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하남에서 이름난 팔척도의 차력사와 팔각검(八脚劍), 거기에 백수(百手)의 거권(巨拳)이 한 조를 이뤘는가? 이거 참 볼만하겠군!”
우리 주변의 호사가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대충 들어보니 무기술도 무기술인데, 타고난 힘이 장사인 사람과 각법을 현란하게 쓰는 자, 그리고 원래도 권법에 강한데 거기에 속도와 파워를 겸비한 자가 한 조를 이룬 모양이었다.
“……형님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음.”
당당이 쓸쓸한 눈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한들 어떤가. 우리는 당가 쌍둥이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면 충분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비무대 위에 선 이들이 질 거라고 결과를 예단하는 거 같아서 상대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쌍둥이와 함께 자란 당당이 저렇게 말하는데.
“결과는 모르는 거다.”
엥?
나도 가만히 있는데 창천이 입을 열었다.
“너는 항상 저 형제들에게 눌려 살았겠지. 해서 상대의 실력을 지나치게 고평가 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건―.”
“아니면 너 자신을 지나치게 저평가 하고 있는 거겠지.”
창천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비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나도 당당도 알았다. 저 녀석이 제 나름대로 당당에게 위로와 격려라는 걸 했다는 사실을.
홍령이 들었으면 이게 웬일이냐고, 저 녀석이 이제 철이 들었나 보다 하며 제 자식이 다 큰 것처럼 눈물을 찔끔 짜내는 척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내가 언ㅈㅔ…….]
뭘 또 나왔어. 쉬라니까?
나는 소리 나게 창천의 등을 쳤다. 녀석이 뭐냐는 듯 눈을 흘겼지만 나는 몇 번 더 등을 두드렸다.
대견해서 칭찬하는 거다, 요 녀석아. 홍령의 몫까지 말이지.
[나 안 죽었ㅇ…….]
예예, 이미 죽은 귀신 두 번 죽기 전에 더 쉬시고요.
그러는 사이 소림승이 시합의 개막을 알렸다.
한쪽에는 호사가들이 입을 모아 떠들던 세 사람이 나름 합격진을 갖추어 서 있었고, 반대쪽에는 당랑과 당철이 합격진 따위는 개뿔 관심도 없다는 듯 대충 헐렁하게 서 있었다.
“정말 두 명뿐이네.”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시작을 알리는 징이 치고 시간이 흘렀지만 어느 쪽도 쉽사리 선공을 가하지 않았다.
“합격진은 방어에 유리하댔나?”
“저 진을 유지하면서 파고들어 공격을 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오래도록 합을 맞춰본 이들이 아니라면 방어에 이점을 갖는 게 전부겠지.”
반면 당랑과 당철은 언제 오냐는 듯 귀를 파고 자리에 주저앉아선 하품을 쩍쩍 하고 있었다. 당가의 무공은 전면전보단 기습과 암습에 특화되어 있다. 그 무공의 특질이 암기와 독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에이, 첫 시합인데 언제까지 시간만 죽일 거야?”
“지루하구만. 사천당가도 별 볼 일 없군.”
“안 나설 거면 차라리 내려와라!”
선공조차 없이 대치가 길어지자 구경꾼들의 목청이 커졌다. 바닥에 주저앉다 못해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던 당랑이 시끄럽다는 듯 귀를 후비다 이내 그 자세에서 훌쩍 뛰어올라 일어섰다.
“거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더럽게 시끄럽네. 그치, 철아?”
“응응!”
“다 죽여 버릴까?”
“응응!”
“그래. 다 죽여 버리자. 우리 막내도 와 있는데 형님들이 멋진 본을 보여줘야지.”
“본때를 보여준다!”
당 씨 형제는 만담 비슷한 걸 주고받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왜 저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그들의 태도에 웅성웅성 댔지만 당랑과 당철은 한바탕 눈물 나게 웃어젖히더니 자세를 바로하고 상대에게 몸을 돌렸다.
