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당당에게는 꽤 크게 보상해야겠는데.”
기분이 묘했다.
전생의 복수를 이번 생에 이어서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점이 통쾌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전생의 업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 씁쓸했다.
모용가도 상당한 의술을 보유하고 있으니 저걸 제거해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기 전에 알차게 녀석을 써먹는 수밖엔.
그치, 홍령?
……맞다. 날 위해서 귀기를 써버렸지.
일단 홍령의 귀기를 채워줄 필요가 있겠군.
“금태양, 있나?”
때마침 창천이 나를 찾아 방으로 들어왔다. 융중다원의 하인에게 내가 돌아왔다는 얘길 들은 모양이다.
“잘 왔다. 너, 여기 와서도 계속 수련하러 다녔지? 이 일대에서 제일 기가 좋은 곳이 어디야? 나 좀 알려줘.”
“그, 그러지.”
평소의 녀석이었다면 자기가 왜 명당을 알려줘야 하냐며 한 번은 빈정댔을 녀석이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은 어디 가서 뭘 또 잘못 먹은 거야?
“너도 연등회전(燃燈會戰)에 나갈 생각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머릿수를 채워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쓸데없는 데 기력을 소모했군.”
연등회전은 이름에서 보다시피 화산지회와 같은 무도대회다. 소림이 연등회 기간에 여는 국지적인 행사인 거지.
평소 보기 힘든 소림의 승려들도 대거 참가한다고 했으니 고수와의 대결에 목말라 있던 창천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만……
“그거 예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며. 그래서 참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소림의 저력이 전과 같지 않아서(지금은 그것이 섬서를 지원하기 때문임을 알지만) 지금은 화산지회에 비하면 동네 축구클럽 친선경기 같은 꼴이 됐다고 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참가팀이 세 개고, 한 팀은 선수가 모자라서 경기 안 하는 다른 팀이 선수 빌려주고, 끝나면 모두가 금은동 하나씩 따고 하하호호 고기나 먹으러 가는 그런 대회.
“정반합이 나가라더군.”
“아? 좌수검이?”
“나가서 우승을 하고, 소림의 대리인으로 지명을 받으라는 지시다. 나는 이미 화산지회 본선에 나갔으니 배첩도 따로 필요 없어 적합하다더군.”
정반합과 소림이 협력 관계를 다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소림의 대리인이라……
“……설마. 소림에 화산지회에 선보일 수 있는 수준의 제자도 없는 거야? 이대제자쯤 보내면 안 되나? 좌수검도 본선에 나갔잖아?”
“본래 좌수검 정도의 연배가 나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했다. 이런 대회는 후기지수들의 무대지.”
그렇다면 둘째 형님인 무승 현금이 배첩을 받아 나가지 않은 것도 납득이 되긴 한다만. 그래도 그렇지. 나도 아는 명문인 천년소림에서 이 뛰어난 녀석이 우리의 후기지수다! 할 수가 없어서 대리인을 구하다니.
“참가기준이 세 명이던가?”
연등회전은 다른 무도대회와 다르게 독특한 조건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3인 1조다. 애초에 그냥 무도대회도 아니고 회전(會戰)이니까. 조를 어떻게 구성하든 상관없지만 반드시 세 명이어야 하며, 더 적거나 많아도 안 된다.
“나머지 한 명은 당당을 데리고 갈 생각인데,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다. 본 적 있나?”
본 적이 있긴 하지. 있긴 한데…….
“어디서 몰래 암기 수련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냐? 늘 숨어서 하잖아.”
“일리 있군. 너는 서쪽을 뒤져라. 나는 동쪽을 찾지. 해가 지기 전에 참가신청을 마쳐야 한다.”
잠깐만, 나는 참가한다고 말 안 했는데? 하지만 말을 정정할 새도 없이 창천은 훌쩍 동쪽 건물의 지붕을 타고 날았다. 이 자식이. 애초에 난 기를 보충할 명당을 찾고 있었다고.
