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아미타불, 안녕하십니까. 저는 소림방장의 허락을 받고 관자재암을 도우러 온 태양의원의 의원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의원? 의원이 여길 왜 와?”
“반야원은 이미 도울 일손이 많아 제가 다른 곳을 돕겠다 자원했습니다. 실력은 괜찮다 자부하니 부디 중생구제에 도움을 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나는 소림방장이 준 서찰과 함께 전표 하나를 꺼내 건넸다. 황금전표는 나도 한 장 뿐이었지만, 사람이 항상 최강의 수 하나만 갖고 있으면 쓰나. 만약을 대비해 챙겨온 백은전표 중 하나를 내밀자 아미승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맘대로 해.”
“예?”
“맘대로 하라고.”
아미승은 내가 내민 백은전표에는 관심 없다는 듯 횅하니 돌아섰다. 그리고는 급하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뭐지?
[돈 욕심 없는 사람 참 오랜만에 보네요. 소림방장도 황금전표에는 반색을 하던데. 하긴, 저게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겠죠?]
그건 그렇다 치고. 마음대로 하라는데?
심지어 아미승은 소림방장이 보낸 서찰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금남의 구역이라며, 이렇게 신원확인도 안 한 사람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둬도 되는 건가? 아니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건지.
곤란한데.
관자재암에서 내가 해야 할 제 1순위 목표는 아미승들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거다. 그래야 여기서 이름을 날릴 발판을 튼튼히 다지게 될 테니까.
반야원에서도 그랬고, 그곳의 의원들은 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얼토당토 않는 과제를 내주었지. 나는 그것들을 해치우고 환자를 보았고. 정체불명의 전염병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내가 그 어마어마한 잡일들을 해치우는 걸 보며 기가 눌렸으니까.
근데 여긴 그냥 무관심하다.
처음부터 호의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예 관심도 없을 거라곤 예상 못했는데.
[뭐 어때요? 이럴 때일수록 실력으로 인정받는 거죠! 아, 저기 환자인 거 같은데요? 기회에요!]
뒤돌아보니 홍령이 말한 대로 낯색이 좋지 않은 여인이 홀로 관자재암에 들어서고 있었다. 배가 만삭인데 여기까지 홀로 올라오다니.
“아미타불. 관자재암에서 출산을 하러 오신 분이죠? 괜찮으십니까? 짐 주세요.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여인에게 다가가 짐을 대신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웬걸.
여인은 내 위아래를 흘깃 훑더니 이내 나를 지나쳤다.
[에엥?! 아미승들은 그렇다 치고, 환자들도 무시한다고요? 실화예요?!]
아까 그 아미승이 다시 지나가자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아미승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스님!”
“이 사람이. 오지 말라니까 기어이 또 왔네. 기어이 셋째까지 여기서 낳으시려고? 위험하다니까?”
“관세음보살께서 지켜주시겠지요.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요?”
“그러시게나. 어휴.”
여인은 익숙한 듯 불전 뒤로 향했다. 나도 일단 멀리서 그들을 따라갔다.
[뭘까요, 이 건물은?]
불전 뒤에 뭔가 건물이 있는 거 같다 싶긴 했는데, 그냥 건물이 아니라 강당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컸다.
[우와. 이 정도면 천 명은 너끈히 들어가겠어요. 아미승들이 있는 곳이니까 불법을 설법할 때 쓰는 곳일까요?]
여기가 아미파라면 모를까, 소림의 한복판인데 아미승들이 이만한 강당에서 경전을 욀 거 같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에서는 의원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앓는 소리 말이다.
아미승과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도 슬쩍 뒤를 따라 강당 내부로 들어갔다.
[세상에, 이게 뭐래요?]
허공 위로 둥실 떠올라 전체를 조망한 홍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쳐진 천막과 앓는 소리들뿐이긴 하지만, 대충 홍령이 뭘 봤는지는 짐작이 됐다.
전생의 뉴스에서 종종 이런 장면을 봤지. 산불이나 홍수 등의 재해로 집을 잃어버린 피난민들이 강당에 천막을 쳐놓고 생활하는 모습 말이다.
여기 있는 건 피난민이 아니라 환자라는 점이 다르겠지만.
[천막은 천 개가 넘는 거 같은데 환자는 백여 명 정도예요. 대부분이 만삭의 임신부구요. 몇 명 출산을 한 사람도 있긴 하네요.]
아까부터 내 귀를 거슬리게 하던 천막에서 지친 기색의 아미승이 천막을 걷고 나왔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출산이 있었구나.
“저건 뭐야?”
“소림에서 보냈다던데.”
“아, 그래?”
아까 나를 마중한 아미승이 지친 기색의 아미승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야 통성명이라도 하려나 했지만 그들은 나를 힐끔 보곤 좀 전에 출산한 산부와 아이의 상태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람이 도우러 왔다는 데 인사도 안 하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급한 환자가 있으니 그게 우선일 수는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의원 취급 이전에 사람 취급을 안 하잖아.
“실례합니다. 금태양이라고 합―.”
“아악! 아아악! 스님, 살려주세요!”
“예예, 갑니다!”
“미치겠네. 오늘만 몇 번째야!”
어떻게든 말을 터보려고 했더니 또 어디선가 비명이 터졌다. 아미승들이 쏜살같이 비명이 터진 방향으로 달렸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무시당한다면 무시하지 못하게 할 수밖엔.
천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여인의 출산에 남자가 들어가는 건 금기에 가까운 일이라 제지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좀 남았지 않나? 갑자기 왜 이래!”
“양수 터졌어. 힘 빼요! 지금 낳아야 해!”
