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놀라운 일이었다.
홍령이 갑놈이라고 부르던 그놈의 이름이 진짜 갑인 것도 그렇긴 했지만, 그보다는 모용갑이 가져온 그 약이 진짜 효과가 있는 것이 놀라웠다. 환자들은 빠르게 낫기 시작했다. 괴사로 인해 신체 일부가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정말 중증의 환자도 한 시진이면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졌다.
“빨리빨리 만들어. 늦잖아!”
“지금 달이고 있습니다!”
“수하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굼벵이 같아서는. 거기 의원들! 빨리 안 돕고 뭐 해?”
“예, 예! 갑니다!”
소소하게 놀라운 점이라면, 모용갑은 약을 가져오긴 했지만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갖고 있던 약을 다 처방한 후 약이 모자라자 그의 수하들이 약을 달였다. 무인일 뿐, 의약에는 조예가 없는 건지.
[그냥 사람 부리는 게 익숙해서 저러는 거 같은데요? 저런 게 의원일 리 없어요.]
홍령이 못마땅하다는 듯 모용갑과 그 시중을 들고 있는 원장을 쏘아보았다. 술에 담배에 여인까지, 자기가 가진 진귀한 것들은 죄다 가져다 바치는 꼴이라니. 뻔해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뻔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저 담배는 우리가 내기 물건으로 받으려고 했는데. 저거 말고 또 뭘 달라고 해야 저 얼굴을 죽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전염병 사태 때문에 어물어물 지나갔지만 내기한 열흘은 이미 지났다. 원래는 원장이 제일 아끼는 거 같은 담배를 받아낼 생각이었지. 이 상황에서 내기 같은 걸 거론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기에 그냥저냥 지나갔지만…….
“가만 보니 아는 얼굴이 있는데. 우리 구면이지 않나?”
원장의 접대를 받으며 있는 대로 콧대를 세우던 모용갑이 불쑥 내게 다가왔다.
“뭐 하는 작자인가 했는데, 여기 있는 걸 보니 연등회에 초대받은 의원인가? 이렇게 다시 본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어디의 누구지?”
“잠시 기다리지? 환자를 보는 중이라서.”
첫인상이 썩 좋지 않기도 했지만 여전히 태도가 불손한 것이 불쾌했다. 전생의 악연을 떠올리게 해서 더더욱.
내가 그를 무시하고 환자의 상태를 돌보고 있자, 녀석은 기분이 나빴는지 몸을 홱 돌렸다.
[어어?! 저 갑놈, 지금 무슨 짓을―!]
그리곤 약을 끓이고 있던 탕약기를 집어 들고 와 내가 보고 있던 환자에게 끓는 약을 끼얹었다. 하지만 내 반응도 늦지 않아서, 끓는 약물이 환자에게 닿기 전 대부분을 바닥에 쳐낼 수 있었다.
“악! 뜨거!”
그러나 일부가 환자에게 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나는 서둘러 약을 닦아내고 찬물을 붓고 화상에 좋은 연고를 꺼내는 등 빠르게 움직였다.
모용갑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환자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이에요! 환자한테 끓는 약을 부어? 제정신인가?! 아니, 제정신이라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내가 귀신만 아니었으면 이놈을 그냥!]
“그래서, 네놈의 이름은?”
환자의 화상 처치가 끝날 즈음 기다렸다는 듯 모용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지금 환자한테 끓는 약을 부어놓고 이름 타령을 하시겠다?”
“환자를 보느라 바쁘다고 하기에 일을 줄여주었을 뿐인데.”
“일을 줄여? 방금 이 환자가 화상을 입은 거 안 보여? 내가 쳐내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어.”
“화상 따위야 금세 낫는 거 아닌가. 그보단 전염병을 치료하는 게 낫지. 봐라. 화상을 입었을 뿐 피부는 낫고 있잖아?”
“화상을 살피면서 이미 확인했다. 바르는 것도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아니지.”