“개쪽 팔릴 테니까 선공은 양보해주려고 했는데. 안 오니까 어쩔 수 없지. 간다?”
“간다!”
그리고 갔다.
달려든 건 입이 요란한 당랑이 아니라 당철이었다. 키가 훌쩍 큰 당랑에 비해 당철은 당당보다도 작은 키에 몸이 차돌 같았는데, 그 몸으로 날래게 합격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
“?!”
나와 창천,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무공 좀 한다는 이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일그러졌다.
당철은 그냥 갔다.
그대로 가서 그들의 합격진에 부딪쳤다.
“저놈들, 대체 뭐지.”
“사천당가라며……?”
사천당가의 직계에게 기대되는 수준 높은 무공은 없었다. 당철은 그냥 합격진에 부딪쳤고 동네 건달이 패싸움을 하듯 놈들과 뒤엉켰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워낙 맥락이 없어 오히려 정교하게 구성한 합격진에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들 또한 시장바닥 패싸움에 일가견이 없는 것은 아닌지 이내 흩어져서 당철의 근본 없는, 그러나 약하지만은 않은 공격에 어울려 저마다의 수비와 공세를 펼쳤다.
관객은 신이 났다. 초절정 고수들의 싸움은 그 한 수 한 수를 볼 수 없는 이들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그들에겐 이런 쌈박질이 피를 끓게 하고 술을 부르는 구경거리였다.
“그래, 이거지!”
“가라! 사내새끼가 삼 대 일로 그 감자 같은 걸 못 이기면 쪽팔려서 불알 두 쪽 다 떼야지!”
“사천당가의 명성을 보여줘라!”
헌데 뭔가 찝찝했다.
“야, 창천.”
“왜 부르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이냐.”
“저 세 명 말이야. 조금씩 움직임이 둔해지는 거 같은데.”
“벌써 지쳤나 보지. 아니면 저자가 난데없이 난투를 벌여서 당황했을지도.”
아니다.
그냥 지친 것과 상태가 이상한 것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다.
“형! 언제까지 해? 더 하면 죽여 버린다?”
“에이씨, 네 선에서 안 끝나냐?”
한창 난투를 벌이고 있던 당철이 소리 높여 당랑을 불렀다. 팔짱을 끼고 관전만 하고 있던 당랑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제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뽑았다.
“나 탈모 되면 다 감자새끼 너 때문이다.”
당당이 눈을 찌푸렸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나풀거리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철심처럼 빳빳해지더니, 이내 비수처럼 하늘을 날았다.
파바밧!
갑자기 날아온 세침, 아니 모침(毛針)에 상대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철과 난투를 벌이고 있었기에 이를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곳곳의 요혈에 침이 박히는 것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두 명은 급소에 머리카락이 박히자마자 그대로 급사한 것처럼 자리에 꼬꾸라져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고, 한 명은 가까스로 공격을 쳐냈다.
“미친, 저래도 돼?”
“머리카락을 암기로 쓴다고?”
소림 측에서도 놀랐는지 몇몇이 벌떡 일어났는데, 자기들끼리 뭐라 갑론을박을 주고받더니 이내 자리에 앉았다.
이 대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몸’뿐.
자신의 신체 일부인 머리카락을 무기로 쓴다고 해서 규정 위반이라 보기는 어렵다.
“어쭈, 피했네? 쓸만한데?”
“형, 죽일까?”
“그래. 저놈은 죽이자.”
당철의 눈빛이 변했다. 겨우 머리카락 공격을 피한 한 사람, 팔각검은 얼굴 한가득 당황을 담은 채로 더욱 거세어진 당철의 공격을 막아내며 동시에 당랑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채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랑의 머리카락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금태양. 아까 저들이 묘하게 둔해진다고 했었지.”
“응.”
“당철의 몸 주변에서 무슨 조화가 일어나는 듯하다.”
