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시간을 조금 돌려서, 관자재암.
그곳에선 일찍 몸을 풀어 거동이 가능해진 산모들을 위한 연등회가 한창이었다.
“예쁘다~”
“이건 딱 봐도 야무진 게 양원스님 작품이네.”
“그럼 이 서툰 건 양진스님이겠네요?”
“그렇지. 딱 봐도 티가 나잖아. 사람의 성품이라는 게 다 손 끝에 나타난다니까? 전병을 잘 빚으면 고운 애기를 낳는단 말도 있잖아?”
산모들은 아미승들이 일 년간 만들어둔 연등들을 보며 화기애애하게 수다 꽃을 피웠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아이를 돌보느라 이럴 시간도 없었겠지만, 이번 년도 연등회의 관자재암엔 산파와 보모, 그리고 잔일을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서 이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 야무지게 만든 게 내 작품이고, 저 조잡한 게 사저 작품이라네요.”
“어머낫, 스님!”
“아니, 우리가 스님들 흉을 보려던 건 아니고요―.”
“됐어요. 이 산속에서 사람들 흉보는 거 말고 할 게 있나요. 관세음보살께서도 그 정도는 중생들이 그럼 그렇지 하고 다 넘어가신답니다.”
양진의 넉살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다. 흉을 본다고 해도 뭐 대단한 흉도 아니다. 그 정도로 아물지 않은 상처의 고통이 잊힌다면야 그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양진이었다.
“아유, 스님이 또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좀 뭣하지.”
“다른 얘기 하시면 되죠. 여기 관자재암 스님 중에서 누가 제일 예쁜가 이런 거.”
“에이, 스님도! 그거야 얘깃거리가 안 되잖아요!”
“왜 안 돼요? 너무 못생겨서?”
“무슨 소리세요! 당연히 예뻐서죠!”
“그렇지, 두 스님 다 예쁘다니까. 출가 전에는 아마 사내들 꽤나 울렸을 거야. 그렇죠?”
산모들이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양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머리를 밀었다 뿐이지 양원은 고아한 전통미인의 상이고 양진은 다소 발랄한 느낌의 미녀다. 그 미모 때문에 속세의 유혹도 꽤나 잦았다.
“울리긴 꽤 울렸죠. 제가 가랑이차기를 좀 잘했거든요.”
“어머나 세상에!”
“스님도, 참!”
“실은 저나 사저나 어릴 때 입문해서요. 여러분이 물어보시는 그런 쪽의 일은 거의 없었어요.”
몇몇 산모들이 아이고 아까워라,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출가한 스님에게 더 이상 그런 일을 물어보는 것은 실례다. 이들의 화제는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말이에요, 스님. 그 소문은 진짠가요?”
“뭐가요?”
“왜 그분 있잖아요. 그 가면 쓴 의원님!”
“금 의원님이요?”
“엄청나게 미남이라면서요?”
“아니라니까요. 엄청 추남이라 가리고 있는 걸 거예요. 안 그래요?”
누군가의 물음에 몇몇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놀 것이 없는 이곳에서 가면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금태양은 좋은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뻔하다면 뻔하게도, 그가 눈이 부실 정도의 미남이라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 아니면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정도의 추남이라 얼굴을 가리는지 여부를 두고 제법 팽팽한 신경전이 오고 간 모양이다.
“양진 스님은 아시죠? 그분이랑 친하시잖아요.”
“보셨어요, 맨얼굴?”
“제발 알려 주세요~ 궁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에요~”
속세의 여인들이란 어쩜 이렇게 남자의 얼굴에 관심이 많은지. 양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굳이 말한다면 좀 잘생긴 쪽?”
“거봐! 양진 스님은 봤을 거랬잖아!”
“엄청 잘생겼다기보단, 좀 평범한 듯한데 은근히 눈길이 간달까요. 오래 보고 있어도 크게 질리지 않을 거 같달까. 들꽃 같달까.”
“에이, 스님. 뻥 아니에요? 그런 얼굴을 뭐하러 가리고 다녀요?”
“앗, 들켰네. 티 났어요?”
“스님~! 스님이 거짓말해도 돼요?”
