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양양의 화산지회 예선 당시.
당당도 독을 썼다.
그래도 녀석은 정도란 게 있었다.
제때 해독하지 못하면 불구가 될 위험이 있었지만, 사실 화산지회쯤 되는 비무대회에 나오면서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나오는 무인이 어디 있겠는가.
당당이 독을 쓰는 것은 오직 비무대 위에서였고, 그마저도 살수는 펴지 않았다.
게다가 이 대회는 오로지 자신의 몸만 사용한다는 규칙이 있다.
상대는 독에 대한 대비는커녕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자신의 신체에서 발출하는 독이라지만―
“아미타불. 그가 목숨을 건졌는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온 이는 상석에 앉아 있던 소림 방장이었다.
“실격 처리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독을 썼는데요.”
대충 분위기로 봐서 넘어가기로 했다는 건 알지만 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아미타불. 그에게는 독 또한 신체의 일부니 어쩔 수가 없다네.”
“당가에서 뭐 크게 받으신 건 아니고요?”
“이봐!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소림 방장을 수행하는 승려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 별 말을 하진 않았다. 하여간 이런 건 전생이나 여기나 똑같다니까.
“목숨은 건진 듯합니다만 두 번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살아난 건 여기, 당가주의 셋째 당당이 자신의 피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당가의 식솔이 시합도 아니고, 남에게 피를 먹이다 과다출혈로 쓰러졌다는 말이 당가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적어도 저 형제가 살수를 쓰지 않겠다는 확답 정도는 받으셔야 할 겁니다.”
내 단호한 말에 소림 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형제의 태도로 봐서 당당이 과다출혈로 쓰러졌다 한들 당가주가 신경 쓸 거 같진 않지만, 소림 방장이 그걸 알 리가 없으니.
“안 그래도 그대를 보고 당가의 형제를 보러 갈 참이었네. 부처님의 도량에서 살인이 벌어지게 둘 수는 없으니.”
“이미 그럴 예정이셨다니 그건 다행이네요.”
한 번 더 비꼬았지만 소림 방장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일이 끝나면 한 번 보고 최근의 소문에 대해 물으려 했으나, 이리 만나게 되었으니 모쪼록 인사를 하겠네. 군주 마마와 아기님들을 구해 주어 고맙네. 무려 세쌍둥이시라지?”
굳이 그 일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는 걸 보면 그쪽에서도 제법 후원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
하아, 아니다.
섬서사변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느라 큰돈을 쓴댔으니 후원 한 푼이 아쉽겠지. 너무 고깝게 보지 말자.
“근데, 일이 끝나면 보려고 하셨다고요?”
“그렇다네. 관자재암의 일로 바쁜 이를 본승의 호기심을 위해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해서 연등회가 끝나고 모든 산모가 안정을 찾으면 돌아가기 전 한 번 그대를 만나 지난 얘기를 들으려 했다네. 헌데 연등지회에 참석한 것을 보니 관자재암의 일도 수월히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료.”
“그 얘기를 하자고 절 불러내신 게 아니고요?”
“음? 그것은 무슨 소리인고?”
소림 방장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뭐지? 소림 방장이 아니라면 누가 날, 그것도 방장을 사칭해서 불러낸 거지?
왜?
“헌데 그대의 곁에 느껴지던 음기가 옅어졌구료. 본승이 준 부적을 사용하였는가?”
“그건 아닙니다. 아, 그리고 그건 제게 해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득이 된다고 할 수 있죠.”
당황한 내게 방장이 홍령의 얘기를 꺼냈다. 이참에 제대로 얘기를 해 놔야지. 엄한 귀신(?)을 제령한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득이라. 세상을 떠난 넋이 현세의 존재에게 득을 베품이 어떤 뜻인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외다. 허면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미타불.”
소림 방장이 자리를 떴지만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소림 방장을 사칭해 나를 불러낸 일과 연관이 있는 거 같았다.
젠장, 이럴 때 홍령이 있으면 이상한 점을 좀 더 빨리 눈치챌 수 있을 텐데.
