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너무 염려하지 말게. 나는 그저 명수를 채우러 온 것일 뿐, 뒤에 물러나 있을 것이니.”
진짜 머릿수만 채워줄 테니 싸움은 우리 둘이 알아서 하라 그거군.
대회에서 돋보이기 위해선 그만한 방법도 없긴 한데, 삼대 이는 조금 그림이 별론데. 삼대 일이라면 모를까. 세 명의 상대를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얘기긴 하지만.
“그렇다면 뭐, 일단 신청하러 가실까요?”
달리 대안도 없으니 우리는 참가 신청을 하러 갔다. 뭐 복잡하게 서류 같은 걸 제출해야 하려나 싶었는데, 접수를 맡은 승려가 둘째 형님의 얼굴을 보더니 알아서 척척 처리해선 빠르게 참가 접수증을 내주었다. 부처님의 도량에서도 인맥이 먹히다니, 통재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직 시작하려면 좀 남았는데 우리 세 사람 사이에선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창천 녀석이야 또 어떤 강자가 참가를 하려나 눈에 불을 켜고 접수처 쪽만 보고 있고, 둘째 형님은 무념무상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고, 나는…….
이럴 때 홍령이 그립네.
[불렀어요……?]
아냐, 더 쉬어.
여전히 목소리가 흐리게 들리고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나 좀 심심하고 어색하다고 겨우 죽다 살아난 사람 소리를 내는 귀신에게 수다 떨자고 할 수는 없지.
“저기, 형님. 아니지, 현금법사님.”
“아미타불. 왜 그러는가?”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묻게나.”
마침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할 만한 얘깃거리가 생각났다.
“제 어머니에 대해서 좀 아세요?”
족보상으로는 나와 다른 형제들은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내 출생이 남다르다는 사실, 금가장의 하녀가 내 친어머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무한에 있을 때 감양 형님과 진양 누님에게도 물어봤지만 시원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때 두 분이 어리기도 했고 아버지가 슬슬 이것저것 일을 시킬 때라 밖을 많이 돌아다녔던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 어머니가 원래는 둘째 형님을 수행했다면서요. 감양 형님한테 들었어요.”
큰 형님과 나이가 비슷했던 내 친모는 둘째 형님이 소림의 제자가 됐을 때 수발을 들러 따라간 하녀라고 했다.
전생에도 재벌 후계자가 유학을 가면 가정부니 수행원이니 주렁주렁 딸려 보냈더랬지.
그런 식으로 이 일대에 작은 집을 마련해 낯선 산속 생활을 하는 둘째를 챙긴 것이다. 거기에서 어머니가 오래 일했고.
아버지가 소림에 볼 일이 있을 땐 그 집에서 머물렀다고 하니, 나는 그때 생겼겠지.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직후 금가장으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나를 낳으며 돌아가셨다는 정도가 형님, 누님에게 들은 얘기의 전부다.
“어떤 분이었어요? 몸이 좀 약했나요? 지병이 있었다든가…… 아, 이런 건 잘 모르시려나? 성격 같은 건 어땠어요? 아름다운 분이었나요?”
그 전까지는 크게 궁금하지 않았는데, 한번 궁금증이 생기니까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친모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나를 낳아준 분이 아닌가. 한동안 관자재암에서 출산을 돕다 보니 더 감상적이 되었을지도.
겸사겸사 어머니 쪽에서 내게 유전된 것이 있는지 알아보면 좋겠다 싶어 분위기도 환기할 겸 물어본 거였는데, 둘째 형님의 얼굴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모른다.”
“어…… 모르신다고요? 형님이 소림에 가시고부터 저 낳을 때까지 쭉 형님을 수발들었다고 했는데요?”
“그것이 도대체 몇 년 전이냐. 네 나이를 생각하거라. 너는 이십여 년 전의 일을 기억하느냐?”
아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내 나이가 딱 스무 살 좀 넘었는데 이십여 년 전의 일을 기억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전생의 이지(理智)를 갖고 있는 환생자게?
물론 나는 환생자가 맞긴 한데, 아무튼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어머니가 형님을 살뜰히 보살폈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형님에겐 아니었나 보군요. 그 때문에 아버지 눈에도 든 거라고 얘기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자꾸 그 사람 얘기를 꺼내느냐!”
뭔데. 내가 지금 뭘 물어보기나 했나? 아니라기에 그렇구나, 아니구나 했더니?
수상한데?
……에이 설마.
어릴 때부터 소림에 출가한 승려고,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의 여인이 되었는데. 그래도 설마 아버지의 여인을 마음에 품었다거나, 아니면 아들이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아버지가 취했다던가 하는 막장 드라마겠어?
“나는, 나는 그녀를…….”
하지만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어깨를 가늘게 떠는 둘째 형님을 보니 그 상상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듯했다.
뭔데 이거.
이제 와서 우리집 족보 꼬이는 거야? 그대로 개족보 되는 거야?
“슬슬 시작할 때가 된 듯하다.”
때마침 창천이 와서 나와 둘째 형님 사이의 이상한 기류는 흐지부지 되었다.
그대로 둘째 형님에게 캐물으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냥 친모가 어떤 분이었는지, 혹시 내 체질을 분석할 수 있는 어떤 유전적 근원이 있지 않았는지 하는 거였다고.
사실 친부가 아버지가 아니라 둘째 형님이었다더라 하는 막장 스토리 같은 거 말고!
“녀석은 구경도 안 올 작정인가.”
창천이 혀를 찼다. 당당을 말하는 것이다.
“안 간다고 했으니 그게 쪽팔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왔으면 좋겠는데. 구경 정도는 해도 되잖아.
중간에 시간 빌 때 데리러 갈까?
