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63화 (163/350)

163화

군주? 그게 뭐야?

[친왕의 따님일 거예요. 황제의 따님은 공주고, 친왕의 따님은 군주죠.]

“……맞다! 어떡해, 아직 안 오셨어요. 우리도 며칠 전에 왔었는데. 금 의원님, 기억나요? 곧 오실 테니까 준비해두라고 전령이 왔었잖아요.”

“아, 그 사람.”

나를 찾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은 와중에도 그 사람은 기억났다. 왜냐면 그 사람이 귀인을 위해 준비해두라고 한 방이 내가 신생아들을 위해 만들어 둔 수술방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 방은 귀인, 그러니까 지금 말이 나오는 군주나 명가의 여인들이 출산을 하러 올 때 사용하는 방이란다. 고귀한 분을 강당 천막에 모실 수는 없으니까.

이미 수술방을 차렸으니 안 된다, 그러면 이후에 아픈 아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떡하려고 하냐 하며 양진과 설전을 벌였었지.

바쁘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넘기고는 그대로 까먹어버렸군.

“여기 오신다는 건 그분도 임신 중이라는 거죠?”

“금 의원님,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복중에 아가님이 있으시다고 말하지 않으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그래, 중요한 건 이거다. 출산을 앞두고 사전에 도착 연락까지 했던 만삭의 임신부가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도착은커녕 연락도 없다는 거.

“이동 중 진통이 와서 중간에 멈췄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사고가 난 거겠군요. 그래도 군주님이면 관도를 이용할 테니 크게 위험할 일은―.”

“그게, 오시면서 명승지와 명산을 거쳐 오신다고 했거든요. 좋은 기운을 받으신다고. 산길을 따라 쭉 이동하신다고 했는데…….”

만삭에 구태여 험한 산길을? 본인이 건강하다면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굳이?

[어차피 군주님이잖아요. 제 발로 올라가셨겠어요? 가마꾼들이 좀 고생했겠지.]

“전령이 왔을 때 군주님 위치가 어디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어디더라…… 란천쯤? 보통 걸음이면 북서쪽으로 사흘 정도 걸릴 거예요.”

군주가 가마를 탔다면 그보다 더 걸리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일단 확실한 게 없으니 기다려봅시다. 새벽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면 그때 생각해보죠.”

군주의 행방이야 내게 급한 일이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일이지.

“그 산모, 아직도 안 되겠대요?”

“네…… 우리가 봐도 위험하다고 사저랑 계속 설득하고 있긴 한데…….”

다시 강당으로 돌아가는 길. 내 물음에 양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통이 시작됐는데 아이 머리가 아니라 태반 일부가 먼저 나왔다. 의술에 있어서 정상과 다르다는 건 위험으로 직결되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아미승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했을 때, 태반이 먼저 나올 경우 태아가 사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태반은 탯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당신 전생의 의학에선 그 탯줄로 아기에게 영양분과 호흡을 전달한다고 했다면서요. 태반이 먼저 나오니 아기가 위험할 수밖에 없죠.]

“아직 분만은 시도 중인 거고, 출혈은 어때요?”

“금 의원님이 가르쳐준 혈을 점혈하니 나아졌어요. 문제는 산모의 몸 상태예요. 금 의원님이 봤을 때보다 심해졌어요.”

“통증이 그 정도예요?”

“진통과 구분이 안 갈 정도인가 봐요. 엉뚱한 때에 힘을 주어서 시간만 지체되고 있어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고 해도 산모는…….”

양진이 말을 흐렸다. 제대로 알진 못해도 경험적으로 그런 상태의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는 거다. 제대로 먹지 못해 바짝 마른 데다가 파리한 안색, 만삭이라고는 해도 지나치게 튀어나온 배, 거기에 결정적으로 생식기의 궤양까지.

암이다.

증상으로 봐선 한 부위가 아니라 여러 부위에 퍼졌을 거다. 과거 암 환우 카페에서 봤던 여러 가지 증상이 혼재되어 있었다. 거기에 아마도 말기, 그런 나쁜 상황에서 출산까지 해야 하는 상황.

[산모의 목숨은 구할 수 없다고 해도 아기라도 구하고 싶은데, 하복부를 이만큼만 절개해서 꺼내면 되는데…… 남자가 손을 대느니 죽겠다는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답답하네요. 하아……]

회음부 절개조차도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산모가 압도적으로 많다. 회음부 절개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빠른 출산을 경험한 산모와 산파들이 입을 모아 이를 권해도 그렇다.

그나마 양진과 양원이 내게 기술을 익혀 그들에게 시술을 받는 경우는 조금씩 늘고 있는데, 제왕절개는 그들에게 섣불리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스님, 스님! 아기가 나와요!”

“나와요?!”

그 산모를 맡고 있는 산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헌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이고, 발이 나왔어요. 발이!”

서둘러 천막에 도착했을 때, 양진은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밖에서 대기했다.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절대 남자 의원을 들일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한 산모였다. 하지만 만약, 만약의 경우라도 나를 필요로 할 수도 있으니까.

“힘줘요! 아니, 지금 말고! 잠깐, 숨 쉬고! 이봐요, 숨을 쉬어요!”

“허억…… 헉…….”

“다리까지 나왔어요!”

“조금만 더 힘을, 아니, 왜 이렇게 뜨겁대?”

“입이 말라요…… 허억…… 아악!”

“아아, 어떡해! 탯줄이 감겨 있어요!”

“이봐요! 정신 차려요!”

