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누가 누구의 형님이라는 거예요? 설마?]
나와 홍령의 눈이 동시에 진을 향했다. 진은 나를 보지 않고, 소림 방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방장, 본인은 도련님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방금 전의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그러한가? 허나 모용가주가 보낸 서찰에는 본인의 아들 둘, 첫째 모용갑과 둘째 모용을을 보내니 연등회에 기여할 수 있게 모쪼록 잘 지도해달라 적혀 있었다네.”
진, 아니, 모용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가주께서 그리 전하셨다 해도 세가의 규율이 지엄하니, 모쪼록 저를 배려해주시길 바랍니다.”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다라.
[그렇군요. 진은 모용가주의 사생아군요. 그렇다면 가명을 쓴 것도 이해가 가네요. 갑놈 그 성격에 진이 모용가의 성에 이름을 쓰는 걸 내버려 두겠어요? 객잔에서도 그랬잖아요. 제 이복동생의 목에 칼을 갖다 대는 놈이라고요.]
환자에게 끓는 약을 갖다 붓고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의 가면을 깨부순 데다, 누명을 씌우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자.
그런 자가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이복형이라면 나라도 그처럼 행동했을 거다.
“허면 그대가 모용가의 식솔이기 때문에 해당 일에 입을 다물겠다는 뜻으로 들어도 되겠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제야 진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그는 은인을 대할 때의 표정으로 날 보곤 다시 방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금 의원님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도련님은 알면서도 금 의원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는 모용가의 수치이나, 언젠가 드러날 거짓을 체면을 위해 고집하는 것보다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고합니다.”
“그렇구려. 진실로 명예를 아는 이로다.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아미타불.”
진의 증언으로 나는 완벽하게 무죄가 되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지금은 은혜를 갚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잖아요. 어서 물어봐요!]
홍령이 잊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허면 반야원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반야원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
이곳 융중다원에 양해를 구하고 임시 태양의원 출장소를 여는 편법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지금 출장소를 열었다간 꽁지 내리고 도망간 꼴밖에 더 되겠냐고.
“흐음. 그것은 조금 더 고려해봄세.”
허나 방장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사실 돌아가도 된다면 내가 말하기 전에 방장이 먼저 얘기를 꺼냈을 거다. 하지만 방장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환자들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으니 이해해주시게.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며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주도 알겠지만, 강렬히 박힌 인식을 바꾸는 데는 제법 시일이 걸리네. 우리 소림이 그대가 잘못된 불명예를 얻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야.”
[아니, 지금 소림이 그걸 하면 안 된다고요! 우리가 끝내주는 의술을 펼쳐서 그 의심을 종식시켜야 하는데! 그럴 자리만 주면 된다니까? 어디 팔다리 하나 잘린 땡중 없어요? 아니면, 그래! 방장스님 눈꺼풀 쳐진 거, 쌍꺼풀 만들어드리는 건 어때요? 수의 출장소에서 한 번 해봤잖아요! 좀 비켜 봐요, 내가 얘기할게! 내가 예쁘게 해드릴 수 있다니까요?!]
좀 진정해봐.
그래, 내가 필요한 것은 의술을 펼칠 무대다.
여차하면 출장소를 열면 된다. 일손이 부족한 데다 반야원처럼 공짜로 운영할 수는 없으니 환자가 적겠지만 분명 수요는 있겠지. 의맹의 난다 긴다 하는 의원들이 와서 반야원을 돕겠지만, 홍령 말처럼 기회만 있다면 꽁지를 말았다는 이미지 정도는 회복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일도 없지.
……가능성이 낮으니까 주목을 받는 거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이 많이 모이는 반야원을 고른 거였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반야원만 아니면 괜찮습니까?”
“시주가 곳곳에 출장소를 연다는 얘기는 들었네. 허나 그 비용이 저렴하지는 않다고 하던데, 연등회에는 부처님의 자비로 치료를 받기를 고대하며 오는 이들이 많지. 혹 공자의 출장소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줄까 저어되는구료.”
“아뇨, 출장소를 얘기한 게 아닙니다. 반야원 말고도 소림이 운영하는 의원이 또 있지 않습니까?”
방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주, 설마…….”
“관자재암에 가겠습니다.”
관자재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반야원과는 달리 가는 길도 약간 험하고, 이름으로 미루어보듯 작은 암자에 불과한 규모. 하지만 엄연히 소림의 관리 하에 있는 의원이지.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건 사전에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반야원과 달리 무대의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출장소를 차리는 게 나을지, 관자재암에 가는 게 나을지 확신은 못 하겠지만.
“시주, 알고 있소이까? 그곳은…….”
“예, 압니다. 임부와 산부를 돌보고, 여인들만 걸리는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닙니까?”
전생의 분류로 말하자면, 관자재암은 산부인과와 비슷하다.
“허어, 아미타불…….”
“안 됩니다, 방장스님. 그곳은 금남의 구역이지 않습니까?”
“어찌 남자가 여인의 병을 돌본단 말입니까. 아니 된다 하셔야 합니다.”
옆에 있던 스님들마저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반야원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치료했습니다. 차마 관자재암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어 그러한 병증임에도 반야원을 찾는 이들도 있었고요. 태양의원에서는 원래 달리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실력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태양의원에서도 산과에 해당하는 일은 아직 해본 적 없다. 산파라는 존재가 이미 있기 때문인지 다들 의원보다는 산파를 찾았다. 그 분야를 흡수할 생각도 있지만 달리 기회가 없었는데, 이참에 관자재암에서 제대로 이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알기로 관자재암에는 사람이 많이 부족하다던데. 아닙니까? 원래도 부족한데 연등회가 시작되면 더욱 바빠지겠죠. 일부러 부처님의 도량에서 아이를 낳고자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던데요. 일손이 모자라면 출산으로 인해 취약해진 산모와 갓난아이들의 목숨도 위험하겠지요. 안 그래도 오고가는 사람이 많은 연등회인데 말입니다.”
