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62화 (162/350)

162화

“스님이 대가로 불공을 제시하면 어쩝니까?”

“그럼 어떡해요, 가진 게 없는데!”

양진이 말한 대로 아미승이 정성들여 올리는 불공이라면 돈을 짊어지고 올 만한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런 믿음 때문에 지금 이 관자재암에 만삭의 임산부가 이렇게 많은 거 아닌가.

“일단 한 가지 정정하죠. 난 무당의가 아닙니다.”

“……예에? 에?!”

“무당과 협의해 위에 정회원을 두지 않고 개별로 의원을 꾸리고 있습니다. 무당에게서는 감초 쪼가리 하나만큼의 의술도 배운 적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로부터 처벌을 받을 일도 없고, 무당이 아미에게 항의를 할 일도 없습니다. 안심해요.”

“이, 이 사람, 날 속였어!”

“속이다니. 말을 하려고 했는데 혼자 앞서나가신 거죠. 말을 끊을 새도 없었다고요.”

“역시 무시당한 거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거지! 아냐, 안 돼. 침착하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행심…….”

양진은 벌컥 화를 내려다가 갑자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내 귀에도 익숙한 반야심경이었다. 불경 중에서도 꽤 짧은 경전이라 양진은 빠르게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다.

[고작 그 사이에 마음을 다스리다니, 과연 아미승이네요.]

“그럼 정말로 당신의 의술을 배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가요?”

“예, 아미파에서 외부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걸 문제 삼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으음, 괜찮아요. 한두 번 혼나봤나. 무당과 갈등이 생길 정도만 아니면 돼요.”

“그렇다면 그 부분은 넘어가고, 이제 의술을 가르치는 대가에 대해서인데요.”

“역시 삼천 배로는 안 되나요?”

양진이 약간 시무룩해졌다. 삼천 배라니.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다는 건 감사할 일이긴 하지만, 내게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로 느껴질 뿐이다.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스님의 마음가짐이 결연한데 거기에 어찌 대가를 논하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건 당신이 공들여 익힌 거고, 아우, 쉽게 말해서 당신 밥줄이잖아요! 공짜일 리가 없어요. 원하는 게 뭐예요?”

깊은 산 속 암자에 처박혀 있어도 만사를 꿰뚫어 본다는 건가? 양진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놓고 친분도 확실히 자리 잡았을 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별 건 아닙니다. 나중에 아미의와 우리 의원들의 교류를 부탁하려고 했죠.”

“예에?!”

“아미파는 의맹의 그 누구보다도 여인에 대한 의술에 해박하지 않습니까? 우리 태양의원도 환자의 반수 정도는 여성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여인의 병증에 대해 대대로 쌓여온 검증된 지식과 경험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기존의 의술을 기반으로 치료하긴 하지만 어딘가 잘 안 맞는다 싶었거든요.”

지금도 태양의원의 의원들에게 자신의 병을 보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오지 않는 환자가 많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병세를 적거나 남편, 아들 등을 보내 약만 지어오게 한다. 그렇게 해서 나으면 다행인데 제대로 낫지 않거나 오히려 병이 도지는 경우도 있으니, 나로서는 아미의 의술을 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미파에 우리 의원들이 가는 건 그쪽에서 불편하실 테니까, 태양의원에 몇몇 분만 연수를 오시면 됩니다. 의식주 무엇 하나 불편함 없이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 돈 많거든요.”

[여기서 갑자기 돈 자랑이에요?]

그렇게 유치한 아미승들이 우리 환자를 같이 보게 하면, 아미의가 진료를 봐주는 의원으로 이름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의술을 익히면 타 의원들과 확실하게 차별화 되는 데다가 불교를 믿는 환자들이라면 일부러라도 우리 의원을 선택하게 될 테니 장점은 차고 넘친다.

“얘기는 들었어요. 어디 부잣집 자제라고요. ……비누와 창고에 가득 찬 약재와 식량, 생필품에 산파들도 그쪽이 한 거죠?”

“예, 그렇습니다. 두 분께서 여유를 갖고 저라는 보석을 찾아내시길 바랐거든요.”

“보석이라니. 자화자찬도 정도껏 하라고 하고 싶은데, 진짜라서 뭐라고도 못하겠네요.”

양진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영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받고자 하는 대가는 어떻습니까?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요.”

“그래 보여요. 그렇긴 한데, 그걸 제가 결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여요?”

“아뇨. 절대 아니죠.”

아미파에서 양자 배는 삼대제자다. 삼대제자가 그런 중요한 일을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삼대제자의 대사저 정도나 되어야 건의나 해볼 수 있을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미 본산에 계실 때 꽤 사고를 쳐서 아미산에서 멀리 떨어진 소림에 파견을 나오신 듯한데. 그런 제자들의 건의가 아미 본산에 받아들여질 리도 없을 거 같고요.”

“알면서도 우리에겐 그냥 가르쳐주겠다고요? 당신이 원하는 걸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데?”

“왜 못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그쪽도 말했잖아요! 우린 본문에 발언권이 없다고요!”

“두 분이야 발언권이 없겠지만, 추자 배는 아미의 일대제자시잖아요?”

“그, 그렇지만 그분은…….”

양진이 말을 흐렸다. 추명 스님의 위세가 썩 대단한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소림의 영역에 있는 아미분원에 배분이 떨어지는 사람을 데려놓을 수 없으니까 일대제자가 있는 거겠지만, 사실상 끈 떨어진 박 신세겠지.

“압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아미 본산에 연락은 하시겠죠. 특히 연등회 같은 큰 행사가 있은 후라면 말입니다.”

