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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65화 (165/350)

165화

저거군.

최근에 부러진 것 같은 나뭇가지와 절벽에 매달려 우거진 덩굴이 보였다. 가지를 붙잡고 살짝 몸을 튕겨 반동으로 절벽에 가까이 붙은 후, 나는 손가락을 벽면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동굴 쪽으로 벽을 타고 움직였다.

[좋아, 잘했어요! 연습 때 외에 하는 건 처음인데, 잘하네요!]

벽호공이라는 무공인데, 처음 화산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홍령이 제일 먼저 가르친 거였다.

화산의 무인이 절벽 하나 못 타서는 말이 안 된다나?

멋진 검공부터 배울 줄 알았는데 벽 타기가 먼저여서 좀 당황했지.

[그래도 처음인 거치곤 잘하던데요? 뭐더라, 암벽등반? 그거 해봤다면서요.]

잠깐 깔짝인 정도지만, 역시 사람은 뭘 배워놔서 손해 볼 게 없다니까. 전생에 좀 해본 게 다시 태어나서도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았겠냐고.

마침내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해 수풀을 발로 차보자, 확실히 절벽이 있어야 할 곳에 발이 쑥 들어갔다. 그대로 반동을 넣어 수풀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흑호의 말처럼 동굴이 존재했다.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안이 제법 밝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 천장을 봐.

[천장이요? 어?!]

천장이며 벽 여기저기에 뾰죽뾰죽 튀어나온 광물. 그 광물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야명주잖아요?!]

흑호가 절벽에 위치한 이런 좁은 동굴을 왜 알고 있나 했더니. 이 야명주 때문인가 보군.

호랑이가 보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야명주는 방사성 결정이니까 말이지.

오래 쐬면 방사능에 노출될 수 있지만 적절히 이용하면 상처를 소독하는 등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 흑호가 오래도록 살아남아 산신이 된 데는 이 야명주 동굴의 영향이 클지도.

으윽―, 흑.

그리고 안에서 고통을 억눌러 참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군주?”

흠칫 숨 참는 소리. 그러나 그게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건 모르는군.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찾던 존재가 보였다. 간소하지만 고급스러운 궁장은 엉망이 된 채고 얼굴은 고통을 참느라 잔뜩 일그러진 여인. 두 손으로 단단히 쥔 은장도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수상해 보이는 건 알겠는데, 당신을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관자재암을 돕고 있는 의원 금태양이라고 하죠. 양원, 양진 두 스님이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제갈세가의 제갈다영도 당신을 찾고 있고요. 친분이 있다죠?”

내 신분과 이름을 밝혔을 때는 꼼짝도 않던 경계가 두 스님과 제갈다영의 이름을 언급하자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아직도 다가오면 저 은장도를 휘두를 기세였다. 이대로 빠르게 접근해 은장도를 치워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계속 그렇게 날 경계해도 괜찮겠습니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될 텐데요.”

은은한 야명주 조명 아래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양수가 터졌다. 방금 터진 것도 아니고, 좀 된 거 같은데.

“추적자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 초인적인 인내로 참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러면 곧 탈진합니다. 추적자도 물러났는데 그대로 애까지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경계는 그만하시죠. 일단 진맥부터 합시다.”

내가 다가가자 군주는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은장도에서 한 손을 빼어 팔을 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은장도의 끝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이 공격을 가한다 해도 나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은장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맥을 짚었다.

“쌍생아라고 말은 들었지만 확실히 아이가 하나 있는 거랑은 맥이 다르군요. 하지만 상태가 안 좋아요. 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그자들에게 쫓기기 직전이다.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온 거 같더군.”

군주가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주치의가 함께 있어 급하게 출산을 하려고 천막을 치는데 그자들이 찾아왔고, 시녀들이 나를 도주시켰지. 몇몇은 같이 절벽으로 떨어졌다. ……살아는 있을는지.”

그렇다면 양수가 터지고, 진통을 하루 넘게 참았다는 건데.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기적인 셈이다. 하긴, 사람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했지.

“지금 상태로 봐선 함부로 이동할 수는 없어요. 여기서 낳는 수밖에 없겠는데.”

