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냐아―
금동이가 기분 좋다는 듯 낙엽을 떼어주는 내 손에 온몸을 비비적거렸다. 며칠 만에 보는데도 반가운 기색이었다.
며칠 만에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금동이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산모와 신생아가 많은 강당 안으로 동물을 들일 수가 없었다. 면역력 문제도 있고,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다행히 내 그런 사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한 번 눈앞에서 문을 닫자 그 뒤로는 주변 산을 쏘다니며 놀다가 잘 때면 내 거처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이 일대에도 호랑이나 표범 등이 돌아다닌다 해서 좀 걱정은 됐지만, 무한의 수의 출장소에서도 웬만한 동물들을 기세로 눌러버린 데다가 사람의 말도 이해하는 영리한 녀석이니까.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자주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뭘 미안해요. 여기가 아주 제 놀이터던데. 저번에 자러 들어왔을 때 못 봤어요? 코며 발바닥이며 새빨개서는, 혼자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낸 거 같던데요?]
그렇긴 해도 마음이 쓰이잖아.
금동이의 몸에 붙은 낙엽이며 먼지를 다 떼어주고 같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금동이가 내 바짓단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왜 그래? 나 쉬러 가야 하는데.”
먁―!
사실 왜 이러는지는 안다. 이럴 땐 따라오라는 거다.
“알았어. 뭐 보여줄 건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금동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 봤더니, 우리 의원으로 오다가 중간에 실신해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땐 좀 대단하긴 했어요. 금동이가 아니었으면 그 환자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을걸요. ……뭐야, 왜 그렇게 봐요? 따, 딱히 금동이가 괜찮아진 건 아니거든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고요!]
그래, 알았어. 그렇다고 쳐줄게. 귀신이 소름이 돋을 수도 있지.
[진짜라니까요?! 어휴, 내가 억울해서!]
홍령과 말을 주고받으며 금동이 뒤를 따라가다 보니 제법 깊은 산 속으로 접어들었다. 더 가는 건가? 그때 금동이가 멈췄다.
어?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토끼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냥 토끼였다. 잡아놓은 사냥감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닌 토끼.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러나?
헌데 좀 이상했다. 토끼는 몸을 바르르 떠는 거 같더니, 이내 금동이의 앞을 뛰어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토끼가 빠르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라니?! 이에 질세라 금동이도 토끼를 쫓았다. 그리고 나도 금동이를 따라 달렸다.
[뭐지? 사냥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사냥을 한다기보단, 글쎄다, 달리기 경주?
[그렇다고 하기엔 금동이가 딱히 앞서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요.]
정말 그랬다. 제법 먼 거리를 달렸다 싶을 즈음 토끼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뭐지? 대체 뭘까요? 잠깐만, 저건 또 뭐야?]
이번엔 사슴이었다. 화려하게 자란 뿔과 맵시가 참 아름답고 멋진 수사슴이었다. 그런데 이 사슴도 금동이와 눈이 마주치고는 바르르 떨더니, 또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역시 금동이도 나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있잖아요, 내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말이에요.]
너도? 나도.
[그죠? 이 동물들, 아무리 봐도……]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거 같지?
홍령이 토끼와 사슴의 말을 들은 건 아니라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토끼와 뛴 곳도 그렇게 평탄한 곳은 아니었지만, 사슴은 우리를 험지로 데려갔다.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을 훌쩍 뛰어넘고는 우리가 넘어오길 기다렸고, 우리가 넘어오면 다시 앞을 보고 뛰었다.
그렇게 절벽을 몇 개나 넘었을까.
사슴이 멈추고 우리를 잠깐 보더니 이내 왔던 길로 쌩하니 돌아갔다.
[이번엔 뭘까요?]
당황스럽지만 동시에 좀 재밌는 상황이었다. 신법을 발휘해 한참을 뛴 덕인지 밤새 일한 피로가 되레 날아간 것도 같았다.
그때, 검고 커다란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잖아.”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호랑이, 그것도 엄청나게 큰 호랑이였다. 집채만 한 크기에 짙은 회색과 검은 줄무늬가 조화를 이룬 흑호(黑虎)가 금빛 안광을 빛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반 발짝 뒤로 물러났는데, 홍령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군, 아니, 저 정도면 산신 급인데요. 소림의 숭산이니까 저만한 산신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지만, 기세가 엄청나네요.]
귀신마저 긴장하게 할 정도의 호랑이라니. 주먹 쥔 양손에 땀이 배었다.
으르르―
[당신이 마음에 안 드나 본데요.]
저걸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가진 건 태양보도 한 자루뿐이다. 리치가 짧은 단도 하나로 호랑이를 맞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금동이를 안전하게―
흑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허리를 낮춰 금동이에게 손을 뻗으려 한 순간, 금동이가 뒷발을 박차고 점프했다.
그리고, 흑호의 콧잔등에 올라탔다.
[아니, 쟤가?!]
“금동아! 위험해!”
내가 흑호에게로 달려들어 금동이를 낚아채려는 찰나, 금동이의 앞발 두 개가 흑호의 콧잔등을 후드려 팼다.
퍽퍽, 퍽!
그 직후 금동이를 낚아챘지만 나는 도망가거나 공격을 위해 자세를 잡지 않았다.
왜냐고?
[……뭐, 뭐예요? 저 솜방망이가 때리는데 뭐 저런 소리가 나요?]
아니, 그보다 방금 흑호의 머리가 돌아갔어. 금동이가 한 대 칠 때마다 좌우로 홱홱……
우리가 당황한 사이 금동이의 솜방망이질에 콧등을 야무지게 얻어맞은 흑호가 그 자리에 넙쭉 드러누웠다. 내 품에 안긴 금동이가 흑호를 향해 다시 한번 하악질 했다.
