. 당철의 독은 당당에게만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당당은 그들과 함께 자랐다.
다른 것을 배웠지만 그 무공의 근간에는 사천당가의 암기술이 있었고, 당가의 피는 그에게도 공평한 독 내성을 내려주었다.
다른 누구라면 모를까, 사천당가를 상대함에 있어서만큼은 당당을 따라올 자가 없다.
그 사실을, 당당 스스로가 이제 겨우 알았을 뿐이다.
“네, 네놈이 어떻, 게―.”
당철은 당당의 몸에 부딪쳐 비무대에서 떨어졌다. 당랑은 자신이 쏘아 보낸 손톱이 되돌아와 눈알에 박혀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거칠게 뜯어진 손톱은 끄집어내려 할수록 눈알을 파고들었다.
당랑이 피눈물을 흘리며 악을 썼다.
싸움의 승자는 당당이었고, 이 사실을 가장 믿을 수 없었던 건 그 자신이었다.
사람들은 의외의 결과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박수를 쳤다. 당철의 독을 두려워해 자리를 뜬 이들이 많았기에 박수 소리는 작았다.
그렇다고 당당이 이겼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원래도 소박했는데 처음보다 더 소박해진 연등회전의 대회장 불빛 사이로 어스름한 무언가가 물속에서 허우적대듯 다가왔다.
그것은 귀신이었다.
“모두들 수고가 많았구료. 이번 연등회전의 승자는―.”
비무대 위에 올라 허무하게 끝난 연등회전의 결과를 입에 담으려던 소림방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허공을 보았다.
[관자재ㅇ…… 혈겁…… 사람들과, 그 사, 람을 구해 주…….]
해로운 존재다 하여 귀신을 지우는 부적을 쥐여 주었는데, 정작 귀신은 귀기를 다 잃은 채로 여기까지 날아와 누군가의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그자의 말대로, 이 귀신은 실로 그를 위한 넋이란 말인가?
“방장스님, 마저 진행하셔야―.”
허나 소림 방장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주름진 눈에 힘이 들어갔다.
“현금. 현금 있는가!”
“예, 여기 있습니다. 방장스님.”
무승 현금이 소림방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금 당장 관자재암으로 가거라. 아니다, 나도 가마.”
“모, 모두 관자재암으로!”
방장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소림승이 관자재암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숫자가 화려하던 과거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었지만, 회색 가사들이 한순간 날리며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분명 장관이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소림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