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왜 그래?”
“아니, 그냥. 같은 이름을 한 사람을 알아서.”
“정말? 이름은 그렇다 쳐도 성은 흔치 않은 편인데 신기하네.”
이곳 중원에서 김 씨 성은 그렇게 흔한 성은 아니다.
전생에는 미치도록 흔한 성 중에 하나였지만.
진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외자 이름은 드물지만 그 외자 이름 중에서도 진이라는 이름은 시대를 막론하고 꽤 사랑받는 이름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해서 김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나는 건, 제법 신기한 일에 속했다.
“나랑 이름이 똑같은 사원이 있네?”
전생에서, 다른 이들에 비해 학벌도 스펙도 부족한 내가 본부장에게 전격 기용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제 네 이름이 곧 내 이름이나 마찬가지야. 잘할 거라는 말은 필요 없어. 잘해. 실수하면 어떻게 될지 알지? 콱.”
김진.
그 이름에는 안 좋은 기억뿐이다.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관자재암에 가는 일 때문에. 아미승들의 인정을 받아야 할 테니.”
“잘될 거야. 방장의 허락도 받았고, 넌 제대로 된 의원이잖아?”
“고맙다. 너야말로 괜찮겠어? 모용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은데.”
사실 내 일이야 어느 정도 해결됐다. 문제는 진이었다. 그 성깔에 진이 사실을 고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래 봤자 나한테 직접 해를 가하진 않을 테니까 괜찮아. 아들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가주께서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게 막으셨거든. 기껏해야 좀 윽박지르고 성질이나 부리겠지. 적당히 받아주다가 무릎 몇 번 꿇으면 돼.”
그 이름에서 전생의 본부장을 떠올린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오히려 전생의 내가 떠오르는 말이 아닌가.
“너도 고생 많다. 기회 되면 차라도 한잔하자. 내가 술은 못 마시거든. 대신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살게.”
“그래. 관자재암에서도 힘내고.”
진이 주먹을 들어 올렸고 나는 조금 당황하다가 그 주먹에 내 주먹을 살짝 부딪쳤다. 녀석은 씩 웃더니 다원을 나섰다.
[신기한 인사법이네요. 모용세가 특유의 인사법일까요?]
그럴지도. 전생에서도 거의 해본 적 없는데, 기묘한 기분이군.
관자재암으로 갈 준비를 하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스님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시주, 방장께서 다시 와 달라 청하셨습니다.”
[뭐지? 무슨 일일까요? 다시 반야원에 가도 된다고 그러려나?]
방장과 할 얘기는 다 했던 거 같은데. 의아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다시 다실로 향했다.
[당신 둘째 형 때문일까요? 아까는 다른 스님들이 보고 있어서 모른 체했다든가.]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오히려 관계가 있다면 좌수검 때문이 아닐까?
[좌수검이 왜요?]
짚이는 부분은 있지만, 본인들에게 들어보는 게 제일 확실하겠지.
“어서오시게, 금 의원. 재차 걸음하게 해 미안하구료.”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그대를 청했네.”
역시. 좌수검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일인가요?”
“그렇지.”
[뭔데요? 나만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 그 일이라고 지칭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 좌수검에게 정반합의 일로 온 거냐고 물은 거다. 맞다면 굳이 대명사를 쓰면서 말을 고를 필요는 없겠지.
“그럼 대 소림이 정반합의 의장이신 겁니까?”
근거로 댈 만한 부분은 여럿 있다.
우선 소림이다. 무림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나도, 소림이 구파일방의 수좌이며 정파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문파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들이 섬서사변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다면 같은 정파인 무당의 눈을 피해 정반합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뒤에서 지원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거기에 소림이다.
우리 아버지가 매년 소림에 내는 보시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을 공짜로 치료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재력. 정반합 같은 무림인 조직을 운영하려면 만만찮은 돈이 들 텐데, 그만한 돈을 감당할 수 있는 집단이 어디 흔하겠는가?
“나쁘지 않은 추측이었지만 아닐세. 의장의 정체는 나도 모르고, 방장께서도 모르시지. 정반합과 소림이 서로를 접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네.”