내가 지적한 부분은 전부 사실이었기에 승려들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래도 안 넘어오는군.
“만에 하나라도 제가 남자라 여인들에게 엄한 짓을 할까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곳에는 저 하나쯤은 제압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미파의 비구니 말입니다.”
관자재암은 소림의 영역 내에 있지만 엄밀히 말해 소림의 것이 아니다.
그곳은 무림의 또 다른 불교무문,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운영한다. 일종의 파견업무라고 할까? 이곳 소림에서 여자들만의 병은 아미의 비구니들이 와 살피고, 아미 일대에서 남자들만의 병은 소림의 비구니들이 가 살피는 거다.
“제가 관자재암에서 진료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소란이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소림 방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일 다경 정도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노승의 입이 열렸다.
“이 늙은이가 그것을 약조하기는 어렵다네. 그곳의 운영은 오로지 아미의 비구니들께서 하시는 일이니, 금 의원이 직접 가서 허락을 받으시게나.”
말은 어렵다고 했지만 사실상 승낙이었다. 아미본산도 아니고 파견을 나온 이들이 소림방장의 말을 어찌 무시할까?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고 방장은 축객을 내렸다. 나와 진이 방문을 나서는데도 소림의 승려들은 자리를 뜰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나에게 반야원 문제를 추궁하러 온 게 아니었나? 볼일이 끝났으면 가야 할 텐데.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하긴 해요. 당신 하나 보자고 이렇게 많은 무승들을 데리고 온다고요?]
슬쩍 훑어만 봐도 상대 무공의 고하를 짐작하는 무공 고수들이 내 실력을 지나치게 부풀려 생각했을 리도 없다. 솔직히 아까 전엔, 내가 비밀리에 화산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서 이를 징치하러 온 건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소림이 기다리고 있던 진짜 손님이 나타났다.
왜 그가 진짜임을 알아볼 수 있었냐면.
[좌수검…….]
내가 왼팔을 달아준 외팔의 무인, 좌수검이 한 무승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내하고 있는 그 승려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형님, 그리고 좌수검. 여기서 뵙네요.”
“연등회가 열리니 자네를 여기서 볼 거라고 예상했지.”
좌수검과는 꽤 덤덤하게 인사를 나눴다. 내가 정반합 가입을 보류해서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하긴,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사람은 아니긴 하지.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릴 때 보고 간만에 뵙는군요.”
둘째 형 금곤양. 법명 현금.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누가 봐도 우리 형제의 얼굴임에 나는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강하군요. 창천이 봤으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겠어요. 금강역사가 떠오르는 무승이군요.]
내가 봐도 그랬다. 아무리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해도 걸음걸이 하나, 눈빛 하나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다. 둘째 형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주. 누군가와 착각하신 건 아닌지.”
“형님, 저 금태양입니다. 형님의 막내아우 금태양이요.”
“……출가 전 그런 인연을 갖고 있기도 했지요. 허나 지금의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저와 속세를 이어주던 유일한 끈인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은 더더욱.”
그는 내게 불호를 읊조리고는 다시 좌수검을 안내하며 나를 지나쳤다.
[뭐예요, 저 사람?! 사람 민망하게! 속세의 인연이 끊겼어도 사람을 저렇게 대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소림의 일 외에는 세상 무심하다는 얘길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누명을 벗을 때 둘째 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를 잘했다. 괜히 그 이름을 대며 나는 결백하다고 주장했어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났을 거다.
“금 공자의 집안도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나 봅니다.”
내 옆에 있던 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 이쪽이랑도 할 얘기가 있지.
“일부러 속인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께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정이 있어서, 평시엔 알려드린 이름을 쓰지요. 더군다나 그 상황에서 복잡하기만 한 제 신분을 밝혀봤자 은인께서 더 경계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친구가 되면 좋을 거 같은데.
“지금은 상황이 좀 복잡하니, 언제 괜찮으면 차라도 한잔하죠.”
“은인께서 부르신다면 만사 제쳐놓고, 물론 도련님의 일은 제쳐놓을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달려오겠습니다.”
“서로 은혜를 입었으니 은인이라는 말은 관두죠. 나이가 비슷한 거 같은데, 우리 친구 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은 내 말이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습니다. 중원에 믿음직한 친구가 생겼군요.”
“친구끼리 말 편하게 하자. 태양이라고 불러.”
나는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내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알겠어. 나는 계속 진이라고 불러.”
“혹시 성도 따로 쓰는 게 있어? 보니까 모용씨도 쉽게 못 쓰는 거 같던데. 나는 은혜 입은 사람한테는 반드시 갚는 주의라, 네 이름으로 선물을 보내려면 알아둬야 할 거 같거든.”
내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진이 파하하 웃었다.
“성이라, 보통은 진으로 끝나지만 너에게라면 알려줄게. 원래는 김 씨 성을 붙여 김진이야.”
어?
[왜 그래요]
내 전생의 이름, 내가 얘기한 적 없었지?
[딱히 없죠? 당신은 그 전생의 다양한 얘기를 하지만 당신 자신의 신변에 대해선 거의 얘기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전생의 내 이름도 김진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