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때마침 홍령은 금태양이 운기행공을 하는 틈을 타 주변을 구경하러 나간 참이었다.
호법도 세워놨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금태양도 홍령도 그런 생각이었지만 정작 그 호법이 안으로 들어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 보자.’
그렇다고 모용을이 운기행공 중인 금태양을 방해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집중을 깨트릴까 기척을 낮추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리고 금태양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뒤진 것은 금태양의 왕진가방이었다.
처음 반야원에서 금태양이 이것을 들고 다닐 때부터 모용을은 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금왕공방에서 만들어낸, 주사기를 닮은 약침과 청진기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의학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모용을이 찾고 있는 건 이게 아니었다.
다음은 한 편에 놓여 있는 서찰 보관함이었다.
‘여기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지.’
금태양에게 온 서찰을 모아둔 상자. 그 안에서 모용을은 몇 개 중요해 보이는 서찰을 꺼내 훑었다.
하나는 청화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의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경과보고였다.
「 ……해서 이번에는 금 의원님이 말씀하신 조건을 지킬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기한 내에 실패했을 때는 이게 정말 될까 싶었는데, 금 의원님이 떠나 계신 사이에 다들 눈부신 성장을 거두셨어요! 돌아오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모두들 금 의원님이 돌아오시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물론 저도요! 꼭 내단이 기다려져서는 아니에요!) 부디 몸 건강히 지내세요! ― 청화 올림 」
일전에 청화가 의원들을 지도하는 일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내단을 건 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아슬아슬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걸로 끝내기엔 아쉬웠기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는데, 이번에는 성공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내단에 관한 부분이 모용을의 흥미를 끌긴 했지만 그가 찾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다음 서찰을 집어 들었다.
「 리입니다. 삼촌께선 무탈하게 지내고 계신지요. 오늘은 태양의원 가맹을 하고자 신청한 의원들의 집계에 대해 전해드리고자 붓을 들었습니다. 현재까지 총 53개의 의원이 무당의 산하에서 나와 태양의원 가맹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조사해본바 하나같이 실력과 명망이 있는 이들로, 차후 삼촌이 주관하는 실력 검증에도 응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사전에 참고하시라고 이들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함께 동봉합니다.
이 건으로 무당에서 항의가 들어왔지만, 사전에 조사한 대로 의맹의 규율상 아무 문제가 없음을 지적해 돌려보냈습니다. 관련해서 앞으로도 방해가 예상되지만 아직까지는 제 선에서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한참을 썼다가 먹으로 다시 지운 자국이 이어졌다가)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른 일은 이 금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태양의원에 대해서는 염려 마시고 삼촌께서는 가신 목적을 충분히 이루신 후 돌아오시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금리의 편지는 제법 내용이 길고 동봉된 보고서도 있어 모용을은 한참을 그 내용을 훑었다.
혹시 그 안에 모용을이 찾는 내용이 암호로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용은 정직하게 가맹을 신청한 의원들을 조사한 보고서일 뿐이었다.
‘설마 내 추측이 틀린 것인가?’
모용을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서찰들을 잘 접어 넣어놓았다. 아직 남은 게 있었다. 금태양이 관자재암에서 올 때 짊어지고 온 봇짐이다.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면 자신이 들고 다녔을 것이다.’
여기라면 모용을이 짐작했던 것을 증명하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연등회가 한창인 밖을 구경 다니던 홍령이 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아니? 미친?! 저게 뭐 하는 짓이야?!]
금태양이 운기행공을 마칠 때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모용을은 건드린 것들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은 채였다. 때문에 홍령은 모용을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이 미친놈아! 그거 내려놓지 못해?! 건드리지 마!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홍령은 귀신이다. 사람에게 다소의 오싹함을 줄 수는 있어도 금태양에게 빙의하지 않는 이상 실제로 물리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모용을처럼 무공의 수위가 어느 정도 이상에 오른 무인이 귀신으로 인한 오싹함을 느낄까.
[미치겠네. 이런 놈을 믿고 내가, 어휴! 아, 그건 안 돼! 그건 진짜 안 된다고 이 망할 새끼야!]
모용을이 집어든 것은, 금왕의 위패 안에 숨겨져 있던 보물지도의 사본이었다.
야옹!
홍령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문이 살짝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온 금동이가 모용을에게 덤벼들었다.
“이건 뭐야?”
모용을은 한 손으로 휙 금동이를 내려쳤다. 금동이는 공중에서 한 바퀴 굴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곤 눈을 빛내며 털을 비죽비죽 세웠다. 일대의 산신을 무릎 꿇린 기세가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려는 찰나.
[안 돼! 지금 그러면 이 사람이 위험해!]
운기행공 중인 사람 곁에서 거센 기파를 뿜어내면 기혈이 뒤틀릴 위험이 커진다. 홍령의 말에 금동이가 하악질을 해대며 기세를 갈무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용을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반면 모용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금동이를 한 번 흘낏 보고는 다시 보물지도를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물에 젖은 습자지처럼 흐릿한 홍령의 유체가 천천히 금태양의 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어나욧! 어서!]