[어휴, 그렇게 혼자 다 아는 척 잘난 척을 하더니. 꼬시네요.]
고소해하는 귀신을 애써 무시하고 다음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이어지는 설명은 소림 방장의 입에서 나왔다.
“이들이 의장이라고 부르는 이는 꽤 오랜 세월 우리 소림을 후원해왔다네. 정확히는 소림이 하는 어떤 일에 막대한 금액을 지원했지. 그 일과 관련된 집단이 있다 해 이번에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야.”
“소림에서는 섬서의 재건을 돕고 있다. 막대한 재물은 물론 일대제자와 이대제자 대부분이 차출되었다더군.”
“물론 비밀리에 행하는 일이니 금 의원도 입을 조심해주게나. 세상은 그들이 전부 면벽 수련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네.”
그래서였군.
창천이 소림 일대에 손꼽히는 강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소림이 벌어들이는 어마어마한 시주가 있을 텐데도 묘하게 일대가 낡아 보이는 것도, 반야원의 일 따위에 청운진인급의 장로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방장스님이 직접 움직이는 것도.
[반야원이 그 모양 그 꼴인 것도 이해가 가네요. 관리할 인력이 없으면 그 모양 그 꼴이 나게 되죠. 거기에 지원이 적으니 그딴 놈들이라도 붙어 있어 주는 게 감지덕지인 거고.]
“삼대제자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크흠. 아미타불.”
“시주, 남의 사정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건 무례한 일일세.”
방장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승려들이 나서 한 마디씩 얹었다.
“시주는 관찰력이 참으로 뛰어나구료. 그러니 그 나이에 탁월한 의술 실력을 갖추었겠지. 틀린 말도 아닌데 무엇하여 부끄러워하는가?”
“허나 방장. 그것은 소림의 내부사정입니다.”
“거리만 둘러보아도 어린 동자승이 없는데 내부사정이라고 할 것까지야. 우리 소림이 섬서의 일을 수상히 여겨 깊이 조사를 하고, 그 일대의 피해자들을 도운 지 벌써 스무 해가 되었소이다. 재능 있는 제자들이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후대를 위한 동량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지. 잘 보았소이다.”
방장의 인정에 주변이 숙연해졌다. 어느 곳이나 대를 잇는 일은 중대사에 속한다. 범부도 제 성씨를 잇는 일에 눈에 불을 켜거늘 이만한 대문파는 어떨까.
[그래도 그렇지, 삼대제자를 하나도 길러내지 않는다니…… 삼대제자는 그 문파의 후대 역량을 가늠하는 지표라고요. 삼대제자를 길러내지 않은 지 그렇게 오래됐다면, 사실상 무림에서 소림의 평가는 바닥일 거예요. 지금은 몰라도 후대에는 힘을 못 쓰는 문파가 될 테니까요.]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몇 안 되지만 부처님의 뜻을 이을 아이들이 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아미타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좌수검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았다.
“그대를 다시 부른 것은, 소림을 통해 섬서의 현 상황을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이네. 정반합에 아직 가입하지 않았으나 그대는 화씨의문의 후계를 자처했으니 자격이 충분해.”
그건 고마운 일이군.
홍령은 섬서의 상황, 특히 화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종종 알고 싶어 했지만 지금 당장 내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미안하던 차다.
“현금, 그대가 보고 온 것을 소상히 이들에게 말해주거라.”
둘째 형님이 그곳에 있다 왔구나.
둘째 형은 여전히 무심한, 나를 동생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소림의 손님을 보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대지는 메말랐고 강에는 물이 흐르나 기이할 정도로 살아 있는 것이 존재치 않네. 간간이 초목이 보이나 그 색이 기괴하고 물성이 요상하지. 돌은 바스러지고 한낱 이파리가 칼처럼 날카로우며, 간혹 보이는 짐승들은 다리가 다섯이거나 눈이 셋이기도 하고, 머리가 둔부에 붙어있는 등 괴이쩍은 모양을 하고 있네. 여전히 사람이 태어나나 그 수가 몇 되지 않고, 괴이한 모양으로 태어나는 이들은 일찍이 죽어 남은 이들이 촌락을 꾸리고 있지. 그들은 속으로는 영문 모를 격통에 시달리며 겉으로는 오감 중 어느 것도 느낄 수 없어 괴로움을 호소하네.”