“하여간 아주 지 멋대로라니까. 사람이 환경이 바뀌면 뭐라도 좀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니냐.”
같이 맞아요, 맞아! 라든가 다른 쪽으로라도 태클을 걸어줄 홍령이 그리웠다. 후딱 당당을 찾아놓고 빨리 명당 위치를 내놓으라고 해야지. 부족한 자리는 정반합에서 채워주든지 하겠지.
“아니, 이게 누구야.”
그렇게 당당을 찾으러 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작은 의혹 하나 제대로 해명하질 못하고, 그대로 여인네들이 득시글하다는 산기슭으로 도망쳐 올라간 우리 귀공자 금 씨가 아닌가?”
아, 저 재수 없는 목소리.
“아하, 저 공자가 바로 그 금 공자인가? 아미승과 배부른 여인들을 끼고 질펀하게 재미 좀 보고 있다는?”
이럴 때는 반응 안 하는 게 제일 효과가 좋다는 건 아는데, 그게 되면 내가 의원을 하는 게 아니라 머리 밀고 소림에 들어갔겠지.
“요녕에서는 모용세가 하면 알아준다더니, 그 알아준다는 게 고고한 명문이라서가 아니라 혓바닥을 쓰레기 같이 놀려서 알아준다는 건진 몰랐네.”
“뭐라고?”
“못 들었나 봐? 아, 혓바닥뿐 아니라 귓구멍도 썩어서 막혀 버렸나 보군? 내가 그런 데 좋은 침을 하나 아는데. 이거 어쩌나, 누군가 그러는데 나한테 침을 맞으면 귓구멍이 뚫리다 못해 반대쪽 관자놀이까지 시원하게 구멍이 뚫린다대. 남의 말 잘 듣는 모용 공자께서는 무서워서 치료도 못 받으시겠어?”
“이, 이 자식이?”
“아니면 옆에 있는 새 친구들에게 치료를 받을 건가? 남의 말을 잘 듣는 모용 공자니까 나도 한 마디 해보겠는데, 그 친구들을 언제까지 친구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 황보세가의 삼 공자는 하도 사고를 쳐서 집안으로부터 의절을 당했다던데, 나는 내 돈 빼먹고 여색이나 취할 생각만 하는 자들은 친구라고 친 적이 없거든.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이렇게 견고해 보이니 앞으로 큰 문제는 없겠어.”
내 말에 모용갑이 황보겸을 노려보았다. 황보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아미승들로부터 들어놓은 얘기를 이렇게 입을 털 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 그리고 그쪽은 그 유명한 쌍둥이 형제신가? 내가 당가에 대해서 좀 아는데 말이야, 거기 비밀리에 키우는 독충 중에 악어조충(鰐魚鳥忠) 이라는 게 있다더군. 강한 생물에게 빌붙어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척 독을 흘려보내서 결국은 제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거야. 그렇게 몸집을 부풀려서 자기보다 약한 것들은 모조리 씹어 버린다지. 먹는 것도 아니고.”
당랑과 당철이 불쾌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군. 모용공자가 말했지. 우리 집 그 찌질한 놈이 네놈하고 붙어 다닌다고. 녀석, 그 새를 못 참고 가서 일렀나? 하여간 당가의 자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없어, 없어!”
“안 되겠다. 그간은 놈의 자유방종을 봐주었지만 데리고 돌아가야겠어. 어디 제대로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릴―.”
당랑이 성난 얼굴로 한 걸음을 나서려는 걸 내가 가로막았다. 녀석이 어떤 쪽으로 출수를 하든 받아칠 수 있는 자리였다. 녀석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이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번 해보자고?”
“해보자? 해보자!”
“나는 상관없지만, 이곳에서 패싸움을 벌이면 융중다원의 기물이 제법 파손될 텐데. 원하던 그림이 꽤 어긋나겠어?”