내가 업고 달릴 수는 있지만 지금 이 몸 상태에서 신법을 발휘한 속도로 몸에 부하를 준다고? 달리다가 애가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니지, 그 정도면 다행이고. 애나 군주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이―.”

“남자지만 애를 받아본 경험은 있습니다. 관자재암서 며칠 전부터 출산을 계속 도왔으니까. 그리고 경험이 없다 해도,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으윽…… 알았다! 그대 의원이라고 했지? 금태양, 그 석 자를 내가 기억하고 있겠다. 정왕 전하께 말씀드려 필시 합당한 보상을, 아악!”

긴장이 풀렸는지 군주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나는 옷을 풀어 상태를 확인했다.

……미치겠네.

쌍생아인 걸로도 위험성이 다분한데, 악재가 겹쳤다.

[태반 너머로 보이는 거, 발이죠?]

그래. 태반조기박리에 역아. 어젯밤 비명에 간 산모의 아기와 상태가 똑같다.

거기에 이번에는 쌍둥이인 상황.

[아기의 맥도 좋지 않았잖아요. 서둘러야겠어요.]

“태반이 먼저 나왔고 아이가 발부터 보입니다. 상황이 괜찮다면 그냥 분만을 시도해 봤겠지만, 이미 진통이 시작된 지 하루가 넘었어요. 위험합니다. ……운이 나쁠 경우, 이미 한 아이는 뱃속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어요.”

“뭐, 뭐라?!”

“운이 나쁠 경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빨리 손쓰지 않으면 죽은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될 수도 있어요.”

“아, 안 돼! 살려다오, 뭐라도 하겠다! 아이를 살려준다면 무엇이든 좋다. 아악!”

“방법은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태로 분만을 하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나는 간략하게 제왕절개에 대해 설명했고 군주는 통증을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경우에도 군주만큼은 살 겁니다. 그러면 다시 아이를 가질 수는 있겠죠.”

“으윽…… 알았다. 맡기겠다.”

군주는 찰나간 고민하더니 이내 내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은장도를 쥐여 주었다.

[좋아, 시작하죠.]

우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군주의 혈을 점해 환자를 가사상태에 빠트렸다. 그리고 지금 가진 것들을 점검했다.

태양보도와 방금 받은 은장도, 크기가 다른 두 자루의 단도. 항시 상비하는 몇 개의 침. 그리고 한 모금 정도의 고도주가 전부다.

이 동굴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것만큼은 천운이었다. 시야 확보와 소독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지만, 그래도 해내야 했다.

절개 부위를 가늠하고 칼을 대자 피가 왈칵 배어 나왔다. 이 이상 점혈을 하면 오히려 군주가 위험해진다. 닦아내고 시야를 확보하려면 천이 필요한데, 있는 거라곤 흙먼지 가득 한 옷자락뿐.

이거라도 쓰는 수밖에 없나?

먁―!

[금동아! 아이고, 이뻐라! 이거 봐요, 얘가 천을 물고 왔어요! 깨끗해요!]

위에 두고 왔던 금동이가 어느새 제법 많은 천을 물고 왔다. 이 산중에서 어떻게 고급 광목을 이만큼 가져왔지?

[시녀들이 같이 떨어졌다면서요. 그들이 갖고 있던 거 아닐까요?]

확실히 흙먼지와 낙엽 등이 좀 붙어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입고 있던 옷에 비해선 깨끗했다. 완만하게 D자를 그려 절개한 부위에 피를 닦아내고, 피부, 지방, 그리고 근육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절개해 들어갔다. 차후 꿰맬 거까지 생각하면 깔끔하게 절개해야 했다. 하지만 속도도 빨랐다. 불투명한 막이 보일 때까지 절개하는 데 반 각도 안 걸렸으니.

[이게 태반인가 봐요!]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은장도로 태반을 찢자 맑은 양수가 터져 나왔다. 그 안에 아이의 머리가 보였고, 나는 손을 집어넣어 아기의 머리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쑥 뽑아냈다.

“일단 하나.”

아이의 몸을 닦고 콧물을 빨아 숨을 쉬게 만든 후 탯줄까지 끊어 천으로 둘둘 감아놓고, 두 번째 아기를 찾았다.