내 곁에 내려앉은 홍령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냥 듣기에도 끔찍한데, 그곳에 살던 이가 느끼는 감상은 실로 참혹하겠지.
“그나마 이곳은 섬서의 외곽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네. 그간 소림은 섬서 안쪽으로, 정확히는 서안과 화산 일대로 진입하려 노력해왔으나 고강한 내공을 지닌 무승들도 그 일대에 발을 들이면 몸 안의 내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못했네.”
“내력이 빠져나간다고요?”
“빼앗긴다는 표현이 보다 옳겠군. 내공을 지닌 이가 그 정도이니 범인은 생기를 빨려 죽음을 맞이할 거다.”
왜 섬서사변이 무림에서 끔찍한 참상으로 통하는지, 화산과 화씨의문의 이름을 언급조차 못 하게 하는지 알겠다. 그것은 그야말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거다.
“그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심처로 들어갈 수 있어, 일부에게 조력을 요청했으나 그들 중 돌아온 이들은 없었다.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참혹한 일을 당한 탓이었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겠네.”
좌수검이 끼어들었다.
“흑사방의 일을 기억하는가?”
“아, 예.”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금리와의 내기를 위해 매화탄을 구하러 흑사방의 흑시에 향했고, 정반합이 이들을 덮쳤다. 덕분에 매화탄은 죄다 타버렸고, 증기기관의 개발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금리나 나나 큰 곤란을 겪을 뻔했지.
코끼리 발에 채여서 큰 고생을 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구해온 남매가 태양의원에서 자라고 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관련이 많은 일이었다.
“그때 자네가 구하려고 했던 매화탄. 그 물건이 바로 섬서 깊숙한 곳에서 구해오는 것이었지. 아까 현금법사가 말한, 섬서에서 태어난 자들, 그들이 이를 캐 흑사방에 넘기는 거다. 정확히는 흑사방이 이들에게 그 작업을 종용하는 거였지만.”
“흑사방은 꼬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뒤에 비밀 집단이 있다면서요? 혈교로 추정되는.”
“그래. 그자들은 섬서 태생의, 심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자들에게 일종의 마약을 팔고 헐값에 매화탄과 같은 물건을 사들였다고 하더군. 체내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줄여주는 약인데, 의존이 강하고 부작용도 심해, 종래에는 사지 일부가 썩어 떨어져 나가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더군.”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정반합이 흑사방의 씨를 말린 거였군.
그런 물건을 팔아치울 수 있는 시장이 있는 한, 그 뒷배들은 끊임없이 아픈 이들에게 마약을 먹여 돈이 될 물건들을 가져오게 시켰을 테니까.
“섬서에서 태어난 이들은 고통을 잊고 적은 식량이라도 얻기 위해, 자신들에게 고통을 더하는 심부로 들어가길 자처하고 있다. 해서 소림에서는 그들을 치료하고 관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실정이다.”
“의장은 소림의 사업을 오래도록 지원해왔고, 얻은 정보를 정반합이 넘기기도 했네. 허나 이제는 보다 긴밀히 손을 잡고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내가 이곳으로 온 거네.”
좌수검은 자신이 소림에 온 목적을 밝히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방장에게 건넸다.
[저거, 황금전표잖아요?]
맞다. 금왕전장의 황금전표다. 나도 소림방장에게 저거 하나를 시주해서 꽤 신용을 얻었지.
그런데 좌수검이 방장에게 건넨 건 한 장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잠깐만요, 열 장인데요?!]
도개걸이 정반합의 의장을 가리켜 돈줄이라고 하더니. 진짜 돈 나오는 화수분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저렇게 돈이 많은데, 아버지의 유산은 왜 노리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