“……! 맞아요, 연등회가 끝나면 관자재암을 거쳐 간 이들에 대해 보고서를 쓰세요!”

“아무리 한미한 곳에 있다고 해도 일대제자의 보고를 누락할 리는 없죠. 거기에 만약, 제가 두 분과 의술교류를 해서 획기적으로 성과가 나아진다면, 소림의 연등회에서 생긴 일이니 소림방장도 아미에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본산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겠군요!”

그들의 성취는 둘째치더라도 당장 재물을 풀어 인풋을 대대적으로 보충했으니 아웃풋이 나쁘게 나올 리가 없다. 지금까지 성과가 좋지 못했던 관자재암이니 분명 이슈가 되겠지.

“그러니 양진 스님께서는 그때 잘 선보일 수 있게 실력을 가다듬으시면 됩니다. 그게 제게 보상입니다.”

양진은 좀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두 주먹을 꽉 쥐여 보였다.

“좋았어! 한번 해보죠!”

그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왕 관자재암에 인풋을 한 거, 아미승들도 이제 금태양이 했다는 걸 알았으니 거리낄 것 없이 더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젖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산모를 위해 일대에서 신선한 양젖을 공수했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근처 공방에 푹신한 도넛방석을 주문했다.

산파 외에도 잡일을 도울 사람을 임시로 고용했고 태양의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체계를 만들었다.

아미승들은 몰아치는 환자 속에서도 하루 세 시진은 수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고 수면은 그들이 실수를 줄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유 속에서 아미승들은 본래 태양의원 분원의 의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만든 책자의 내용을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집어넣고 곧바로 현장에 적용했다.

나는 나대로 바빴다. 여기는 금리처럼 일을 총괄해줄 사람이 없었기에 총괄 업무를 내가 해야 했고, 중간에 회음부 절개가 필요하거나 산모와 신생아 중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뛰어가야 했다.

그나마 산모는 허락을 받은 경우, 그것도 회음부 절개까지만 가능해 그 외의 일은 없었다. 처음 회음부 절개를 받은 산모와 곁에 있던 산파가 여기저기 소문을 내서 이를 허락하는 산모가 꽤 많아졌음에도 그랬다. 제왕절개 같은 건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신생아는 달랐다. 남녀 부동석은 칠 세부터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 고생을 해서 낳은 아기가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건지 아기의 수술은 대부분 허락받았다.

아기의 수술은 내게도 힘든 일이었다.

따로 방을 하나 받아서 지독할 정도로 소독을 하고, 항시 들고 다니던 야명주도 매달아 놨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서 태양의원의 수술실보다 더 방비를 하고 아기를 수술했다.

아기들은 대부분 장과 관련된 문제였다. 배가 수박만 하게 부풀어서 절개해보니 괴사가 진행되고 있다든가, 항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장이 흉곽이나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든가…….

신생아를 수술해본 경험은 없었기에 나는 양진과 페어를 이루어 아기를 수술했다. 양진은 수술은 해본 적 없었지만 신생아와 사산아, 그리고 죽은 아기까지도 접해 보았으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아기는 회복해 산모의 품으로 돌아갔고, 소문이 나자 자신의 다른 병증도 수술이 가능하냐 물어오는 산모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관자재암의 환자 수가 천여 명을 육박했다.

“와아, 진짜 바빠 보여요!”

추가로 부탁한 물자, 인력과 함께 온 사람은 제갈다영이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다가와서 내가 확인하고 있던 장부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예요, 이거? 재밌어 보이는데!”

“놀잇감 아니에요. 관자재암 운영 장부입니다.”

“그게 재밌어 보인다는 거예요. 신기한 운영방식이네. 나도 볼래요. 보여줘요!”

“이건 봐서 뭐 하려고요?!”

“재밌어 보인다니까요? 아니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그걸로 지금 관자재암을 총괄하는 거죠?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이 아가씨는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무슨 말이래.

관자재암 운영 장부는 태양의원의 운영에 기반해 있다. 이런 건 결국 밖으로 새어나가게 되어 있지만, 가급적이면 그 기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은데.

“금 의원님! 지금 바빠요?”

“예, 갑니다!”

……라고 하기엔 지금 당장의 상황이 너무 바빴다.

“재밌어 보인다고 했죠. 비밀유지 가능해요? 제갈세가 사람이니까 왜 그러는지 알죠?”

“빨리 줘요! 어서!”

내가 확인을 받기 전까진 안 주려고 하자 제갈다영이 대뜸 뭘 내 손에 턱 쥐여 주었다.

“이거면 됐죠? 아, 빨리!”

“제갈세가의 패? 이걸 준다고요?”

“약속하라면서요? 그 정도면 약속의 증표로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하다마다. 이건 보은패와 마찬가지로 제갈세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패다. 이런 걸 고작, 장부의 내용을 유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 준다고?

[내가 그랬잖아요. 제갈세가는 호기심이 돋으면 말릴 수가 없다니까요?]

“금 의원님! 급하다니까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손님이 와서.”

“아, 스님! 제갈세가의 제갈다영이에요. 갑자기 와서 죄송합니다아, 아미타불!”

양진이 정신없는 기색으로 달려오자 제갈다영이 예를 갖추어 합장했다. 장부 때문에 들뜬 기색은 감출 수 없었지만.

“아, 아미타불. 제갈세가의 자제께서 여긴 어인 일로……?”

내가 그녀를 보고 당황했던 만큼 양진도 당황하며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인사드릴 분이 있어서요. 오늘쯤 도착하셨을 텐데. 군주(郡主)께서 아직 안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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