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좋아, 성공이다.
양진이라는 아미승이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눈치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하던 일만 묵묵히 해낼 뿐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지켜본바, 양진은 관찰력이 좋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앞에서 티를 내는 사람보다 자신이 찾아낸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과중한 업무에 치여서 그럴 여유가 없었겠지만, 한숨 돌린 지금은 다르겠지.
[과연 저 아미승이 어디까지 알아차렸을까요? 갑자기 가득 찬 창고나 들이닥친 산파들도 당신 작품이라는 걸 알까요?]
글쎄. 거기까진 모를지도?
나는 홍령의 말을 따랐다. 이곳 관자재암에서 필요한 의술은 내가 지금껏 익혔던 것과는 달랐다. 나는 그들에게 배워야 했다. 낮은 곳에서 임한다는 자세로 그들이 미처 손대지 못한 잡일을 해치우며 환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보이지 않게 의료환경을 개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동시에 높은 곳에서 임했다. 돈 말이다.
내게는 관자재암의 낙후된 의료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었다.
[문제는 맨 처음, 그들이 당신의 돈을 거부했다는 거죠. 그것도 백은전표를요. 그때 표정을 생각하면 황금전표라고 해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돈은 무작정 쓴다고 능사가 아니다. 적재적소에 써야지.
나는 첫날 밤 빠르게 관자재암을 내려가 하오문 지부에 들러 태양객잔의 주인이 준 증표를 내밀었다. 하오문은 그 증표를 보자 빠르게 내가 요구한 정보를 내주었다.
과거에 관자재암에 지원을 왔던 세가의 자제 중 상당히 큰 금액을 쾌척한 자가 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아미승과 임산부들에게 난교파티를 강요해 큰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단다.
당연히 아미승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그자를 반죽음으로 만들어놨다는데, 집안에서도 내놓은 망나니라 문파와 세가 간 분쟁으로 번지지 않고 어찌저찌 잘 넘어갔다나 뭐라나.
그러니 낯선 남자가 시주랍시고 건네는 돈을 거들떠도 안 볼 만하지.
그래서 노선을 살짝 바꿨다.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물건과 용역을 제공하는 쪽으로. 관자재암이 나에게 낯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지만, 의원으로서 필요한 것은 어차피 비슷비슷하다.
나는 의원이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을 제공했다.
그 출처를 궁금해 할 법도 한데, 워낙 상황이 급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건지 아미승들은 생각보다 갑작스러운 행운을 손쉽게 받아들였다.
[그 늙은 아미승이 눈감아줘서 다행이죠. 이런 건 빨리 들키면 좀 그렇잖아요.]
산파들이야 하오문에 부탁해서 이 일대의 산파들에게 짭짤한 돈을 주고 고용해올 수 있었지만 약재나 비누 등의 재물은 내가 직접 날라야 했다. 기왕 하는 거 임팩트를 주려면 조금씩 늘어나는 게 아니라 한 방에 채우는 게 좋으니까, 날을 잡고 밤새도록 짐을 날랐는데 그러다 나이 든 아미승과 마주쳤다.
법명이 추명스님이던가?
헌데 그 나이든 비구니는 내가 황소만 한 짐을 들고 창고를 오고가는데도 아미타불을 한 번 외고는 다시 강당을 돌러 갔다.
[그날 들키지 않으려고 당당에게 받은 수면향도 피웠는데. 보통 스님은 아닌 거 같아요. 하긴, 관자재암의 관리 스님쯤 되면 아미파에서도 꽤 실력 있는 노승을 파견했겠죠?]
어쨌든 그분이 눈감아준 덕분에 젊은 아미승들에게 임팩트를 주는 데는 성공했고, 평소보다 넉넉한 보수를 받고 고용된 산파들도 적절한 거짓말을 섞어가며 아미승들을 돕기 시작했다. 여유를 찾은 그들은 내 계획대로, 묵묵히 뒤에서 보탬이 되고 있던 나를 발견한 거지.
“정말 제가 같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는 덥썩 그러겠다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냥 환자면 거리낌 없이 들어갔을 거다. 하지만 이 안에는 출산이 시작된 산모가 있었고, 그런 환자를 본다는 건 아이가 나오는 질을 생생히 봐야 한다는 거다. 내가 괜찮아도 산모가 안 괜찮다. 먼저 산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손이 모자라서 남자 의원을 동석시키려는데 어때요?”
“남자고 스님이고 살려만 주세요, 아악!”
내가 뭘 물어보는지 알아차린 양진이 천막 안에 고개를 들이밀고 먼저 물었다. 산모의 새된 비명이 귀를 울렸다. 양진이 고갯짓하자 나는 그제야 양진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출산 중인 산모와 산파 하나가 함께 있었다.
“어때요?”
양진이 산파에게 물었다.
“이 산모, 세 번째 출산이라는데도 꽤 고생하겠어. 아이가 큰 거 같아. 머리도 커.”
아이의 머리는 반 뼘 정도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저 정도 되어야 본격적인 분만에 들어가는 거군. 고통이 극심한지 산모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억억 소리나는 비명을 질렀다. 마치 지옥도에 빠진 사람 같았다.
“진통 침에 자신이 있는 거 같던데, 한번 놔 봐요. 대신 고통을 아예 못 느끼면 안 돼요.”
“아악! 아냐, 아냐! 그냥 다 없애주세요! 악!”
지켜보는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산모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머리채를 안 잡히게 잘 묶어 정리한 상태였다. 잡을게 없어 내 옷자락을 붙잡은 산모의 맥을 잡고 신중하게 침을 놓았다.
“으헉, 헉! 헉…… 허억…… 어?”