“으윽, 흐윽…….”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데도 군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낯색도 하얬다. 급히 맥을 짚어보니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출혈이 너무 심해요.]

예상보다 피가 많이 흘렀다. 출혈을 닦아낸 천이 한가득 쌓였다. 긴장과 스트레스로 혈류가 빠르게 돌았나?!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군주는 포기하고 아이를 빨리 꺼내는 것만이 답인가?

……맞아. 그게 있어.

나는 품을 뒤져 작은 꽃가지를 꺼냈다. 붉은색, 분홍색, 그리고 흰 꽃이 피어 있는 가지. 품에 아무렇게나 넣어놨는데도 꽃잎이 망가지지 않은 것이 신기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피살이 꽃! 맞아요, 그게 있었죠!]

좌수검이 소림에게서 받은 교류의 증표 중 붉은 꽃잎을 떼어 절개 부위에 내려놓았다.

제발, 제발!

빨간 꽃잎은 절개 부위에 닿자마자 사르륵 녹았다. 마치 살갗에 닿은 눈송이 같았다. 핏물이 된 꽃잎은 그대로 절개 부위에 흡수되었다.

[……혈색이 돌아와요!]

좋아. 두 번째 아이를 꺼내자.

마찬가지로 태반을 찢어 양수를 닦아내고 아이를 꺼냈다. 이번 아이는 발이 보였던 그 역아였다. 발을 붙잡고 아이를 쑥 빼내고 같은 과정을 거친 후 안에 남아 있는 태반 두 개를 꺼냈다.

다시 군주의 맥을 짚어보니 상태가 괜찮았고 그대로 태반 정리를 마치고 봉합을 하려던 때.

―뭔가 찝찝해.

나는 다시 안에 손을 넣었다. 아기들을 꺼낸 것보다 좀 더 위쪽, 그 안에도 뭐가 있었다. 또 하나의 태반이다.

[둘이 아니라 세쌍둥이였군요!]

아기가 둘이라 해도 부른 배에 비하면 좀 작다 싶었지.

하마터면 애를 그대로 넣어둔 채로 봉합을 할 뻔했다.

마지막 아이의 태반까지 정리한 후 봉합을 하는데 실이 모자랐고, 나는 또다시 꽃가지를 꺼내 분홍색 꽃을 떼었다. 기왕 쓰는 거 흰 꽃도 떼었다. 이렇게 귀한 걸 한 번에 다 쓰다니 아깝지만, 그만큼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겠지.

분홍 꽃을 봉합 중이던 살갗에 내려놓자 아까와 같이 꽃이 물처럼 녹아 살에 스며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살이 차올랐다.

[뭐, 뭐예요?! 이런 게 진짜 세상에 존재한다고요?!]

절개 부위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물었다. 완만한 D를 그리는 약간의 흉터만이 제왕절개 수술의 흔적을 알려줄 뿐이었다.

흰 꽃도 녹아들고 군주의 몸 여기저기서 우득우득 소리가 났다. 임신으로 인해 벌어진 뼈들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 출산 후 여자들은 영양분을 전부 아기에게 줘서 뼈가 약해진다니 그런 쪽으로도 도움이 될 거다.

꽃을 다 뗀 가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파스슥 부서지더니 이내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앗, 아깝다! 가지도 무슨 효능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말이에요.]

아쉽지만 이미 사라진 거 어쩔 수 없지.

큰 비용을 들였으니 군주를 이용해 제대로 홍보 효과를 누리는 수밖에.

……뭐, 그건 둘째 치고, 당장은 진이 빠진다.

죽겠네.

[긴장 풀리니까 힘 빠지죠? 내가 빙의한 것도 아닌데 잘했어요. 이제 내가 없어도 될 거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어머, 어쩔 수 없죠.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줄게요.]

실없는 농담을 하며 군주의 옷을 정돈한 후 아기들을 챙겼다. 세쌍둥이라 그런지 지금껏 봐왔던 아기들에 비하면 작지만 맥은 건강했다.

특히 셋째는 유독 작아서 좀 신경이 쓰였는데, 한 번 우렁차게 울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내가 녀석의 존재를 눈치 채고 꺼내준 걸 알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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