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54화 (154/350)

154화

객잔에서 내가 앞을 막아섰던, 모용갑 앞에서 머리를 박았던 그 무인. 지금 보니 내 또래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그 품 안에 보따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고 가신 물건이 있어 챙겨서 따라왔습니다. 버리고 가도 될 만큼 싸구려로 보이진 않아서…….”

쫓겨나듯 빠져나와서 챙기지 못했던 약과 침구 등, 내 왕진용 물건들이었다. 약이나 침도 그렇지만 주사기나 청진기 등은 금왕공방에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 특별했는데, 그걸 챙겨서 가져다주다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소중한 물건들입니다. 이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아닙니다. 도련님의 앞을 막아서 주신 분은 살면서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분께 보답을 바라다니요.”

“그래도―.”

“오히려 제가 은혜를 더 갚아야 합니다. 물건도 물건이지만 사실 알려드릴 게 있어서 급히 쫓아 왔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은 들어서는 안 된다는 듯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 전염병은 갑자기 발생한 것도, 금 의원님 때문에 퍼진 것도 아닙니다. 흉수는 따로 있습니다.”

“흉수라면?”

“그 병은 모용세가가 있는 요녕의 풍토병입니다. 산골 깊숙한 곳의 화전민들에게서 퍼지는 병인데, 그간은 모용가가 이를 처리해왔습니다. 허나 우리가 그들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죽인다고 착각한 자들이 중원으로 도망쳤지요. 병이 나으면 모용세가에서 일을 주어 정착을 시킨다는 게 소문이 잘못 퍼졌나 봅니다.”

“그렇다면 모용세가는 그자들을 추적하러?”

“맞습니다. 사실 모용가는 그간 중원에 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요녕의 일을 처리하기도 바쁘니까 말이죠. 헌데 이번에 도주한 자들이 있고, 그들이 치료를 위해 소림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얻어 오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모용갑이 하필 그 병의 치료약을 갖고 있던 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병이 갑작스럽게 퍼졌던 것도 설명이 된다.

[당신에게 은근슬쩍 원인을 떠넘긴 것도 그래서였네요. 사실이 알려진다는 건 자기네 집안 영역단속을 못 했다는 뜻이니까요. 굳이 연등회 초대장을 들고 온 것도 중원에 올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군요.]

그래도 그렇지. 멀쩡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워?

[이 사람 아니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모를 뻔했네요. 난 진지하게 당신의 병이 전염성이 있던가, 혹시 어떤 변이를 일으킨 건 아닌가 고민하고 있었다고요.]

“하마터면 내 잘못도 아닌 일로 고민할 뻔했습니다. 중요한 걸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은인.”

“저는 그냥 알고 있는 사실을 전달했을 뿐, 생면부지의 사람 앞에 떨어지는 검을 막아주신 분께 은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허면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제가 반드시 보답을 하겠습니다. 모용가의 식솔이라 보답을 받기 어렵다 하셔도, 방법은 찾을 수 있습니다.”

출처를 모르게 돈 세탁을 하는 정도야 진양 누님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이 이름 모를 무인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음, 그렇다면…… 진이라 불러주십시오. 본명은 아닙니다만, 사정이 좀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 보답을 하신다면,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실은, 반야원에 흉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원과 환자들에게 물어본 바로는 반야원에 들러 잠시 머물렀다가 병이 퍼지기 직전 도망친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자를 추적하다가 반야원의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 건데,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그자를 놓칠 것 같습니다. 혼자라도 추적하려 하는데 혹시 도와주시겠습니까? 아까 도련님을 상대하시는 걸 보니 일신의 무위가 가볍지 않으신 듯합니다.”

“어느 방면으로 도주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예. 범인이니 얼마 가지 못했을 겁니다. 둘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을 돕지 않는다면 천하의 개새끼일 거다. 거기에 그 흉수를 잡는다면 병을 퍼트린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도 있을 거고.