* * *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내리쳤다.
아니, 충격이 있긴 했는데, 뭔가 몸이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홍령이 다급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난 것도 같은데?
“……금태양?”
그보다 지금 상황이 이상했다.
나는 분명 적어도 한 시진 넘게 걸리는 운기행공에 들어갔고, 진은 내 호법을 서준다고 했다.
그런데 체감상 시간은 반 시진도 안 지난 거 같고, 내 호법을 서겠다던 녀석이 지금 내 옆에 있단 말이지.
내 짐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고, 녀석의 손에 들린 건―
“무슨 짓이지.”
나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놔.”
무슨 상황인지 전말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아버지의 유품이 녀석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거.
“내놓지 않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는 한 손에 기를 응축하며 녀석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도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법을 서겠다 한 것이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음은 확실했다.
“너무 날 세우지 마. 여기, 받아.”
모용을은 지도를 휙 던지곤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전생의 미드에서 본 용의자들의 모양새와 똑 닮아 있었다.
지도에는 별 이상이 없다. 녀석은 그냥 펴서 내용을 훑어봤을 뿐이다.
[조, 심해요. 그 녀석 수상……]
홍령?!
[주화입, 마 대신…… 귀기……]
급한 상황이라 홍령이 내게 빙의해 주화입마에 따른 충격을 스스로 흡수한 모양이었다. 그 대신 귀기가 훼손당했고.
“미친 새끼.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내게 접근한 건가? 목적이 뭐지?”
“이럴 작정이라니. 도둑질이라든가, 강도라든가, 널 주화입마에 빠트리려던 건 아냐. 오히려 그런 건 내가 지양해야 할 일이지. 운공 중 갑자기 깨어났는데, 몸은 괜찮아?”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녀석이 바닥에 흩어놓은 짐 중 태양보도의 칼집을 발로 튕겨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칼을 잡아 뽑고 녀석의 목에 갖다 댔다.
내가 목을 겨누고 있는데도 녀석은 태연했다. 부아가 치밀어 목에 칼끝을 밀어 넣었는데도, 제 목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는데도 그랬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경동맥이 작살 난다. 점혈을 한다 해도 쉽게 지혈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지.”
“그렇군. 맞아, 영화에서 그런 대사를 많이 봤지. 하지만 넌 날 함부로 해칠 수 없을걸?”
녀석의 말대로, 나는 움찔했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 때문에.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영화, 그 말을 해서? 이 중원에는 없는 것에 대해서? 아, 영화를 잘 안 봤나? 그러면 드라마에서 많이 들은 대사라고 할까?”
“……너, 정체가 뭐야.”
“말했잖아. 김진이라고.”
녀석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두 손을 내렸다. 내가 자신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듯이.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어. 청진기와 주사기, 전생에서 본 것과 거의 흡사한 형태긴 했지만 또 모르지. 그냥 천재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쭉 너를 관찰했어. 뒷조사에서는 크게 증거랄 게 없었지만 왠지 느낌이 그랬거든. 이 녀석, 나랑 같은 타입이다라는 느낌이 왔단 말이지.”
“무슨 타입.”
“봐봐. 지금도 말했잖아. 이 중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타입(type)이라는 말을 쓰겠어? 저 멀리 서역의 언어도 알파벳만 비슷하지 우리가 쓰던 영어랑은 전혀 다르다고. 너는 나와 같은 전생을 갖고 있어. 맞지?”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나 말고도 전생의 기억, 그것도 21세기 현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하나가 있으니 둘이라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확신했지? 네 앞에서 실수를 한 기억은 없는데.”
“맞아. 힌트를 흘려 봐도 영 걸려들지 않더라고. 그래서 모험을 했더니, 빙고!”
녀석이 내가 쥐고 있는 아버지의 유품, 비밀지도를 가리켰다.
“혼자 보려고 적어둔 거야? 영어랑 중국어, 일본어를 사용한 암호 같던데. 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글자인가 했어. 변형이 심해서 말이지.”
지도를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몇 날 며칠을 들여다보며 이제 그 모양을 외울 수도 있을 지경인데, 그게 그림이 아니라 문자였다니.
지도의 모양을 떠올려보면, 그랬다. 알파벳과 현대 중국 간자체, 그리고 일본의 문자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그림이 아니라 글이다.
“아무튼 몰래 잠입해서 짐을 뒤진 건 사과할게. 다시 말하지만 운기행공 중인 너를 해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어. 겨우 나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안 그래?”
내가 보물지도의 정체에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녀석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행동할 생각은 아니었어. 천천히 친해지면서 실마리를 캐려고 했는데, 너는 관자재암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나는 이번 연등회가 끝나면 한참 동안 요녕 땅에 붙박여 있어야 한단 말이지. 꽤나 조급했고,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