“관세음보살께선 남의 흉 보는 건 물론 이 정도 거짓말은 좀 봐주신답니다. 중생들이 다 그렇죠.”
그게 뭐 그리 웃기다고 사람들은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별 재밌는 게 없는 산 속에서, 한밤중에 연등에 불을 붙여놓고 가볍게 먹고 마시며 하는 얘기는 시답잖은 것도 다 재밌는 법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양진이 진짜 재밌는 얘기를 무심하게 툭 던졌다.
“근데 몸은 좋더라고요. 이건 진짜. 내가 봤어요.”
“어머어머!”
“스님, 어휴, 스님이 그런 걸 보셨어요?!”
“보면 어때서요? 수술하고 옷 갈아입는 거 몇 번을 봤는데.”
적당히 마른 등판에 잔 근육이 도드라진 등과 매끄럽게 척추를 타고 내려가며 패인 깊은 골까지. 부처님의 가사를 벗기면 딱 그런 등짝이 나올까 싶은 모양새.
몇 번이나 꿈에 나왔기 때문에 이제 양진은 금태양의 뒤태를 안 보고도 그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남사스러워~!”
“스님도 참!”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들 떠시긴.”
양진은 사람들을 장난스럽게 손가락질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과 어울려주는 건 이 정도 하고 이제 다시 강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유, 그치만 못 믿겠는데. 그 의원님 겉으로만 봐도 팔다리가 낭창낭창한 게, 어딜 봐서 힘을 쓸 몸이에요?”
“저기 오니까 가서 물어보시든가요.”
그래도 불자가 이성의 몸에 대해서 조목조목 이랬네 저랬네 짚어줄 수도 없었기에, 양진은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금태양을 가리켰다.
저거 봐, 저렇게 뛰려면 다릿심도 적잖이 있는 거라고. 꼭 사람을 벗겨봐야만 아나?
비록 하반신을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근육이 도드라지던 금태양의 등짝을 생각하면 다리도 제법 보기 좋게 근육이 붙었을 게 뻔했다.
그런 근육을 있는 대로 불태우며 금태양이 한달음에 자신의 앞에 달려와 그 자리에 멈춰섰다.
* * *
“헤엑, 헥…… 여기 무슨 일 없…… 후우…….”
“별일 없는데, 왜 그러세요? 무슨 일?”
“별일 없으면 됐고, 하아―, 왜 이렇게 숨이 차지?”
“뭔데요. 소림에 볼 일 있다고 인사도 안 하고 가더니 갑자기 왜 돌아왔어요? 사저가 며칠은 있다가 올 거라고 그러던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나는 숨을 고르며 관자재암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연등과 작은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
그 외의 기척은 없다.
“여기 뭐 수상한 사람이 오고, 그러진 않았습니까?”
“전혀요. 수상쩍기로 따지자면 며칠 후에나 온다더니 지금 온 금 의원님이 젤 수상쩍네요.”
피이익―!
그때 한편에서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고 나와 양진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앙―!
높은 소리를 내며 올라간 것은 불꽃이었다. 작게 터진 불꽃은 검은 하늘에서 흰 빛으로 잠깐 빛났다 이내 사라졌다.
“뭐지? 연등회에서 불꽃을 다 터트리네요. 우리한테는 맨날 돈 없다고 하더니, 이번에 어디서 후원을 많이 받았나?”
그래, 별일이 없다면 다행인 거지. 괜히 의심병이 돋았나 보다. 홍령이 없어서 너무 예민해졌던 걸까?
하지만 모용을 녀석도 내 의심을 뒷받침해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잘 모르면서 괜히 말 한마디 얹은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강당 뒤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관자재암을 뒤엎었다.
“저게 무슨, 금 의원님! 같이 가요!”
한 발짝 늦은 양진이 따라왔지만 나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달리며 품에 든 태양보도를 뽑아 집어던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옷을 입은 백의인이 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챙―!
“웬 놈이냐!”
“사, 사람 살ㄹ―.”
나는 답하지 않고 곧장 그 사이로 뛰어들어 한 바퀴 돌며 녀석의 중단을 걷어찼다. 발차기는 상대의 검에 막혔지만 놈을 여인에게서 떨어트리는 정도는 가능했다.
