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녀석이 사과를 했지만 그렇다고 내 기분이 풀릴 리가 없었다.
운기행공 중 호법을 맡긴다는 건 신뢰의 의미다. 녀석은 그 신뢰를 깨트렸고, 안이하게 녀석을 믿은 대가로 홍령이 귀기를 잃었다.
지난번처럼 정기가 가득한 곳에서 운기를 하면 돌아오겠지만, 귀기를 잃는 건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거 같은 충격이라고 했단 말이다.
놈의 목을 겨눈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기서 1mm만 더 들어가면 경동맥을 벤다.
“진짜 날 벨 작정이야? 그렇다면 실망인데. 나라면 내 존재를 이용할 생각부터 했을 거야. 안 그래? 같은 세상을 경험한 친구, 이보다 유용한 존재가 어디 있어?”
……그래.
슬슬 전생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다.
전생에 의학이나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익힌 것도 아니고 그 외에 다른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니까.
상식선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전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녀석에게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내게 어떤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지?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전생에 제법 쓸 만한 기술이라도 익혔나? 이곳에 다시 태어나기 전, 넌 뭐였지?”
“그냥 덥썩 알려주기에는 일단 내 패를 너무 많이 깠는데. 너도 뭘 알려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전생의 넌 어떤 사람이었어? 한의사? 의사?”
“지금 네가 공평함을 따질 상황인가?”
“내가 이걸 못 피해서 그냥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모용을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 서자라고는 하지만 녀석은 모용세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웠을 것이다.
“내가 그랬잖아, 미안하다고. 사과의 의미로 피를 보고 있는 거니까 오해는 말라고.”
그렇다 해도 적잖은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하다. 경동맥이 잘려나가면 점혈로도 한계가 있다. 내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녀석은 죽거나 빈사상태에 빠질 거다.
……그 전에 나도 적잖은 부상을 각오해야 하겠지. 녀석의 실력이 모용갑과 비등하다면.
명성에 있어서도 불리하다. 운기행공을 방해하는 일이 무림에서는 중죄로 쳐지는 분위기라도, 모용세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당장 모용갑이 요란을 떨겠지. 기껏 관자재암의 일로 명성을 회복할 계기를 만들었는데 또 똥물을 뿌리게 놔둘 수는 없다.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아. 가장 뚜렷한 건 죽기 직전의 기억이다. 암이었지.”
“그렇군!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모든 기억이 뚜렷한 건 아니거든. 암이라니, 안됐어. 그래서 더 의원 일에 매진하는 건가?”
“모용을, 너는?”
“진이라고 부르라니깐. 나는 좀 특이한데, 비행기 사고였어. 진짜 재수도 없지. 퍼스트클래스라고 안 죽는 건 아니더라니까.”
“○○항공?”
“알아?”
“그 나라에서 비행기 사고가 그렇게 흔한 건 아니지.”
그리고 그 비행기에 탑승한 ‘김진’이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확신했다.
이 녀석, 그 새끼다.
□□그룹 전략기획본부장 김진.
내게 모든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미국으로 도주한 그 새끼, 맞다.
* * *
“이번에도 부탁한다.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검찰 녀석들이 말을 안 듣네. 하, 이번 대선을 저 녀석들이 이기게 둬선 안 되는 거였는데.”
흔한 일이었다.
대기업이라 불릴 정도의 그룹이 탈 없이 굴러가려면 바닥에 깔려 있는 자잘한 돌멩이들은 깔아뭉개고 부수며 지나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 과정에서 잡음과 먼지가 나기도 하지만, 대기업이라는 큰 바퀴가 망가져 나라를 움직이는 동력이 끊길까 걱정하는 이들과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끊길까 염려하는 이들 덕분에 큰일로 번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도 가끔 먼지가 심하게 날 때면 나 같은 사람들이 소환됐다.
본부장 김진 말고, 그 밑에 있는 따까리 김 실장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징역을 살거나 하진 않았다.
조사는 형식적이고 몇 번 출석하다 보면 이내 연락이 끊겼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처음엔 회의감이 들었는데 몇 번 하고 나니 익숙해졌다. 이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 사람들이 떡고물을 하나둘 받고선 웃는 낯으로 악수를 하는 걸 보며 ‘그래, 이 세계에선 이게 맞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익숙하게, 그날도 평소 그랬던 것처럼 지나갈 줄 알았다.
“이번엔 다릅니다, 김 실장님. 전국적으로 시위에 서명운동까지, 그룹도 타격 크죠? 불매운동 제대로 들어가던데. 위에서도 이번엔 얘기가 달라요. 정권 초기에 본보기를 보여주겠다고 작정을 했어요.”
이번에는 검찰의 태도가 달랐다.
조사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고 회사에서도 돈도 뭣도 먹히지 않는다는 말만 계속했다. 어느 날은 검찰이 내 앞에 증거를 내밀었다.
진짜 증거였다.
한 가지 사실만이 진실과 달랐다.
본부장 그 개자식이 아니라 나, 실장 김진이 범인이 되어 있었다.
“이번엔 진짜 안 되겠더라. 몇 년만 살다 나와. 거기서 머리 식히면서 공부도 좀 하고. 좀 조용해지면 돈 먹여서 꺼내줄 테니까 해외로 가서 MBA나 하나 따고. 이참에 학벌도 세탁하는 거지. 우리 모교가 그런 거 잘 받아줘. 그러고 나면 해외지사에 자리 하나 줄게. 네가 그간 고생한 게 많았잖냐. 내가 삼촌에게 얘기해서 좀 더 챙겨 주자고 한 거야. 나만 한 상사도 없지 않냐?”
감옥에서 몇 년.