양진과 산파의 다급한 고함과 산모의 기력 없는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항상 앓는 소리와 아기 울음소리로 시끄럽던 강당이 그 한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고요에 몸이 서늘했다.

[……들어가 봐요.]

안에 있던 홍령의 말. 착잡함이 가득 배인 말과 고요한 정적이 이미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명했어요. 산모도, 아이도.”

양진은 받은 아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이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죽음들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거야, 싫어…….”

죽은 이를 위해 불경을 외어야 할 비구니는 소리 없이 오열했고, 산파는 지친 기색으로 천막을 나섰다.

나는, 나는…….

씁쓸했다.

제왕절개를 권했던 것엔 나의 공명심도 있었다. 나는 반야원에서 날려먹은 기회를 이곳에서 만회해야 했다. 회음부 절개술로는 약하다. 제왕절개로, 남자가 여인의 몸을 가르고 산모와 아이를 구했다 정도는 되어야 화제가 되고 명성을 얻을 것이다.

그런 계산과는 별개로 지금 나의 기분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의원인데.

명성 이전에, 안 그래도 되니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위험하더라도 산모를 점혈로 제압하고 수술을 하는 게 나았을까.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는데.

산모의 의지를 존중한 내가 잘못된 걸까?

……내가 잘못한 걸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마요. 억지로 시도했다고 반드시 결과가 좋았으리라는 법도 없어요. 우리는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잖아요.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정리하고 몇 번이나 검토했지만, 무조건 괜찮을 거라고 잘 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그만둬요. 아직도 살려야 할 사람이 많아요.]

홍령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맞다. 잠깐의 정적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강당에는 다시 출산을 앞둔 사람과 진통을 호소하는 사람, 아기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금 의원님께 부탁하겠어요.”

어느새 눈물을 닦고 일어난 양진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후의 일은 소승이 어떻게든 책임을 질 테니,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무거운 대답을 마친 후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했다. 사람을 불러 사망자의 시신을 염하고, 다시 진통이 찾아온 환자에게 달려갔다.

어쩐지 평소보다 밤이 길게 느껴졌다. 출산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위급한 사람도 드물었는데 그랬다. 마음이 무거워서였을까.

다음날 오후, 제갈다영이 우리를 찾았다.

“관청에 보낸 사람이 돌아왔어요. 자기들도 군주께서 곧 오실 거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도통 도착했단 소식을 못 들었다고, 어젯밤부터 이 일대를 수색 중이래요.”

제갈다영의 소식에 아미승들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사매, 우리도 군주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요? 나랑 사저를 빼면 금 의원님뿐인데. 지금 누구 하나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럼 여기 있는 산모들은 어떡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사저 마음은 이해해요. 나도 초조하다고요.”

아미파가 황실과 왕실에게 지원을 받고 있거나 군주라는 상대의 신분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하기엔 좀 이상했다.

혹시?

“군주에게 임신부로서 특이사항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게…….”

“그냥 말해요, 사저. 금 의원님도 이제 관자재암 식구나 다름없는데. 군주께서 도착하셨을 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왕실 여인의 사정인데.”

“이잇, 어차피 그 집안사람들은 하인까지 다 알고 있을 텐데요 뭐. 금 의원님, 우리가 전해들은 바로는, 군주께선 쌍생아를 임신하셨대요.”

[쌍둥이를?]

쌍둥이라. 그래서 아미승들이 계속 불안해했군.

“군주께선 몸이 약하신 편이에요. 헌데 쌍생아라 임신 중에도 고생을 하신 듯하고…….”

“제일 걱정되는 건 조산이에요. 쌍생아는 빨리 나오는 일이 제법 많거든요. 출산 전, 출산 중에도 위험한 경우가 많아요. 그뿐인가? 기껏 낳아놔도 둘 중 하나는 상태가 안 좋거나 너무 작아서 쉽게 죽는다고요. 근데 이 상황에 실종까지!”

양진이 불안함을 떨치려는 듯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확실히 걱정되고 불안할 만한 상황이긴 하다. 그런 상태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출산을 하는 건지 더 납득이 안 가기도 하지만.

[불안하니까 더 불심(佛心)에 의지해보려는 거겠죠. 그래도 주치의가 붙은 여행이었을걸요?]

그렇다면 최선은 이동 중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주치의의 인도하에 안전하게 출산을 했다는 건가.

최악은……

“일단 제갈가에서 사람을 풀었으니 안심하세요. 두 분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요.”

“아아, 제갈 소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감사해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갈가는 정왕가와 꽤 친분이 있거든요. 안 나설 수 없죠. 그러니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계속 관자재암을 지켜주세요.”

제갈다영이 생긋 웃었고, 나도 거기서 실종된 군주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안 그래도 군주라는 존재가 별로 안 내켰으니까. 타고나길 나보다 신분이 높은 존재라니. 전생의 로열패밀리보다 더하잖아?

“그럼 우린 이만 쉬도록 해요. 군주께서 무사히 도착하신다 해도 바빠질 테니까. 내가 강당을 보고 있을 테니까 사매와 금 의원님은 쉬어요.”

양원의 말에 양진은 자신의 방으로, 그리고 나도 내가 묵는 방으로 향했다. 이제 곧 연등회다. 관자재암을 찾는 산모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아미승들은 물론 산파들마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푹 쉬지 않으면 앞으로 대처하기 힘들다.

냐―

[히익……!]

방으로 가는데 수풀 속에서 금동이가 툭 튀어나왔다. 이제 그래도 마냥 질겁하지는 않네.

“어딜 갔다 왔기에 온몸에 낙엽이 붙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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