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당당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창천이 돌아올 때까지, 당당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자근자근 깨문 입술이 잔뜩 부르터 있었다.
“찾았군. 가지.”
“어, 근데 당당은 안 가겠대.”
“……!”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참가를 당연히 여기고 있던 만큼 당당의 참가도 기정사실화 하고 있던 창천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가기 싫은가 보지. 애초에 나도 별 생각 없었는데 네가 끌어들인 거라고. 당당은 안 간다니까 괜히 더 물어보지 말고, 가자.”
나는 창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창천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다면 한 명이 더 필요하다. 연등회전은 반드시 세 명이 참가해야 한다.”
“그쪽에 요청해보지 그래? 좌수검은 이미 떠났나? 그래도 연락할 수단은 있을 거 아냐. 소림과 협력관계를 맺는다 했으니 비상 연락 수단 정도는 만들어 놨겠지.”
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제법 많이 걸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따라잡기 위한 당당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좋아. 그럼 너는 정반합에 연락해서 함께 연등회전에 나갈 사람을 구해달라고 하고, 그 명당은 멀어? 운기조식을 제대로 못 해서 연등회전 전에 잠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해 지기까지 아직 시간 있잖아.”
“그리 먼 곳은 아니다. 널 데려다주고 나는 그쪽에 연락을 취하러 가지.”
“좋아. 가보자고.”
그리고 끝까지 당당은 떠나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
* * *
“후우…….”
창천이 알려준 명당에서 짧게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뜨자, 하늘이 울긋불긋 석양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려가면 늦지 않게 창천과 합류할 수 있을 거다.
[우우…….]
홍령!
괜찮아? 정신이 들어?!
[아아…… 당신 괜찮군, 요…….]
무리하지 마. 운기 할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그래도 다행이다. 너 사라질 때마다 진짜 심장이 떨어진다, 떨어져.
[우…… 좀 더 쉴래요…….]
그래. 일단 최소한의 회복은 한 것 같으니 됐다.
전처럼 뚜렷하게 형체가 보이는 게 아니라 희끄무레한, 진짜 유령과 같은 무언가가 내 주변에서 힘없이 날아다녔다.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하는 것도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충분한 시간과 더불어 내가 기를 보충해주면 더 빨리 회복하겠지.
홍령이 다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의 불안이 가라앉았다. 너무 그녀에게 의지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실제로도 홍령한테 의지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산속에서 빠르게 시내로 내려가자, 약속 장소에서 창천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내준대?”
“알겠다고는 하더군. 구한다면 이쪽으로 보내라고 했다.”
“해 지기까지는 아직…… 반 시진 정도인가?”
우리가 여기서 만나 연등회전에 신청하러 간다는 사실은 당당도 알고 있다. 일부러 목청껏 크게 외쳤으니까.
“역시 안 오려나.”
“당당 말인가? 안 온다고 하지 않았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잖아. 원래 어떤 결정엔 시간이 필요한 법이란다, 창천아.”
“갑자기 서원 원장 같은 말투인 건 둘째 치고, 어째서 시간이 필요하지?”
하여간 이 단세포는. 이러니까 내가 서당 훈장님처럼 말하게 되는 거 아닌가.
“녀석이 집을 떠나게 된 원인인 형님들이 이 대회에 나온다잖아. 그런 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에 비해 단단해지고, 훨씬 성장했어도, 그런 상황하에 놓이면 또다시 약한 어린애가 되어 버린다고.”
“난 모르겠다만.”
“모르긴. 너, 아직도 그 날 꿈꾸지?”
“……!”
그날. 지금 태양의원 본원이 있는 태청장원이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에 의해 몰살당했던 날. 창천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그의 부모가 죽음을 맞이한 날. 창천에게는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날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그거 좀 웃긴 거 알지? 자세히는 몰라도 네가 가끔가다 끔찍한 악몽을 꾼다는 거 정도는 본원 사람들은 다 알아. 너 그때 비명 지르면 노숙하면서 줄 서 있는 환자들한테도 들린다더라.”
“……그 정도였나.”
“놀리려고 얘기 꺼낸 건 아니고. 너는 그 꿈에서 어때? 지금처럼 강해진 모습으로 녀석들과 싸워, 아니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꼼짝도 못 하고 숨만 죽이고 있어? 아니지, 지금 모습 그대로 꼼짝 못 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마지막 말이 정곡이었나 보다.
“그렇군. 꿈에서도 그런데 현실에서라면. 이해했다.”
“그래, 그런 거지. 앞으로 훈장님이라 불러.”
사실 훈장님보다는 전생에 이름을 날렸던 아동전문가 오 박사님이 된 기분이지만.
에효, 통재라. 나보다 어린(?) 녀석들이랑 부대끼며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또 창천 녀석은 혼자 칩거한 기간이 길어서 사회성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은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런가.”
아니, 잠깐만. 꿈 얘기를 예로 들어준 건 공감을 하란 얘기였지, 너도 똑같이 낙담하란 얘긴 아니었거든?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똥이 무섭지 않게 되었어도, 더러운 건 사실이잖아. 더러운 걸 평생 피하고 사는 게 뭐가 나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너도 봤잖아. 당당은 뛰어난 의원이자 동시에 독의 전문가고, 좌수검을 제법 잘 다루게 된 데다가 암기도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수준이라고. 사천당가만 떠나 있으면 당당은 충분히 유능하고 괜찮은 인간이야. 그러면 안 돌아가고 잘 살면 그만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당당은 유용한 인재였다. 녀석이 본원에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촌의 온 집들이 나무 갉아먹는 벌레로 인해 집의 기둥이 삭고 어떤 집은 폭삭 무너지는 일도 있었는데, 당당이 만든 해충약 하나로 이틀 만에 모든 벌레가 싹 사라진 일도 있었다. 그걸 구하겠다고 여기저기서 돈을 싸 짊어지고 오기도 했지. 사천당가의 입김이 크게 미치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당가의 이름값을 듣고 오는 사람이 제법 있어서 의원의 경영에도 보탬이 됐다.
