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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59화 (159/350)

159화

금태양이 관자재암에 도착하고 닷새 후, 밤.

관자재암을 지키고 있는 아미승 양원은 지친 기색으로 승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나 죽어……. 왜 다들 여기 와서 애를 못 낳아서 난리야…….”

소림의 연등회 기간만 되면 부처님의 도량에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이들이 중원 각지에서 몰려들긴 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사람이 많았다. 아직 연등회가 시작도 안 했는데 강당에는 백 명이 넘는 임신부들이 누워 있었다.

관자재암을 지키는 아미승은 고작 셋인데. 그야말로 사람 죽어나는 환경이다.

“앞으로 더 늘어나겠지. 연등회까지 이제 얼마나 남았냐…… 날짜도 모르겠네.”

“아흐레 남았어, 사저.”

대답하며 승방으로 들어온 것은 양원의 사매인 양진이었다.

“뭐야? 또 무슨 일 있어?”

양원이 지친 얼굴을 하고도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밤은 양진이 야간당번을 하기로 했다. 그런 양진이 승방으로 온 거라면 무슨 일이 생겨서 양원을 부르러 온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양진은 양원의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누가 봐도 급하게 사람을 부르러 온 모양은 아니었다.

“나도 좀 쉬려고. 오늘 밤은 추명스님이 봐주신대.”

“벌써 불공 끝나고 내려오셨나?”

“그럴지도. 그래 봤자 새벽에 또 깨야겠지만. 추명스님은 의술은 모르시잖아.”

추명은 관자재암을 책임지는 아미승이다. 양자 배보다 배분이 높지만 아미의로서 수련을 받지 않아 솔직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연세에 불침번을 서주시는 게 어디야. 아미 본산이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잠깐이라도 눈 붙이자.”

“그래야지. 하아, 눈 감고 일어나면 약재창고가 꽉 차 있으면 좋겠다.”

“역시 모자라지?”

“턱도 없지. 사저도 알잖아. 반야원 그 개자식들이 관자재암에 주는 예산이 눈곱만 하다는 걸. 차라리 약재로 달라고 해도 어디 약재원 창고에 굴러다니던 하급 중의 하급이나 주고. 아, 생각하니까 열 받아!”

양진이 자려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이곳 관자재암의 운영비는 아미가 아니라 소림에서 댄다. 그런데 그놈의 돈이 소림에서 바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반야원을 거쳐서 온다. 그곳 의원들의 행태는 아미승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가서 항의도 하고 죄다 엎어버리기도 했는데, 놈들이 소림에 어떤 식으로 입을 턴 건지 오히려 아미 본산에서 행실을 가지런히 하라는 경고가 와서 이제는 그런 깽판도 못 친다.

“본산에서 오는 품위유지비까지 탈탈 털어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이 정도면 관세음보살께서 우리를 가엽게 여기셔야 하는 거 아냐!?”

“포기하면 편해. 그냥 고행이라고 생각하렴.”

양원은 아예 해탈해버린 듯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 모습에 양진이 혀를 찼다.

“해탈에는 도움이 되겠네. 아주 백팔고행을 여기서 다 하네. 꿀이야, 꿀!”

“그래도 요 며칠은 그럭저럭 괜찮았잖아. 너랑 나랑 누워서 수다 떨 시간도 생기고.”

“맞아. 특히 고열로 시달리는 산모가 줄었어요. 그러다 죽는 사람도 많았는데.”

“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 아니겠니.”

“굽어 살피시는 데도 정도가 있죠. 뭔가 바뀐 게 있었나?”

양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여태까지의 연등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 남자는 좀 어때요?”

“아아, 자기가 의원이라던?”

사실 관자재암에 남자가 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금남의 영역이라고 소문이 퍼져서 그렇지, 아미 본산도 아니고, 임산부의 보호자 중 간혹 남자도 있다 보니 관자재암에 오는 남자를 막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자재암의 일을 돕겠다고 오는 남자들, 특히 의원들에게 이 두 아미승은 감정이 좋지 않았다. 반야원 때문도 있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하던 행실이 있던 탓이다.