한 명이 생각하는 것과 두 명이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르니까.
……잠깐만. 두 명?
“금태양, 왜 그럼?”
“없어.”
“없음? 뭐가?”
되묻는 당당을 뒤로하고 나는 비무대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쪽엔 비무를 마치고 내려와 있는 당 씨 형제를 비롯해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서 있었다.
“아이, 그러지 말고. 갑이 어디 갔는지 그냥 슬쩍 흘려만 주면 된다니까? 우리 갑이가 내게 큰 오해를 해서 그것만 살짝 풀어주고 올 거야. 어디 기루인가? 아니면 주루? 어디서 괜찮은 미인을 잡아서 그 미인의 안방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가? 내 아우님이 말했다는 얘기는 티끌만큼도 흘리지 않을 테니까, 응?”
황보세가의 황보겸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애원을 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모용을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형님이 어디 가셨는지는 저도 몰라서요.”
“에이, 무슨 소리야 그게.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형님 가는 데는 다 아우가 알지. 갑이가 나한테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라도 했나? 나참, 그거 오해라니깐!”
아무래도 내가 말한, 황보겸이 집안에서 쫓겨났고 모용갑에게 돈을 뜯어내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두 사람의 사이가 끝장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황보겸은 당 씨 형제와 조를 꾸린 사람이 아니다.
“모용을. 네 형은 어디 갔지?”
“아아, 이번엔 그쪽인가? 곤란하군.”
모용을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넌 또 뭐야? 너 때문에 나랑 갑이 사이가―.”
“그쪽은 좀 비키고. 어차피 당신이 아무리 물어봤자 이 녀석이 모용갑의 행방을 얘기해주진 않을 거 같거든.”
“이, 이놈이?!”
“모용갑에게 팽된 걸로도 모자라서 이 많은 구경꾼 앞에서 흙바닥을 구르고 싶으면 덤비든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녀석과 눈을 마주치자 황보겸은 이를 갈다가 뒤로 물러났다. 나의 기세 때문이었는지 자신이 없어서였는지, 뭐 그건 알 바 아니고.
“그래서. 그쪽도 형님 때문에?”
“여기 없는 건 확실한가 보군. 내게 떠벌렸던 것과는 달리 연등회전에 참석하지도 않은 거 같고.”
“뭐, 형님 말을 빌자면 굳이 제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가당찮은 소리 말고.”
내가 느꼈던 위화감. 그 첫 번째.
연등회전에서 보자던 모용갑이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
“모용갑, 어디 갔어.”
나는 모용을의 소매를 강하게 낚아채며 물었다.
“그리고 이 흰 옷 입은 너희 무사들, 다 어디 갔어.”
두 번째 위화감.
이 너른 회장에 모용세가의 흰 옷을 입은 자가 모용을 한 사람뿐이라는 것.
“아이참, 이거 난감한데. 진짜 말 못 해.”
“진짜로?”
나는 녀석의 목에 난 상처를 노려보았다. 놈의 몸 안에 자리 잡은 고독은 그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협박으로 기능했다.
“진짜. 어디 갔는지는 말 못 해.”
그리고 놈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내게만 들릴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으면 너를 거슬러도 불구가 될 뿐이지만, 모용가를 거스르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거든.”
“그러면 너는 왜 안 따라갔지? 전체가 움직인 거 아닌가?”
“형님은 내게 공을 나눠주는 걸 싫어하거든. 개인적으로 썩 내키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 일이 뭐냐니까.”
“기껏 목숨 건지게 해 줬는데. 웬만하면 더 개입하지 말지?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며.”
모용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목에 손날을 대고 끽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관자재암으로 갔군. 그렇지?”
“아아, 끼어들지 말라니깐.”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방향을 돌려 뛰었다.
“금태양! 어디 감!”
“급한 일이 생겨서!”
“연등회전은?!”
“알아서 이겨! 지면 가면 안 둔다!”
나는 내 참가증을 당당에게 던지고 뛰었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비무대에는 올라갈 수 있다. 우리 조에는 둘째 형님이 대리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니 형님이 올라가도 된다.