녀석이 쓸모없는 하찮은 놈이라고? 당당을 그렇게 평가하는 곳은 중원 천지에 사천당가뿐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곳에서 사는 게 뭐가 나빠? 극복하면, 뭐 좋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 그것도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충분히, 더 잘 살 수도 있다고.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아주 극복 못 하는 것도 좀 속상한 일이니까. 이번엔 우리가 좀 도와주자고. 우리가 제 형님들을 여기서 뭉개버리면 녀석이 대리만족이라도 시원하게 느끼겠지. 또 알아? 그러면 다음번에 기회가 왔을 때는 자기가 나설 수 있을지도.”
가로질러 갈 수 없다면 돌아서라도 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아니던가.
모든 사람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트라우마를 한 페이지 만에 격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우리 인생은 좀 돌아가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길다는 걸.
“……그렇군. 친구라는 건가.”
“응?”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뭘 들은 거 같은데. 귀가 어둡나, 귀 좀 파야 하나? 그래서 친, 뭐라고?”
물론 다 들었다. 내 청력이 점혈로 마비된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중얼거린 것도 못 들을까 봐. 일 장 거리에서 파리가 똥 싸는 소리도 집중하면 들을 수 있을 텐데.
“친구, 뭐라고 들은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금태양. 적당히 해라.”
“아니 왜? 그 좋은 말을 크게 하면 되지. 뭐 훔쳐 먹는 사람처럼 소곤소곤거려. 이야, 친구다! 친 구! 우리 창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하는구나!”
“적당히 하라니까!”
“왜, 부끄러워? 십보의 창천룡께선 이제야 우리가 친구라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우신가?”
“어, 언제 우리가 친구라고 했나! 그냥 너와 당당 녀석이―.”
“아, 그렇구나.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군. 미안하다, 오해했네.”
“그 얘기가 아니라―.”
내가 괜히 섭섭한 척 무심하게 돌아서자 창천이 또 안달복달했다. 그래, 어린놈이 이런 귀여운 맛이라도 있어야지. 얼굴만 잘생기면 뭐 하냐, 사내새끼들 사이에. 이런 우스운 일들이 쌓여서 생기는 우정이 있어야지.
나야 중간에 낀 나이라지만(정신적 나이는 둘째 치고), 당당과 창천은 은근 나이 차이가 나서 녀석들은 친구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고, 그렇다고 형님 아우는 절대 아닌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참에 녀석들도 서로가 친구라는 걸 좀 제대로 깨달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창천 녀석을 놀리고 있는데(절대 같이 투닥거릴 홍령이 없어서 괜히 창천에게 시비를 건 것은 아니다. 절대. 아, 아니라고!) 누군가의 기척이 우리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아미타불. 소승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왔네.”
이제 신청까지는 약 삼십 분 정도 남은 상황.
지금 이 시점에 우리를 찾아 자기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온 스님이라면, 그건 분명 창천의 요청을 들은 정반합이 소림에 부탁해서 나온 스님일 것이다. 연등회전은 특이하다면 특이하게도 주최측인 소림승들도 참가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 유명한 소림의 합격술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연등회전의 홍보 포인트이기도 하고.
“에, 그러니까…… 저희랑 같이 연등회전에 나가시는 분이, 형님이라고요?”
무승 현금.
우리 앞에 배달된, 아니 도착한 지원군은 바로 그였다.
작금 소림에서 그 무위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이대제자 중 제일, 내 형님이기도 한 무승 현금이 우리랑 연등회전에서 한 편을 먹는다고?
아니, 싫은 건 아니다. 싫은 건 아닌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마땅한 인재가 없어 소승이 오게 되었네. 폐는 끼치지 않도록 하지.”
아니, 폐는 아니지.
아니, 폐인가?
[야. 네가 우승해서 그걸 빌미로 소림에서 널 대리인으로 삼는다고 안 했어?]
내 전음에 창천도 약간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지금 이 상황이 난감하다는 건 알고 있나 보군.
[형님이 같이 나갈 거면 뭐 하러 대회를 나가? 괜히 짜고 친다는 소문만 날 텐데. 차라리 그냥 호북에서의 명성을 듣고 소림이 대리인을 요청했다고 하는 게 낫지. 안 그래?]
창천의 고갯짓이 더 빨라졌다.
우리는 여기서 그냥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창천에겐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미션이, 내겐 그 얄미운 모용갑의 콧대를 눌러주고 겸사겸사 당당의 자존감도 채워줘야 하는, 거기에 우승해서 소림 방장과의 만남에도 임팩트를 준다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둘째 형님이 우리 팀에 끼면, 우승은 가능하겠지만 이 모든 목적이 무산된다.
자고로 사람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좋아한단 말이다. 신형 항공모함과 골리앗의 싸움을 누가 재밌게 보겠냐고!
……아니지, 그거 좀 재밌긴 하겠다. 약자가 예상을 뛰어넘어 강자를 이기는 싸움만큼이나 재밌는 게 또 양민학살이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목적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형님에게 가지, 우리한테 오진 않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