[……아예 배 까고 누웠는데요.]
배 까고 눕는 게, 항복의 표시랬지?
산신 급 호랑이가 인간 앞에서 배 까고 눕는다라니. 어지간히 이야깃거리가 궁한 호사가도 무슨 뻥을 그렇게 성의 없이 치냐며 콧방귀를 뀔 수준이다.
내가 슬금슬금 다가가도 흑호는 얌전히 있었다. 마치 배를 긁어달라는 양 발톱을 숨긴 앞발로 내 손을 잡고 배에 갖다 댔다. 북슬북슬한 배털을 슬슬 긁어주는 데도 흑호는 얌전히, 아니 정확히는 내 품에 안긴 금동이의 눈치를 봤다.
[그러니까 그거죠? 어딜 그런 눈으로 봐? 눈 깔아! 그런 거죠?]
……아무래도 그런가 본데.
“금동아, 이제 괜찮아.”
냐!
금동이의 울음소리에 흑호가 언제 내게 아양을 떨었냐는 듯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동안 산속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나 했더니. 이 동네 짱을 먹은 모양인데요?]
졸지에 숭산 일대 산짐승들의 서열을 바꿔버렸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좀 당황스럽긴 했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다. 내 새끼가 어디 가서 얻어맞고 다니느니, 짱을 먹는 게 낫지. 아무렴.
그렇다고는 해도, 산신 급 호랑이를 찜쪄먹다니…….
“금동아, 넌 대체 뭐니?”
먀―!
명랑한 울음소리에 피식 웃고 금동이를 내려주자, 금동이는 아예 흑호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흑호도 그랬다.
[……타라는데요?]
들려?
[흑호 쪽이요. 짧게 말하더라고요. 타, 라고.]
너 그렇게 말하다가 금동이한테 또 얻어맞는다.
일단 타라고 하니까, 나도 흑호의 등에 올라타 갈기를 손잡이 잡듯 잡았다. 그 순간 흑호가 날랜 몸놀림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인간이 신법을 발휘하는 것보다 빨라서, 훅훅 지나가는 풍경에 나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으악, 같이 가요!]
귀신마저 따라잡지 못할 속도. 괜히 산신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아까 사슴이 뛰어넘었던 계곡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깎아지른 절벽 틈, 손바닥만 한 잔도(棧道)를 제 집처럼 휙휙 뛰어다니질 않나, 갑자기 산꼭대기서 휙 뛰어내리질 않나. 녀석의 털을 붙들고 안 떨어지게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린 끝에 흑호는 어디에선가 발을 멈췄다. 금동이가 훌쩍 뛰어내렸다.
여긴가?
무슨 이유에선지 각종 산짐승들을 동원해 데려온 곳이니 보통 장소는 아니리라.
[헤엑, 헥…… 진짜 뭘 먹고 이렇게 빠르대요? 아니, 애초에 이런 호랑이를 이겨먹은 금동이는 대체 뭐예요?]
홍령이 숨을 몰아쉬며(?) 쫓아와 투덜거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삼림. 산은 깊고 고요했다.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산신이 아니면 쉽게 엄두를 못 낼 험지를 거쳐 온 만큼 이 일대도 보통은 아니었다. 깎아지른 절벽이 첩첩이 이어지고 두 발을 디딜 곳이 마땅찮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곳인데.
“―여자는 아직 못 찾았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웬 남자의 목소리가 고요를 찢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금동이도 내 뒤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흑호는 자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무심하게 몸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여자가 있대요.]
응?
[여자가 저자들에게 쫓기다 밑으로 떨어졌대요. 절벽 아래 동굴이 있는데 거기 들어간 거 같다나 봐요. 금동이가 심심하다고, 뭐 재밌는 거 없냐고 물어서 가르쳐줬더니, 당신을 데려와야겠다고 했다더군요.]
홍령이 말하는 동안 흑호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금동이 녀석. 내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무작정 구해줄 만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걸까?
“뭔가 있는데?”
금동이를 한 번 쓰다듬어 주려고 하는데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낮추고 키가 낮은 관목 사이로 몸을 숨겼다.
[수상한 자들이군요.]
그래 보인다.
관목의 이파리 사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을 두른 자들이 보였다. 머리는 흰 천을 베일처럼 길게 드리웠고 그 사이에는 눈구멍이 뚫려 있었다. 옷도 전부 하얬다.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는 강박이 느껴질 정도였다.
귀신같군.
그리고 모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며 주변을 주시하는 태도에서 그들이 보통내기가 아님이 느껴졌다.
“……호랑입니다. 기세로 보아선 산신인 듯합니다.”
“호랑이라. 군침은 돌지만 지금 당장은 여자가 필요하니까. 아, 진짜. 몇 시진째인데 그거 하나를 못 찾아? 귀한 핏줄로 보이던데, 기왕 쓰려면 천것들 말고 그런 여자를 써야지!”
저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목소리는 제일 어려 보이는데. 이십 대 초반? 중반?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고.
“더 이상 그 여자를 찾기엔 시간이 모자랍니다. 돌아가시죠.”
“쳇, 쓰기 전에 간만에 콧대 높은 계집을 안아보려 했더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홍령이 그들이 완벽히 떠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 아래란 말이지?”
확실히 사람 하나 찾기에는 지나치게 심산유곡이지만, 정확히 위치를 알고 있다면 구애받을 이유가 없지.
나는 흑호가 말한 곳을 향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