“어디서 왔대요? 설마 황보세가나 하북팽가는 아니죠?”

“지난번에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얻어맞고 돌아갔는데, 설마.”

“구파도 별로 안 반가운데. 반야원에서 자리싸움하다가 밀려나서 관자재암으로 오는 사람들이잖아요. 한번 자존심 상해서 온 거라 엄청 대접받으려고 하고. 여자가 앓는 병만 본다고 우리 엄청 무시하고.”

“여자들만 있는 곳이라고 엄한 생각으로 오는 놈팡이들보단 낫잖니.”

“그런 거에 낫고 안 낫고를 왜 따져요? 그런 놈들 저런 놈들 다 별로예요.”

여태까지 관자재암을 거쳐 갔던 의원들을 떠올리며 양진은 치를 떨었다. 헌데 이번에 온 의원은 두 부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거 같다.

눈 돌아가게 바빠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놓고 무시를 하는데도 성질을 내거나 하지 않고, 맘대로 하라고 했다고 섣부른 짓도 하지 않았다. 두 아미승들에게는 물론이고 환자들에게도 그로 인한 불만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도 이번엔 쓸 만한 의원이 온 걸까요?”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 자자. 연등회가 시작되면 열흘은 잠도 못 잘 테니까.”

양원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양진은 그 다음 날부터 주변의 달라진 점을 상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 하나로 환자와 산모, 신생아를 구할 수 있다면 빨리 찾아내 적용해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찾기 시작한 차이점은 양진의 생각보다 많았다.

첫 번째로 달라진 점.

“사저, 우리 비누가 남아 있었어요?”

“그러게? 한참 전에 다 쓰지 않았던가? 워낙 비싼 물건이라야 말이지. 다 끝나고 양잿물에 손 씻는 게 고작이었잖니.”

“이거 좋은 비누인 거 같은데. 킁킁. 쑥 냄새도 나는 거 같고.”

“창고 구석에 남아 있던 걸 추명스님이 찾아 갖다두셨나 보다. 비누가 생겼으니 수시로 손을 닦자.”

“그래야겠어요. 하지만 그 창고 어디에 비누가 숨을 구석이 있어요? 남은 약재가 하나도 없어서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긁어서 써야 할 판인데.”

두 번째로 달라진 점.

“그러니까,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긁어서 써야 할 판이었는데…….”

“이, 이게 다 뭐지?”

“부처님의 자비가 약재와 식량을 만들어내신 게 아닌 이상 누군가 갖다 놓은 모양인데. 우리가 간밤에 너무 깊이 잠들었나 봐요.”

“그만큼 피곤하긴 했지. 추명스님이라면 인기척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추명스님의 무공이 그리 고강하진 않잖아요. 그 때문에 추자 배분에도 이런 외딴 곳에, 큼큼. 하여튼 잘됐어요. 일전에 여기서 출산을 한 귀부인이 보낸 건가? 전부 질이 좋아 보이는데.”

마지막, 세 번째로 달라진 점.

“산파분들이 여긴 어쩐 일로……?”

“아미타불. 연등회를 맞아 시주할 것은 없으나 저희들이 관자재암의 일은 도울 수 있을 거 같아 찾아왔습니다.”

“아무 대가도 안 받고 도와주시겠다고요? 정말로?”

의원만큼은 아니지만 산파는 비싼 존재다. 아니, 의원이 한 푼의 치료비도 받지 않는 이곳에선 어쩔 수 없이 의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산파는 임신과 출산 부분에서는 더 높은 취급을 받고 있다.

산파는 임신한 부인의 여러 병증에 대해 정통할 뿐 아니라 출산에 있어 전문가이며, 동시에 산모의 산후조리와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일도 능숙하다.

그야말로 지금 관자재암에 제일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애는 그냥 낳으면 끝나는 게 아니니까.

필요한 것은 알지만 그 하나하나의 몸값이 보통이 아니라 관자재암에선 차마 산파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산파들도 관자재암의 부름에는 훨씬 더 높은 값을 불렀다. 그들에게는 관자재암이 일종의 경쟁자였던 것이다.

