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이리 모여주어서 고맙소. 다시 한번 소개하니 모용세가의 모용갑이오.”
“에이, 너무 딱딱하다 갑아. 나랑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당 소협들 하고도 이제 친해질 텐데 편하게 말하지? 안 그렇습니까, 당 소협?”
“그렇지. 황보겸 소협의 말이 맞아! 편하게 하자고.”
“하자고!”
“그렇게들 말하니 말을 놓지. 모용가의 연락에 이리 응해주어 고맙네. 각 집안의 가주들께서 생각이 일치하셨다는 뜻이겠지.”
분명 다른 녀석들은 친근하게 말을 놓자는 거 같았는데, 모용갑은 자기가 우두머리라도 된 듯 근엄하게 굴고 있었다. 딱히 저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모용가가 먼저 연락을 넣었다잖아요. 무슨 작당모의를 하려고 모인 건진 모르겠지만, 그럴 땐 먼저 말 꺼낸 사람이 주도권을 쥐긴 하죠.]
“우리 모용가는 오랜 세월 변방에 위치하여 중원으로 나설 수 없었지. 몇 번의 시도는 있었으나 중원 내 다른 이들의 입지가 굳건했으니까.”
“구파일방!”
“맞아. 이게 다 구파일방의 견제 때문이지. 다들 이에 공감할 거라고 믿네.”
“아무렴, 그렇고말고. 우리 당가도 사천제일이라 불리긴 하지만 별것도 아닌 아미, 청성, 점창파 따위에 둘러싸여 사천 성도 이상으로는 세력을 불리지 못하는 처지야. 어른들은 익숙해졌는지 크게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구파일방의 이름에 짓눌려 살아야 하나?”
“맞아, 맞아!”
“아미와 청성, 점창파라. 사실 무당이나 소림 같은 거대문파에 비하면 조촐하기 짝이 없는데도 구파에 들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고 있네. 반면 우리 오대세가는 그 역량에 비해 너무 과소평가되고 있지.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네.”
“안 참으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갑?”
“그러니까 여기에 동도들을 불러 모은 거 아닌가. 사실 이런 얘기는 가주님들끼리 모여 하는 것이 옳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우리끼리 먼저 논의를 해보려는 것이지. 또, 일이 잘 된다면 새 시대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겠는가?”
“그러취!”
녀석들은 벌써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러다 모용갑이 웃음을 멈추었다.
“나는 모용세가의 차기 가주인 모용갑. 요녕 일대의 패룡으로 불리고 있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자기소개 시간인가? 나는 황보겸이야. 갑처럼 패룡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별호는 없지만 풍류에는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지! 내 검에 온몸이 녹아내린 여인들의 수만 수천이야. 이 일대는 소림승들뿐이라 괜찮은 곳이 잘 없지만 언제든 내키면 내게 얘기하라고!”
“나는 당랑, 여기는 당철. 보다시피 쌍둥이이고, 우리 둘이 함께 차기 당가주지. 사천 일대에서는 각각 암룡과 독룡으로 불리고 있어. 잘 부탁해.”
“잘 부탁!”
서로 통성명을 나눈 이들의 시선이 당씨 형제의 옆, 다과상 하나 받지 못한 채 하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당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친구는 누구지?”
“아, 우리 덜떨어진 동생. 집 나가서 통 소식이 없기에 어디서 뒈진 줄 알았더니, 와보니 여기 있기에 겸사겸사 데리고 왔어.”
“데리고!”
“덜 떨어지다니. 그래도 사천당가의 직계 아닌가?”
“아니, 진짜 덜 떨어졌다니까.”
당랑이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타고나길 왼손잡이인 데다 독이며 암기며 뭐 하나 제대로 다루는 게 없어서, 직계 주제에 검을 배웠다고. 믿어져? 사천당가 직계가 암기가 아니라 검을 쓴다는 게? 그마저도 실력이 일천해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녀석이지.”
“그래도 잘만 키우면 형님들을 잘 보좌하겠지. 앞으로의 대계에 있어서 유용한 손은 하나라도 필요한 법. 그대들이 잘 이끌어 주지그래?”
“모용 소협이 뭘 몰라서 그러는데. 이 자식은 진짜 답이 없다니까? 나도 철이도 어떻게든 내 동생답게, 당가 직계답게 만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 아예 저놈의 왼팔을 싹뚝 잘라버릴까도 했다니까. 없으면 어떻게든 제대로 오른손을 쓸 거 아냐?”
“깔깔깔깔!”
당랑과 당철이 폭소를 터트렸다. 황보겸과 모용갑도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키득거렸다. 하지만 나는 당당의 몸이 아까보다 더 떨리는 것을 보았다.
……농담이 아니었겠지.
“병신 새끼.”
당랑의 나지막한 욕설에도 당당은 대꾸하지 못했다. 내가 알던 그 당당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뭘 가만 앉아서 듣고 있어? 그냥 나와.]
내가 보낸 전음에 당당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 더 있어봤자 하등 쓸모없어. 그냥 박차고 나와. 저 녀석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나는 당당의 반응을 이해했다.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다 보면 사람은 주눅이 들고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져도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다시 구원받을 곳 없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저 자식들이 무슨 수라도 쓰려 하면 내가 나설 테니까. 그만 질질 짜고 나와. 사천당가라며?]
세 번째 전음을 보내고 나서야 당당이 눈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야, 어디가?”
“어디가?!”
하지만 당당은 그들의 물음을 무시하고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아깝다. 이럴 땐 문을 쾅 닫아줘야 속이 시원한 법인데요.]