융중다원에 들러 새 가면을 챙기고 진과 함께 흉수가 떠났다는 방향으로 추적을 개시했다. 당당과 창천, 금동이도 함께였다.

안 그래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당당은 추적 하면 또 사천당가를 따라올 곳이 없다며 나섰고 창천은 내가 누명을 썼다는 말에 검을 챙겨들었다. 금동이는…… 그냥 다원에 들어서자마자 내 어깨에 덥썩 올라탔다.

우리는 진이 인도하는 대로 흉수가 도주한 방향을 향해 달렸다. 확실히 누군가가 급하게 길을 떠난 흔적이 있었고 그 흔적은 깊은 산 속으로 이어졌다.

“이쯤에서 흔적이 옅어졌군요.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추적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야생동물이 그 흔적을 덮어버린 건지. 단순한 추적기법으로는 상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진이 제안했다. 우리는 네 방위로 나누어 흉수를 찾기로 했다. 만약을 위해 모용세가의 약도 나누어 가졌다.

냐옹!

“아파, 이 녀석아. 왜 갑자기 물고 그래?”

당연히 날 따라온 금동이를 어깨에 얹고 내가 택한 방향을 확인하는데 금동이가 계속 날 괴롭혔다. 귀를 잘근잘근 씹어서 도통 주변을 확인하는 데 집중을 못 할 지경이었다.

“왜, 이쪽이 아닌 거 같아?”

먀아―.

[금동이가 맞을지도 몰라요. 이 방향에는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여요.]

먼저 앞을 훑어보고 온 홍령이 거들었다. 사실 금동이랑 붙어 있기 싫어서 먼저 갔던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나는 창천과 당당 방향으로 가볼게요. 당신은 진이라는 사람 쪽으로 가 봐요.]

귀신이 둘러보고 없다면 다른 방향으로 가서 함께 수색하는 게 더 빠르겠지.

진이 간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신기할 정도로 금동이가 귀를 씹는 걸 멈췄다. 덕분에 빠르게 그 일대를 훑어볼 수 있게 되었다.

먀!

어느 순간, 금동이가 내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내가 가던 방향의 좌측으로 맹렬히 달렸다.

“야, 어디 가?!”

사실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지만, 낯선 산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찾을 도리가 없다. 나는 방향을 틀어 금동이를 쫓았다. 신법을 쓰는데도 도통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산이라 짐승에게 더 유리한가?!

그렇게 반 각을 달리자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고 계곡이 보였다. 그 앞에 사람이―

“도련님 이건―! 끄억!”

검광이 번쩍하고 사람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금동이는 그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찾던 것은 여기 있다는 듯.

“진?”

사람을 벤 것은 진이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쓰러진 몸뚱아리에 모용세가의 약을 뿌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얼굴에 다시 은인을 대하는 표정이 그려졌다.

“……흉수를 발견하긴 했는데, 저항이 거세서 어쩔 수 없이 베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나는 금동이를 다시 안아들며 말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진도 그것을 알기에 사과하는 거다.

[뭐야, 죽였어요? 아아! 그러면 당신 해명은 누가 해줘요!]

뒤늦게 홍령이 쫓아와 탄식했다. 맞다. 내 누명을 벗으려면 저자가 병을 가진 채 요녕에서 도망쳐 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를 증명할 일은 요원해졌다. 전생처럼 역학조사나 질병 분석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기술도 없고 그런 걸 할 만한 행정부처도 없으니까.

“뭐야, 죽임?”

“죽였군. 어쨌든 찾은 건가.”

뒤늦게 쫓아온 창천과 당당도 죽은 시신을 보고 혀를 찼다.

“깔끔하게도 자름. 근데 이건 뭐임? 모용(慕容)?”

당당이 죽은 이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잘린 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긴 했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그자의 이마에 향해 있었다. 두르고 있던 두건이 반쯤 풀려나간 자리에 모용의 이름이 인두로 지져져 있었다.