“양진스님 뛰어오는 거 보이죠. 빨리 그쪽으로 뛰어요!”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또 방해를, 하. 진짜 사사건건 거슬리네.”
여인이 도망치는 사이 나는 놈이 튕겨낸 태양보도를 회수해 단단히 쥐었다.
세모꼴의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껄이는 꼴을 보아하니, 놈이다.
모용갑이다.
“잡초는 초장에 삭초제근을 해야지. 이참에 네놈도 깔끔하게 처리해주마!”
놈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감히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몇 번은 흘려내고 몇 번은 막았지만 전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미친, 어디서 이런 힘이―.”
“하핫, 느껴지나? 느껴져?”
칼을 맞댄 채 힘으로 겨루는 데 놈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 자식이 이렇게까지 강했나? 객잔에서 검을 부딪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네놈의 실력을 보여준다며, 보여줘 봐! 날 한번 꺾어 봐!”
녀석이 힘주어 칼을 밀쳤다. 그 힘이 가공할 정도라 나는 몇 걸음을 빠르게 후퇴하며 그 힘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겨우 몇 합을 겨뤘을 뿐인데 내 옷자락은 여기저기가 잘려나갔고 피가 흐르는 생채기가 쓰렸다.
“사, 살인이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으아앙, 으아아앙!”
“내 아기는 안 돼, 안 돼! 으억!”
여기저기서 비명과 단말마,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폭풍처럼 뒤엉키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양진과 양원의 당황한 고함 소리도 들렸다. 제갈다영이 검을 뽑은 거 같았지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작았다. 이 거리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을 파육음만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질척하게 귀에 엉겨 붙었다.
“어딜!”
여기서 이 새끼를 상대할 때가 아니다,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가려는데 녀석이 한달음에 달라붙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가면 다 막을 수 있을 거 같나? 고작 네까짓 게?”
녀석의 벌건 눈 너머로 참상이 고스란히 눈에 박혔다.
어미는 심장에 칼이 박힌 채로도 아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배내옷을 잡고 늘어졌고 백의인은 그런 어미의 가슴을 발로 차 밀치고 아기를 거칠게 빼앗았다.
배내옷이 찢어진 채로 어미의 품에서 벗어난 아기가 졸도할 듯이 울었지만 백의인은 다른 동료에게 아기를 던져버리곤 다른 도망치는 다른 어미의 등에 칼을 휘둘렀다.
막을 수 없다.
모용갑의 검을 막아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녀석의 검은 그만큼 강맹했다. 한번 흘려낼 때마다 미처 흘려내지 못한 충격이 팔과 허리에 고스란히 충격으로 스며들었다.
딱 한 번, 공격을 감수하며 달려든다면 저기 내려치는 칼 아래 아기를 끌어안고 웅크린 여인 한 명이나 구할 수 있을까.
“빨리 죽여! 쓸데없는 놈들 신경 쓰지 말고 볼일만 봐! 나도 이거 빨리 처리하고 재미 좀 봐야겠다!”
모용갑의 외침에 양진, 양원과 제갈다영 등을 상대하던 백의인들마저 빠져나가 여인들을 학살하고 아기를 빼앗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우리를 죽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산모를 죽이고 아기를 빼앗은 후 도주하는 게 목적일 뿐.
그렇다면―
“이 새끼가?!”
모용갑의 검이 허벅지 깊숙이 박혔다. 상대의 검을 일시적으로 봉하는 가장 원시적인 하책(下策)이다. 체내의 근육과 지방이 검에 찰싹 달라붙어 검을 뽑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지.
나는 그대로 태양보도를 휘둘러, 녀석이 뒤집어쓴 세모꼴의 두건을 베어냈다.
맨얼굴이 드러난 녀석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겉보기엔 뼈를 내주고 웬 이상한 찌끄레기나 건진 것처럼 보이겠지.
“모용세가의 모용갑, 네놈이 흉수구나!”
하지만 얼굴을 감추고 지저분한 짓을 하는 놈들에게, 만천하에 정체가 드러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