그 정도까진 어렵겠지. 그래도 저 상황에서 형들의 말을 무시하고 나온 것만으로도 잘했다.
“하, 미친 새끼. 성도에 있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기라도 했는데. 밖에 싸돌아다니니까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
“가정교육, 가정교육!”
“가정교육은 나중에 형제들끼리 있을 때 하고, 일단은 우리 얘길 먼저 하지.”
더 이상 녀석들의 얘기는 들을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아까 왔던 통로를 그대로 돌아 밖으로 나왔다.
당당은 그새 나와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을 테니 쪽팔릴 만도 하지.
녀석이 얘기하기 전까지는 나도 없는 일처럼 굴기로 하고 일단은 다시 내 거처로 향했다.
[어?]
그리고 그곳에서 또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진, 여긴 무슨 일이야?”
아니지. 의외라고 하긴 좀 그런가? 진은 사실 모용세가의 둘째아들이고, 적자가 아닌 서자라 형인 모용갑의 부하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모용갑이 융중다원에 와 있으니 진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다.
진이 있는 곳이 모용갑이 있는 곳이 아니라, 내 거처 앞이라는 건 좀 이상하지만.
“아, 왔구나. 못 볼 줄 알았는데.”
“날 보러 온 거였어?”
“형님 따라서 융중다원에 왔다가 네가 있나 싶어서.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달리 할 일도 없어서 와봤어.”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내려왔지. 서서 얘기하긴 그렇고, 안으로 들어갈까?”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소림에 가야 하는데 아직 시간 있거든. 내 차림새가 좀 꾀죄죄해서 손님을 대접하긴 그렇지만.”
“꾀죄죄하다니. 멋진걸. 관자재암에서 오는 거지? 네 소문 들었어. 금남의 구역인 관자재암에서 엄청난 수술을 해냈다며?”
벌써 그렇게까지 소문이 났나? 소림이야 관자재암이 자기들 영역 내에 들어와 있기도 하고, 그들도 의술을 하니까 소문을 빠르게 접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 세가는 자기들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의술을 발달시켰잖아요. 모용세가도 그래서 관심이 많은 거 아니에요?]
아, 그렇지. 그러면 모용세가도 체질적인 특징이 있는 걸까?
“네 소식은 일부러라도 찾아 듣고 있어. 친구잖아? 멋있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에이, 존경까지야.”
“아냐. 진심이야.”
진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너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어. 뒷조사를 한 건 아니고, 아니지. 형님이 알아보라고 한 거니까 뒷조사려나? 아무튼, 태어났을 때부터 천형의 병으로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집을 나와서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명의로 발돋움했다며. 자기 이름을 건 의원이 무당이 주름잡고 있는 호북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며 확장세에 있고.”
틀린 말은 아닌데 괜히 부끄럽군. 진이 너무 진지하게 얘기를 해서 그런가?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진의 눈동자 안에선 불꽃이 튀고 있었다.
“나는 가주의 아들이지만 그래 봤자 서자야. 요녕 땅에선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형님의 한 마디면 흙바닥에 머리를 박아야 하는 신세지.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 난 그런 대우를 받을 존재가 아니니까.”
진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 일그러진 입술. 짓밟힌 자존심과 무너진 오만함이 담긴 눈빛. 표독스럽고, 그 지독한 감정을 어디엔가 쏟아버리고 싶어 못 참겠는 얼굴.
그 표정이 일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번 중원 행에서 기회를 잡고 싶어. 너를 내 멘, 아니, 롤모…… 그래, 모범으로 삼아서.”
뭐지. 방금 익숙한 단어가 들렸던 거 같은데.
착각인가?
“도와줄 거지? 친구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야. 나도 너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 그 일은 사실 모용가 사람으로서 결자해지 했어야 할 일이니까. 오히려 내가 너의 도움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진은 다시 생긋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날 대접하기보다는 일단 네가 쉬어야 할 거 같은데. 운기행공 할 거지? 호법 서줄까?”
“어, 그럴 거긴 한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뭘 사양하고 그래, 친구끼리. 호법 없이 운기를 서면 위험하잖아. 형님이 나올 때까진 오래 걸릴 거야.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마.”
창천 녀석도 안 보이고, 당당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니 호법을 맡길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다원에서 무슨 위험한 일이 있겠냐만은, 일단 운기 중에 호법을 세워서 나쁠 건 없고.
[혹시 모르죠. 모용갑이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 또 시비를 털러 올지도. 설마 진이 나쁜 제안을 하는 거겠어요?]
그건 그렇지?
아까 본 표정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나만 해도, 전생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금가장에서 보낸 이십 년 세월이 서러움과 억울함으로 점철되었을 테니.
그런 상황 속에서 젊은 혈기에 울분이 쌓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러면 부탁할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는 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은 자기만 믿으라며 문을 닫고 나갔다. 관자재암에서는 도통 집중해서 운기 할 시간이 없어서 영 뻑적지근했던 게 사실이다.
요 근래 몸이 좀 이상한 건 사실이란 말이지.
내 몸 상태에 비해서 계속해서 무리한 일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전에는 운기행공을 공들여 하면 컨디션이 괜찮아졌는데, 요새는 그게 잘 안 됐다.
이러다 한 번 큰일 나기 전에 시간을 내서 체내 기운을 바로잡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호흡을 하다 나는 이내 깊은 명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금태양이 운기행공에 깊이 집중해 들어간 직후.
문이 열리더니, 모용을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