무슨 조화? 당철의 공격이 아닌 당철의 몸에 신경을 집중하자, 과연 창천이 말했던 것처럼 뭔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몸에서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설마?
“형들은 강함. ……아버지가 둘을 공동 가주로 삼는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음.”
답에 확인을 요구하듯 당당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랑 형은 신체의 모든 것을 강력한 암기로 쓸 수 있고,”
한참 동안 서서 초조한 것처럼 손톱을 질겅질겅 씹던 당랑이 씨익 웃으며 씹던 손톱을 허공에 흩뿌렸다. 잘게 조각난 손톱들이 유리 파편처럼 빛나더니, 이내 팔각검에게 쏘아져 요소요소를 파고 들어갔다.
눈, 코, 입, 귀.
“으윽, 큭!”
참으로 약하고 실로 위협적인 급소이며―
“철 형은, 저 사람은 타고나길 독임. 원하는 만큼 독성을 주변으로 뿌릴 수 있음.”
―그 상처에 독성이 침투했을 때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곳들로.
때맞춰 당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기가 보통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짙어졌고, 이어진 당철의 일권(一拳).
팔각검은 그 주먹 한 방에 명치를 맞고 허공에서 두세 바퀴를 굴러 바닥에 처박혔다. 비무대도 아닌 장외에 떨어져 구경꾼들은 떨어지는 그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이, 이보시오! 괜찮으시오?!”
“의원이 필요해요! 이 사람, 피를 쏟고 있어요!”
사람들의 비명 섞인 외침에 나는 인파를 뚫고 서둘러 장외에 떨어진 팔각검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리세요! 들리세요?”
눈에 초점이 없고 몸은 축 늘어진 가운데 여기저기가 물고기가 뛰듯 불뚝불뚝 튀어 올랐다. 팔공에서 피가 흐르는 가운데 눈 점막과 입가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중독 증상. 그중에서도 심각한 축이다. 이렇게 빨리 중독 증세가 나타난다고?!
“해독약! 해독약을 내놔! 시합은 끝났잖아!”
비무대 위를 보며 외쳤지만 당랑과 당철은 저들끼리 키득키득 웃으며 하이파이브나 하고 있었다. 내가 재차 녀석들을 부르자 그제야 이쪽으로 시선을 주긴 했지만,
“형, 죽나 봐!”
“잘 죽였어. 사천당가를 우습게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 중원 놈들은 좀 알아 처먹어야 해.”
비무대 아래를 보면서 지들끼리 킬킬댈 뿐이었다.
저 자식들이!
“철 형의 독에 대응하는 약은 없음. 그냥 고통 없이 죽게 도와주는 게 답임.”
어느새 다가온 당당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환자를 손 놓고 포기해?
“손 내놔.”
“응?”
“손 내놓으라고. 잠깐 실례한다.”
나는 태양보도를 뽑아 당당의 손을 잡고 칼끝으로 상처를 냈다.
“아얏! 아픔!”
“좀만 참아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당당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피를 쓰러진 팔각검의 입과 상처에 흘려 넣었다.
“뭐 하는 거임?!”
“당가의 피는 모든 독에 면역이랬지?”
그게 아니고서야 저 독인(毒人)이 당가에서 추방되지 않고 직계로 오냐오냐 자랐을 리 없다. 집안 식구들까지 몰살시킬 독이라면 애저녁에 죽임을 당했겠지.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으어…… 어…….”
“이보세요, 정신이 듭니까?”
당당의 피를 한 모금 정도 흘려 넣었더니 팔각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상처 부위에 번지던 독기가 가라앉았고 발작적인 증상도 약해졌다.
나는 환자를 당황한 기색의 소림승에게 옮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씨 형제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놈들을 똑같이 노려봐주며 말했다.
“어깨 펴. 저놈들과 너를 비교하지 마.”
녀석들에게가 아니라, 당당에게.
“넌 저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