그랬던 이들이, 갑자기 일을 돕겠다고 몰려온다고?

한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나?

이 정도면 이 일대에서 일하는 산파들이 전부 온 거나 다름 없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서들 오십시오. 양진아, 무엇하니? 어서 이분들을 안내하지 않고?”

“아, 네! 네!”

양진은 당황했지만 빠르게 산파들을 강당으로 인도했고, 현재 출산이 머지않은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그중 눈여겨봐야 할 상태의 임신부가 몇인지, 출산 후 조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들이 몇인지를 설명했다. 산파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더니 각자 조를 나누어 아미승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양진아, 내 볼 좀 꼬집어보겠니?”

“아니, 이걸로는 부족해.”

양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강당을 돌아보았다. 비누, 약, 식량 그리고 산파들은 오늘 갑자기 생겨난 거다. 그걸로는 지난 며칠간 산모들의 상태가 괜찮았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설마?”

양진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상한 가면을 쓴 남자, 통성명도 안 해서 이름도 모르는 의원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 변화가 있다면 저 남자다.

양진은 며칠간 그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기로 했다.

우선 그자의 이름은 금태양이라고 한다. 산파들과 통성명을 할 때 엿들었다. 꽤 이름난 의원인지 산파들이 그의 정체에 감탄을 하더라.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환자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가 뛰어난 의원인 게 닷새 동안 위급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것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그리고 양진은 세간 의원들을 불신했다. 자기가 천하명의라 설치던 인간들이 출산을 도우러 들어왔다가 기겁을 하고 나가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 똑같은 사람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을 해주려 해도 그런 것따위 듣지 않아도 자기가 옳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데 이 금태양이라는 의원은 조금, 많이, 아니, 상당히 이상했다.

“아미타불, 좋은 아침입니다.”

양원과 양진이 바빠서 답인사도 안 하고 그를 스쳐 지나가도 꼬박꼬박 아미승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물론, 불공은 못 드려도 새벽예불 시간에 일어나 환자들을 순회하는 그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는 청소를 했다.

그래, 청소다.

가만 돌이켜보면 지난 닷새 동안 그는 볼 때마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수시로 바닥을 쓸고 닦는 것은 물론이요, 매일같이 나오는 수많은 천을 삶아 빨았고 여기저기 독한 술을 뿌렸다.

물론 아미승들도 알았다. 환자가 있는 곳은 청결히 해야 잡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승려들이 어찌 모를까.

허나 이를 행하기에는 그들이 지독하게 바빴다. 세 명의 산모가 동시에 출산을 하며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피와 양수가 묻은 천 수백 개를 어떻게 빨겠는가?

“설마 저자가 알고 그러는 건가?”

모든 의원이 청결을 중시하는 건 아니다. 학파에 따라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몸을 씻지 않아야 병이 침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개방의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아미파는 아니었다. 그들은 청결과 간소한 식사, 욕심을 버리는 마음이 병을 치유한다고 믿었고 양원과 양진도 그리 배웠다.

배운다고 다가 아니다. 지금까지 관자재암에 왔던 의원들은 다들 그러한 잡일을 대신 해주는 존재가 있었기에 그런 일에는 손도 까딱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세가의 자녀들이 그러했다.

“아무리 봐도 귀한 집 자식인 거 같은데…….”

가면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고급품이요 옷은 말할 것도 없이 비단옷이다. 허나 그는 비단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아랑곳 않고 청소를 했다. 그러다 잠깐씩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건 아미승들이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첫 진통이 있을 때는 산도가 충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아기 머리가 반 뼘쯤 나오면 그때 진통 침을 놓는다. 통증을 아예 못 느끼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러면 힘을 줄 때를 산모가 못 느끼는구나. 그래서 그때 막으신 거였군.”

‘귀동냥을 하고 있어?’

가르쳐주지 않을 때는 어깨너머로 배우고 귀동냥을 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양진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저것은 배우고자 하는 자의 자세였다.

“이봐요.”

“네? 아, 죄송합니다. 비켜드릴게요.”

양진은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비킬 필요 없어요. 같이 들어가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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