다섯 세가가 힘을 모아 구파일방을 넘어서자는 계획에서 한 세가라도 빠지면 손해가 크겠지. 제갈다영이 회합에 참석도 안 했는데 이곳에서 난리를 피웠다간 제갈세가와의 사이는 소원해질 게 뻔하다. 모용갑도 그걸 알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좀 우습기도 할 거야. 아마 소문은 이렇게 나겠지. 일대에서 제일 좋은 방을 두고 다투다가 남들이 더 좋은 방을 제공받았다는 말에 홧김에 융중다원에서 소동을 벌인, 요녕의 패자 모용세가. 거기에 거든 기타 등등들. 진실이야 다르지만 원래 호사가들이라는 게 가볍고 재밌는 설(說)을 채택하기 마련이잖아?”
“이제 보니 입만 살았군, 금태양.”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 말이 곱게 안 나가네. 어차피 우리를 위한 무대는 준비되어 있잖아. 이 먼 중원까지 와서 그 실력을 선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네놈들도 연등회전에 참가하나?”
아까까진 적당히 남에게 넘기고 뺄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 우리가 너희를 꺾고 우승을 차지할 거다.”
나의 우승 선언에 모용갑이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구파일방의 제자도 아니고, 고작 의원 나부랭이 주제에. 뭐? 우리를 꺾어? 우승?”
“푸흐, 푸하하하하하!”
모용갑은 옆에서 웃음을 터트린 황보겸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의원 나부랭이 하나에 집안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인 놈 하나, 그리고 뭐냐, 나머지 하나는 원래 반병신 폐인이었댔나? 어디 한번 발악해봐라. 즐겁게 갖고 놀아주지.”
“모용 공자 말이 맞아! 장난감은 구경꾼이 더 많은 화려한 무대에서 갖고 노는 게 재미지!”
“재밌다!”
“이만 가지. 네놈들과 처음부터 맞붙지 않으면 좋겠군. 그래서야 마지막까지 지루하기만 할 테니까.”
모용갑은 흰 옷자락을 소리 나게 펄럭이며 내게 돌아섰다.
그들이 충분히 멀어진 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내 말에 건너편 관목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그 사이에서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당이었다.
“저 녀석들이 눈치 못 챈 걸 보니까 네 은신이 더 뛰어나네. 뭐 저런 녀석들에게 쫄고 그래?”
“……그건 네가 몰라서 그럼. 형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나는 잘 앎.”
평소엔 시끄러울 정도로 조잘대던 녀석이 어깨가 축 처졌다.
“아까도 알면서, 알면서 내가 그냥 숨어 있게 둔 거임.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음…….”
“성격들 더럽네. 대놓고 앞담한 거잖아?”
하긴, 바로 눈앞에 두고도 온갖 깔아뭉개는 말을 해대는데. 숨어 있다고 덜할 것도 없는 위인들이긴 했지.
“됐고. 창천 찾아서 연등회전 신청이나 하러 가자. 해 지기 전까지 등록 마쳐야 한다고 했으니까 빨리 움직이자고.”
“싫, 싫음! 안 가!”
“안 간다고?”
“마, 말도 안 됨. 내가 형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웃음거리만 될 거!”
웃음거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허리춤의 태양보도를 뽑아 그대로 녀석의 얼굴을 향해 칼끝을 날렸다.
얕지만 얼굴 거죽에 붉은 선 한 줄은 충분히 그을 수 있는 공격.
부지불식간의 공격은 시원한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살짝 비껴 나갔다. 녀석의 얼굴은 실금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방향이 비껴 나간 탓에 원래 목적이 아니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베여 하늘에서 살랑살랑 떨어지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게 무슨 짓임!”
“웃음거리라. 글쎄다?”
나는 다시 태양보도를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이 정도로 소화할 수 있게 됐잖아?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만으로.”
방금 전 당당이 쏘아낸 두 자루의 비도가 자루만 드러낸 채 바닥에 푹 박혀 있었다. 녀석의 성취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죽을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라면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넌 네 성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일부가 되고 싶어 하잖아. 안 그래?”
“나, 나는―.”
“같이 연등회전에 가자. 인정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자식들이 널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