“어? 암이래? 그것도 시한부? ……더 잘됐네! 거기서 그냥 죽어라. 하, 홧김에 뭣도 없는 무능한 새끼 골라서 고생했는데, 너 죽으면 동정표는 좀 나오겠다. 뒤처리할 필요도 없고 깔끔하게 좋네. 사식은 잘 넣어주라고 할게. 아, 비행기 탈 시간이다. 잘 가라.”
법무팀은 나와 그 새끼의 통화를 다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체하며 죄를 뒤집어쓰는 대신 이 정도의 보상을 약속하겠다며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사인하지 않았다.
대신 내 담당검사를 불렀다.
“……몸통을 잡게 해주신다고요? 아니, 우리야 그러면 좋지.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해서 위로 올라가야 하거든. 우리끼리 하는 얘긴데, 내가 VIP 칼자루가 됐다 이거 아닙니까. 이참에 이 썩어빠진 집 한번 엎어보려고. 그래, 무대가 필요합니까?”
긴급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이미 그룹에서 집을 뒤져 내가 가진 자료를 다 파쇄한 후였지만, 만일을 대비해 피해자 남매에게 건넸던 USB는 남아 있었다.
그 안에 진짜 증거가 있었고 나는 기자회견 날 그 모든 것을 폭로했다.
“방금 전 비행기 폭발로 김진 본부장이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서 김진 씨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기자회견만 무사히 마치면 그 더러운 대기업에 한 방 돌려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개자식이 기자회견 도중 비행기에서 폭사하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룹은 태도를 바꿨다.
모든 것은 망나니였던 김진 본부장의 단독행동으로 처리되었고 꼬리를 바짝 내려 피해자 지원과 사회환원에 힘쓰겠다며 적잖은 돈을 쾌척했다. 갑자기 장본인이 죽어버려서 동력을 잃은 피해자 모임은 당장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인 제안을 수락했다.
드물게 일어나는 항공사고, 거기에 사망자가 김진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점은 항공사의 정비 부실로 향했다. 대국민적 규모로 모였던 분노의 포화는 그룹이 아닌 항공사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내 사건을 잊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지나간 일 취급을 했다.
검찰도 스포트라이트를 바꿨고 그룹은 정상참작을 받았는지 어느 정도의 과징금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낙동강 오리알이 딱 내 신세였다.
또다시 새로운 화제가 대한민국을 강타했을 즈음, 그룹의 법무팀이 내게 고소를 걸었다.
그것이 내 전생의 엔딩이었다.
* * *
죽일까?
“야, 야?”
죽여 버릴까?
“좀 깊이 찌르는 거 같다?”
그냥 확, 죽여?
“네가 치료할 수 있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지금?”
나는 깊게 심호흡했다. 다시 한번 이 녀석을 죽였을 때의 득과 실을 생각했다. 그래, 이성적으로.
“금동아.”
문간에서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금동이를 불렀다. 녀석의 손에 작게 긁힌 상처, 저건 금동이가 낸 거겠지. 나를 지켜준 녀석.
“저기 저 상자 좀 가져와.”
이 녀석을 처리하고 나면 맛난 고기라도 한가득 챙겨줘야지.
금동이는 내 말을 듣곤 모용을이 흩어놓은 짐 중 작은 상자를 물어 내게 다가왔다.
“옳지, 착하다.”
“그건 뭐야?”
“신뢰의 증표?”
나는 상자를 열었다. 전생의 반지 상자만 한 크기에는 작은 벌레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사천당가의 고독이라고 들어봤어?”
그리고 벌레 중 한 마리를 경동맥의 상처에 집어넣었다.
“너, 너……!”
“걱정 마. 이건 당가주가 갖고 있다는 고독처럼 상대의 이지를 제압할 수준은 아니니까.”
내 건 아니고 당당에게 받은 것이다. 정확히는 빌린 것. 당가 직계라면 하나씩 받는다고 하는데, 산공독 연구에 활용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살펴본다고 가져온 거다.
“고독은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이 녀석의 경우엔, 모체를 죽이면 이 녀석도 내부에서 독을 뿜으며 죽어. 운이 나쁘면 즉사한다고 하더군. 고독이 어디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말이지.”
“……뇌나 심장에 자리를 잡는다면.”
“응, 거긴 죽겠지. 덜 중요한 장기나 팔다리라면 죽지는 않을 테고. 또 모르지. 민간인은 즉사라고 했는데 무림인은 그 정도까진 아닐지도. 폐인이 되긴 하겠지만.”
모용을의 눈이 매서워진 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넌 날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었어. 어디까지나 보험을 드는 것뿐이야.”
불평을 하고 싶다면 너 자신에게 불평해라. 나는 전생에 네놈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내게 유용한 도구가 될 자가 있다면 약점을 잡고 협박할 것. 그렇게 절대 배신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만을 위한 종으로 만들 것.
넌 이제 내 노예다, 개새끼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아니, 정확히 봤어.
패인은 너보다 내가 상대를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거지.
나는 고독이 모용을의 몸에 자리 잡는 것을 확인한 후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고독의 모체를 꿀꺽 삼켰다.
모체는 독성이 없기 때문에, 내 안에 위치한 자리만 안다면 내공으로 바로 태워버릴 수 있다. 이러면 녀석이 모체를 훔쳐가는 일 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별달리 내게 해가 되는 짓만 안 한다면, 이 벌레가 네 목숨을 노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거 하나는 장담하지.”
“거기에 네 목숨까지 걱정해야 하는 거겠지? 씨발,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네놈 좋은 짓은 안 하는 건데.”
“서로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도록. 네 형님도 볼 일을 마치고 나올 때가 됐어.”
모용을은 목에 흐른 피를 훔치고는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