참가도 아니고 구경 정도는 데려올 수도 있을 거 같은―
“허억, 헉…… 헉…… 아직 안 늦음?”
“당당!”
“왔군.”
끝내 안 오려나 했더니 녀석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 제 자리에 섰다. 경신법으로 달려왔는데도 숨을 헉헉대는 걸 보니 아직도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었다.
“좋아. 할 거지? 연등회전에 올라가서 네 형님들 앞에 당당히 서려고 온 거지?”
“그, 그게. 그러니까―.”
“사내가 돼서 말이 많군. 가자.”
오긴 왔지만 아직도 확실히 마음을 못 정한 당당의 팔을 창천이 홱 낚아채 접수처로 끌고 갔다.
허나 접수처 담당 승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미타불. 이미 참가자 등록이 끝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아, 아님. 난 괜찮음. 저기서 구경이나―.”
“그럼 신청을 취소하고 다시 할게요. 그럼 되죠?”
“아니 됩니다. 이미 접수가 끝이 났습니다. 지금 접수를 취소하면 재등록이 불가합니다.”
이런 답답한 땡중을 보았나. 얘가 겨우 용기를 냈는데!
“대리인 등록을 하면 되지 않나.”
“사숙!”
그때 둘째 형님이 끼어들었다. 아까 어머니 얘기를 할 때의 표정은 어디 가고 다시 세상사 무심한, 그러나 소림의 일에만큼은 관심이 있는 소림승다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당가의 자제분을 이 조의 대리인으로 등록하고, 나와 교대를 하면 되겠지.”
“아, 그게 그러니까…… 아! 맞습니다, 대리인이 가능했지요! 하도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뭡니까. 사숙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대리인 등록을 하고 사숙의 참가증과 바꿔드리겠습니다.”
둘째 형님의 중재로 우리는 겨우 제대로 된 조를 꾸릴 수 있었다. 하여간 그놈의 탁상행정이 나라를(?) 망친다니까.
우리가 참가증 교환을 마치자마자 연등회전을 위해 마련된 비무대 위로 소림 방장과 다른 승려들이 올라왔고 우리도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개회식이야 어딜 가나 비슷해서 좀 지루하긴 했지만, 참가자 자체가 적어 모두에게 시선이 집중되어서 하품을 하거나 딴 짓을 하기가 애매했다.
참가한 조는 총 일곱 조.
무당이 주관한 양양의 화산지회 예선에 몇백 명이 몰려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참 초라한 숫자였다.
“이번에는 일곱 조나 올라오는구만. 그간은 두세 조가 전부라 좀 재미있을만 하면 끝나버렸는데 말이지.”
“소림의 성세가 전 같지 않아 그렇지. 상금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뜨내기들도 얼씬거리질 않아.”
“그래도 진국들이 모이긴 하잖나. 그 유명한 소림의 합격술을 몸소 겪어보고 싶어하는 괴짜들이 말이지.”
“그 괴짜들 싸움판을 보고 싶어서 몰려온 우리는 뭐고?”
“괴짜 구경꾼이겠지? 하하하!”
여기도 제법 호사가들이 몰려온 모양이다. 그들의 말처럼 참가자는 적었지만 구경꾼은 솔직히 화산지회 예선에 못지않을 정도로 많았다. 나쁘지 않은 무대다.
“―하여 모쪼록 화합의 장이 되기를 바라네. 허면 대진을 뽑도록 하겠네.”
정도를 아는 소림 방장의 개회 축사는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게 끝났고, 모두가 고대하는 사실상 개회식의 첫 순서가 다가왔다.
소림 방장은 다른 승려가 가져온 뽑기 통에서 일곱 개의 막대를 순서대로 뽑았다.
“이렇게 여섯 조가 각기 승부를 겨루고, 남은 한 조는 부전승으로 준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네.”
방장이 마지막으로 뽑은 막대를 들어올렸다.
“창천 조. 여기 있는가?”
창천이 대충 손을 들었고 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겠지만 한 번의 부전승을 얻었다네. 부디 자리에서 다른 이들의 시합을 빛내주게나.”
“우린 부전승 따위 필요 없―, 읍!”
“입 다물어, 임마. 부전승 좋죠. 감사합니다. 다른 시합들 응원할게요!”
우승을 노리는 입장에서 굳이 힘을 빼봤자 좋을 거 없다.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게 화제성에서 좋은 거 아니냐고? 그렇다고 부전승을 굳이 반납할 필요가 있나?
“……형님들은 첫 번째 시합임.”
그래. 우리에겐 우승만큼이나 중요한 목표가 있다고.
바로 당당의 형님들에게 당당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목표 말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험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만, 나는 적을 아는데 적이 나를 모르게 하면 백전불태가 뭐야. 백전백승도 감히 장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부전승은 아주 소중한 기회다. 녀석들에게 우리를 숨길 기회.
소림 방장이 내려가기 무섭게 당가의 쌍둥이가 바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머지 한 명은?
“올라가지 않고 뒤에 있군. 둘만 싸우려는 모양이다.”
무슨 놈의 대회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야? 참가 등록은 반드시 셋이 해야 하지만 대리인도 세울 수 있고, 거기에 비무대 위에는 셋 중에 한 명이라도 올라가면 그만이라니. 이러니까 대 소림이 여는 비무대회가 인기가 없지.
그리고 당씨 형제의 상대들도 무대 위에 올라왔다. 패용하고 있던 거대한 도검을 내려놓고 맡기느라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렇다. 이 연등회전의 특이한 조건 중 또 한 가지는, 일체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으로만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검이나 봉 등의 무기를 익히긴 하지만 태극권같이 신체를 사용한 무술이 이름난 소림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이 조건 또한 연등회전의 인기 없음에 일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