“노비에게 찍는 낙인 같군. 모용가의 노비인가?”

“잘됐음! 이걸 보여주면 그쪽에서 도망친 자라는 게 확인됨! 증거임!”

창천과 당당의 낯이 그제야 펴졌다. 당당은 아예 제 주머니를 꺼내 그 머리를 담았다.

[근데요, 도망친 건 화전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모용가의 노비인 거죠?]

나도 그게 의아하던 참이다.

진과 눈이 마주치자 진은 멋쩍은 듯 웃었다.

“세가의 치부라 말씀드리기 좀 그랬습니다만, 노비였던 자가 도망쳐 화전민이 된 것입니다. 해서 다시 노비가 될까 도주한 것이고요.”

금가장은 아버지 금왕이 노비를 부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례적일 정도로 노비가 없었지만, 사실 중원에서 이름난 문파나 세가가 노비를 부리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단은 돌아가자.”

흉수는 생각보다 쉽게 처리했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이 흉수의 머리를 가지고 내가 전염병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걸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라는 문제가 남았는데, 그건 다시 융중다원에 도착하자 해결되었다.

“반야원의 일을 하문하기 위해 방장께서 오셨소이다.”

소림 방장이 융중다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소림사를 작게 옮겨온 거 같네요.]

홍령의 말마따나, 다원의 가장 큰 다실 앞에는 지난번 반야원에서 봤던 것보다 많은 승려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도열해 있었다.

[고수다. 저자도, 저자도. 저 승려 또한 고수다.]

이곳에 온 이후로 눈에 띄는 고수를 보지 못했다며 내내 기분이 안 좋던 창천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눈을 빛내며 전음을 보냈다.

그간 잘 보이지 않던 고수들을 불러 모은 자리라니.

분위기가 과거 태청의문의 집법당을 방불케 한다. 그때는 처벌을 받는 게 장 의원이었고 내가 구해주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추궁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좀 쫄리는데.

“방장, 금가장의 금태양 공자가 왔습니다.”

“들라 하게.”

다실 안에는 방장과 다른 승려들 여럿이 앉아 있었다. 바깥이 강한 고수들로 인해 삼엄한 분위기였다면 다실 안은 고아한 도량(道場)에 들어온 것 같았다. 무죄를 증명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템플스테이 중 ‘주지 스님과의 차 한 잔’ 같은 프로그램을 하러 들어온 거 같달까.

“앉으시게나. 반야원에서의 얘기는 들었네. 그래, 질병이 돌았고 환자들이 공자가 원흉이라 지목을 했다지.”

“제가 아닙니다. 원흉은 이자입니다.”

나는 챙겨온 주머니에서 피가 굳은 머리를 꺼냈다. 옆에 도열해 앉은 스님들이 눈을 부릅떴지만 나는 꿋꿋이 소림방장에게 그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마에 모용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습니다. 이자는 모용가의 노비로, 도망쳐 화전민으로 살다 풍토병에 걸렸으나 모용가의 치료를 거부하고 도주했습니다.”

“호오, 그러한가.”

방장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일 뿐 내 말을 확실히 믿는 거 같지가 않았다. 방장의 옆에는 작은 비단 주머니가 있었다. 반야원에서 모용갑이 붉은 가루를 꺼냈던 그 주머니다. 이들은 내가 흉수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잘 보시면 이 낙인이 오래된 흉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죄 없는 사람에게 급히 모용가의 낙인을 만들어 찍고 목을 베어오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지. 시주의 말이 틀리지 않구려.”

젠장.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누명을 벗을 수 있지?

그때, 방장의 시선이 내 뒤에 시립해 있던 진에게 향했다.

“시주가 말해보시구려. 모용가의 식솔인 그대라면 진실을 알고 있을 터. 그대의 형님이 알면서도 죄 없는 금 공자를 흉수로 지목한 것이 사실이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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