지금은 관자재암에 가봐야 했다.
“그 흰 옷, 어쩌면……!”
불편하게 자리 잡았던 위화감들의 그 밑바닥에 깔려 있던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지독할 정도로 백색으로 빛나는 옷. 그 옷을 모용세가 녀석들이 아닌 다른 녀석들이 입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금동이를 따라 군주를 찾으러 갔을 때, 그곳에서 돌아다니던 정체불명의 백의인들.
녀석들의 소매에 흰 매화가 수놓아져 있진 않았지만, 다른 흰 옷들과도 확연히 차이 나는 유백색의 옷감은 흔한 게 아니다.
모용세가를 상징하는 옷이라면 다른 곳에 그 옷감을 팔 리도 없다.
군주를 습격한 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장처럼 보였던 자.
그자들이 이번에는 관자재암을 노린다.
* * *
하늘을 붉게 물든 석양이 완전히 어스름이 되고,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산중.
저 멀리 연등회를 밝히는 붉은 연등들이 별처럼 피어난 풍경을 즐기던 모용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면 안 되나? 아직 시간 안 됐어?”
“거의 됐습니다. 사전에 잠입시킨 산파가 삼백 번째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신호탄을 쏠 겁니다.”
“귀찮아 죽겠네. 그냥 애 밴 년들을 다 잡아가서 거기서 출산시키면 안 되는 건가?”
“령주(令主)가 신신당부한 부분입니다. 일시를 정해 거사를 치르는 것이니, 차기 가주답게 인내심을 가지십―, 컥!”
모용갑이 조언을 하던 수하의 멱살을 틀어잡아 높이 올렸다. 호흡이 곤란해진 수하는 컥컥대며 기침을 뱉었다.
“네가 뭐라고 가주의 자격에 입을 얹는 거지? 너 하나 이 자리에 파묻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요, 용서해 주십, 컥―.”
“용서?”
“사, 살려주시―.”
“살려어?”
“컥, 컥! 죽여, 죽여 주십―!”
그제야 모용갑은 수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가 낙법으로 자세를 잡았다면 한 번 더 발길질이라도 가할 작정이었으나, 수하는 눈치 빠르게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나동그라졌다.
“네놈이 그따위로 말하지 않아도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릴 거다. 한 번에 갓 난 애새끼 오백 명을 수거할 기회 같은 건 흔치 않으니까 말이지. 하물며 령주가 그랬다잖아, 이 시와 때를 맞춰 태어난 애가 필요하다고.”
모용갑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품에서 한 홉 들이의 작은 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붉은 보석과 같은 조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 귀한 선약(仙藥)을 만들어주는 존재인데, 아무렴 그 말을 따라야지. 안 그래?”
모용갑은 병 안에 든 선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령주는 부상을 입거나 손을 쓸 수 없는 독과 병 등에 걸렸을 때만 사용하라고 경고했지만 모용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이 약을 복용하면 세상이 제 발 아래 있는 것 같은 충만감과 강인한 힘이 따라오는데, 어째서 참는단 말인가?
“이때 태어난 애새끼 오백 명이랑, 또 뭐더라?”
“그 오백 명의 어미를 죽여 인연의 끈을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령주는 선약을 남용할 시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경고했지만, 방금 전 수하 하나가 가벼운 조언을 했다가 무슨 꼴이 났는지를 눈앞에서 본 이들이 그런 경고를 모용갑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모용갑이 묻는 말에만 정직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랬지. 죽여! 죽이는 거야! 어미는 죽이고 애새끼들은 죄다 취하는 거지! 그 모든 피가 모용가의 비상을 뒷받침하는 바람이 될 테다!”
그 외침을 듣기라도 한 듯, 관자재암이 있는 곳에서 작은 신호탄이 올라와 하늘에서 터졌다. 불길한 보랏빛이었다.
“가자, 혈겁을 일으켜보자!”
모용갑의 말과 동시에 흰 옷을 입은 이들이 날랜 새처럼 관자재암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