손과 발에 침을 놓을 때마다 산모의 비명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끝으로 하복부에 침을 놓자 산모가 식은땀을 흘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아파요. 이 남자 의원님이 놓은 건가요? 안 아픈데?”
“이봐요, 아예 안 아프면 안 된다니까?”
“아니, 아주 안 아프진 않고요! 가벼운 달거리통 정도? 으읏…… 참을 만해요!”
“진통 침을 함부로 놓지 않는 것은 출산시 힘을 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산모께선 세 번째 출산이시니 감을 아실 거 같아 최대한 통증을 경감 시켜드리는 게 맞을 거 같았습니다.”
양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씹었다.
“그러면 미리 말을 해줄래요? 어쨌든 잘했어요.”
“촌각이라도 빨리 통증을 덜어드리는 게 의원의 도리인 것 같아서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왕 산모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이분이 출산을 마칠 때까지 도와드리면서 경험을 쌓아 봐요. 경산부니 출산까지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다른 곳에서 새된 비명과 스님을 찾는 외침이 강당 곳곳에서 터졌다.
“스님은 가셔도 되는데 이분은 두고 가세요. 또 아프면 침 놔달라고 해야 하니까!”
“어이구, 다들 처음에는 웬 남자가 돌아다니냐고 남사스럽다 하더니. 안 아픈 게 그렇게 좋습니까?”
양진은 투덜거리며 천막을 나섰고 나는 산파를 도우며 산파의 행동 하나하나를 흡수했다. 산파들 또한 아미승들 못지않은, 출산의 프로페셔널들이니까. 뭘 어떻게 하는 걸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또 다르단 말이지.
양진은 내가 귀동냥만 한 줄 알겠지만, 사실 내가 잡일을 하는 동안 홍령이 천막마다 돌아다니면서 아미승과 산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전부 관찰해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다시 몸으로 익히는 과정인 거다.
“헌데 금 의원님, 진짜로 괜찮어? 남자가 보기엔 좀 그럴 텐데.”
“괜찮습니다. 저도 조금 걱정했는데, 그냥 다른 환부랑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네요.”
“그렇담 다행이고. 남자들 중에는 지 애 낳는데 나도 봐야겠다며 들어왔다가 구토하며 나가는 사람도 많거든.”
산파가 껄껄 웃었다. 내가 실질적인 고용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산파들은 내게 꽤 친절했다.
“그런데 산파님, 경험이 있는 산모는 한 식경이면 무리 없이 출산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분은 상당히 오래 걸리는군요.”
“그러게. 벌써 한 시진은 넘은 거 같네. 꽤 벌어지긴 했는데 애가 너무 커서 턱도 없어. 이러다가 산모도 진이 빠지면 큰 일인데.”
“으윽, 의원님. 또 통증이 와요오…….”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산모는 내가 관자재암에 온 첫 날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던 그 사람이었다. 산모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는, 이곳에서만 두 번이나 출산을 해서 이곳 사정을 잘 아는데 워낙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또 그런 인간인 줄 알았다며,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너무 아이가 안 나와서 통증을 더 경감해드릴 수가 없어요.”
출산의 세계는 신비했다. 통증을 아예 느끼지 못하면 아이가 안 나온다니. 아이가 뱃속에서 죽었거나 개월 수가 찼는데 아이가 안 나올 땐 아미승들이 내공으로 압박을 가해서 일부러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나. 그러면 신기하게 애가 쑥 나온단다.
이러니까 전생에서도 산부인과와 여성의학과가 의학 중에서도 다른 분과로 분류되어 있던 거겠지.
“여기 아직도 멀었어요?”
다른 천막에 다녀왔던 양진이 돌아왔다. 아직도 충분할 만큼 벌어지지 않은 모습에 아미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계까지 늘어난 거 같은데. 이렇게 계속 두면 애가 숨 막혀 죽을 수도 있어요. 억지로라도 힘을 줘 봐요.”
“아파요……! 찢어질 거 같다고요……!”
“어쩔 수 없어요. 찢어져야 애가 나오죠. 낳고 고생을 좀 하겠지만, 아미타불.”
보아하니 애가 너무 커서 살을 찢고 나와야 하는 모양이다.
회음부와 이어지는 부분이 찢어지다니. 치질만 해도 아픈데 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면 얼마나 아플까. 치료도 오래 걸리고 그 기간 동안 감염 등에도 취약해진다. 기본적으로 회음부와 가깝다는 건 대장균 등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은 거니까.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차라리 절상이 낫겠어요. 그건 상처가 매끄러워서 꿰매기는 편하잖아요?]
잠깐만. 전생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스님. 혹시 다른 방법을 쓸 수는 없겠습니까?”
“방법? 무슨 방법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먼저 칼로 절개하는 겁니다.”
“칼을 댄다고요?!”
산모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지만 아미승이 잠깐 있어 보라는 듯 손을 들었다.
“머리 크기가 상당한 걸로 보니 아이도 크겠죠. 이만한 아이가 산모의 살을 찢으며 나온다면 예상 열상 부위는 이 정도입니다.”
나는 산모의 회음부 근처의 허공에서 원을 그렸다. 거의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절개를 해 아이가 나오는 것을 돕는다면 이 정도만 칼을 대면 됩니다.”
나는 직선으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길이도 너비도 열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직선으로 절개했으니 그대로 꿰매면 되고 아물 때의 고통이나 감염 위험도 열상에 비해 턱없이 적습니다.”
“……당신 말이 맞군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수술에 그리 능통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이 부위는 사람의 신체 중에서도 살갗이 얇고 예민한 곳인데, 이런 곳을 수술하려면 그만한 도구가 있어야 하지 않나? 꿰매는 바늘의 재질이나 봉합사도 아무거나 쓸 수는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