아미승 두 명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나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일단 진통이 심한 거 같으니 침이라도 놓으면―
“아악!”
이 비명은 환자의 것이 아니다. 내 비명이었다.
“사람 살려! 부처님 옥황상제님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님!!!”
“머리, 머리카락 놓으세요! 악!”
환자의 손에 침을 놓으려는데 환자가 내 머리채를 덥썩 잡고 잡아당겼다. 두피가 쭈뼛 섰다.환자의 손을 잡고 머리카락에서 떼어내려 했지만 머리카락과 손가락이 엉켜 쉽지 않았다. 사극에서 흔히 보던, 허공에 매달아둔 끈 신세가 되던 와중에 아미승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환자가 잡고 있던 내 머리칼 한 줌을 서걱 잘랐다.
“맘대로 하라고 했지만 방해가 되라는 말은 안 했는데.”
“진통 침을 놓으려고 했습니다. 일단 아프지 않으면 어떻게든―.”
“진통 침? 이게 미쳤나. 머리 밀고 싶은 거 아니면 일단 나가. 아, 빨리!”
아미승의 서슬 퍼런 호령에 나는 일단 천막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그 상황에선 내가 민폐였다.
미치겠네.
반야원에서처럼 재수 없는 놈으로 찍히는 게 낫지, 무능한 놈으로 찍히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아악! 스님! 살려주세요!”
“곧 가요! 여기 먼저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진통이 시작된 이들의 비명이 터졌다. 환자가 백 명이 넘는데 돌보는 사람이 아미승 둘 뿐인가?!
[여기, 여기 환자가 제일 급해 보여요!]
나는 홍령이 가리킨 천막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환자가 배를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의원입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배?”
“스님, 스님 좀 불러주세요. 네? 스님 좀 제발…….”
“곧 아이가 나올 거 같은가요? 진통 침을 놔드릴까요?”
“스님 좀 불러달라니까요! 왜 말을 못 알아먹어요!”
환자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선 나를 밀치고 천막을 나섰다. 저렇게 아픈데 움직일 수가 있다고? 환자는 고통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아미승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스님, 스님! 나 좀 봐주세요……! 아이고!”
“거기서 기다리라니까, 나참! 봐 봐요!”
이제야 알겠다.
여기는 금남의 구역이 아니다.
[그냥 무남(無男)의 공간이군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 뒤로 몇 번 환자를 보려고 시도했지만 대부분은 아까 전처럼 나는 아랑곳 않고 아미승을 찾았고, 간혹 한두 명만이 왜 이곳에 남자가 있냐며 남자에게 환부를 보일 수 없다고 나를 쫓아냈다. 평소였다면 아픈데 지금 남녀를 가리냐고 하겠는데, 대부분이 임산부라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차라리 남자니까 안 된다고 하는 환자들이 낫네요. 아예 무시당하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일일 줄이야.]
의원이 된 이후 한 번도 무시를 당한 적은 없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애초에 의원은 희소한 존재다.
이름난 돌팔이라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는 이들이 있는 마당에 제대로 된, 실력이 있는 의원을 무시한다고?
[그만큼 남자 의원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죠. 사실 나라도 그럴 거 같아요. 여인이라면 경험이 없어도 어떻게 해달라고 할 거 같은데, 하물며 아이를 받아본 적 없는 남자 의원에게라면…….]
그래. 남자가 산부인과 진료를 보는 건 전생에서나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도 남성 의사를 꺼리는 편이라 여성 의사가 더 선호된다고 했지. 나도 전생에 비뇨기과를 갔다면 가급적 남성 의사를 선호했을 거 같으니,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
패싱 당하는 사람이 나만 아니었어도 그랬겠지만…….
[여기선 좀 다르게 가는 게 어떨까요?]
다르게? 어떻게?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랬잖아요. 있는 대로 실력을 발휘해서 콧대를 눌러주거나, 환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방식이었죠. 그죠?]
장 의원 때가 그랬고, 지현의 오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고 양양의 출장소가 그랬다. 무한 출장소도 비슷한 방식이었고.
하지만 이곳에서 함부로 그런 방식을 썼다간 임신한 여인을 함부로 대했다며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저번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여인이라 생기는 병이라면 몰라도 임신과 출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큰 맥락은 같겠지만 여기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임산부를 돌본 아미승들 보다는 못할 거예요. 우리, 몸을 낮춰요. 그들에게 배워요. 그래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홍령의 말은 정론이지만, 그런 식으로 천하백대명의에 이름을 올릴 만한 명성을 쌓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게 그렇다.
간섭받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빼어난 성취를 올리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려도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그대로의 정도를 걸어 빼어난 성취를 거둔 이는 경외하는 일은 있어도 열광하지 않는다.
지루하고 재미없으니까.
밑바닥의 일부터 하는 건 반야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
[정신 차려요! 주객전도도 정도껏이지. 천하백대명의가 뭐 어째요? 제대로 된 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저 명성만 떨칠 기회를 노린다고요?]
잠깐만, 침착해.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의맹의 정회원이 되려면 그만한 명성을 갖춰야 한다는 거 알잖아?
[당신에게 환자는 그냥 의맹의 정회원이라는 자리에 앉기 위한 과정일 뿐이에요? 당신,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지금 당신 말하는 게 그렇잖아요. 우린 이곳에 대해 몰라요. 임신한 여인과 출산한 여인, 거기에 신생아까지.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진료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요. 잘 알지도 못하는데 자기 명성을 위해서 나댄다고요? 환자가 더 아프고, 고통 받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명성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런 자를 의원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고마워. 덕분에 내가 할 일이 명확해졌어.”
나는 홍령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