“말이 많은 놈이로군. 그래서 이름은? 이 몸이 벌써 네 이름을 세 번이나 물었다. 다음은 없어.”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이딴 놈에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흐응, 계속 그렇게 버티시겠다?”
녀석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왠지 이렇게 나올 거 같았지.
“그 비싼 이름이 언제 그 입에서 나오나 보지!”
빠른 발검, 동시에 검 끝이 곧바로 내 목을 향해 호선을 그으며 날아왔다.
이미 한 번 본 수에 호락호락 당할 줄 알고?
가볍게 몸을 틀어 일 수를 피하자 곧바로 이 수가 휘어져 들어왔다.
[다리!]
놈의 검이 내 발이 있던 바닥을 거칠게 긁었다. 적잖게 내공을 실었는지 돌바닥이 깨지며 얕은 구덩이가 생겼다.
[단순하지만 파괴력이 있군요. 어디서 저런 검이?]
“이것도 피해?”
“어쭙잖은 검을 이것도라고 칭하기엔 조금 쪽팔리지 않나?”
나도 슬슬 화가 났다. 환자들이 널려 있고 아직 치료가 한창 진행 중인데 이런 곳에서 검을 뽑아서 난동을 피우다니.
[괜찮겠어요?]
“호오. 저번에는 검이더니 이번에는 단도술인가? 점점 네놈의 내력이 궁금해지는군.”
홍령이 걱정했지만 나는 태양보도를 뽑아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장검보다 이게 더 익숙하다고.
“감히 덤벼오니 전심전력으로 상대해주마. 모용세가의 모용갑이다!”
녀석이 먼저 제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고, 나는 맞서 달려가다가 바닥을 향해 슬라이딩했다. 녀석의 검이 상체를 향해 휘둘러지려다가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나를 쫓아오는 걸 벌떡 일어나 피하며 무방비하게 놓인 왼팔의 소매를 서걱 잘랐다.
흰 꽃이 수놓아진 하얀 비단옷이 나풀거리며 하늘을 날았다. 모용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니.”
“뭐래. 체술이거든. 기본 중 기본 아닌가?”
[기본이긴 한데 무림인들은 쪽팔리다고 잘 안 쓰긴 해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구할 때만 쓰죠.]
뭐야, 그런 거면 진작 알려줄 것이지!
[실전에서 제법 잘 쓰길래요. 쪽팔린 게 대수예요? 이기면 됐죠!]
그래. 어쨌든 이 짧은 한 수에서 나는 녀석을 이겼다. 아마도 모용세가를 상징할 수가 놓인 소매를 내가 잘라버렸으니까.
“내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지? 알려주지.”
쩌걱―
모용갑을 돌아보며 씩 미소를 짓는데 뭔가 불길한 소리가 났다.
“나는, 태양의원의 금태양이다.”
쩌걱―
[잠깐만, 아까 그 한 수가 설마?]
녀석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가면이 부서져 내렸다.
“어떤 괴상망측한 걸 숨기느라 가면을 쓰나 했더니, 예상대로 아주 흉측한 몰골이구나!”
다급하게 손으로 가면의 파편을 붙잡았지만 큰 조각 하나만 붙잡았을 뿐 나머지는 박살이 나서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대체, 언제?!
[한순간 스쳤어요. 손가락 정도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순간 내공을 불어 넣었나 봐요. 애초부터 목적은 가면이었어요!]
“백매(白梅)의 소매를 잘린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 꼴을 보니 유쾌하군. 태양의원의 금태양? 듣도 보도 못한 버러지가, 감히 모용세가의 적장자 앞에서 콧대를 세워?”
나는 서둘러 얼굴을 가릴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내 가면을 박살 냈다는 사실보다, 나를 향하는 시선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저, 저 얼굴……!”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어?!”
여태껏 봐왔던 환자들의 시선이 돌변했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가득하던 눈은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 찼다. 모용갑이 끓는 약을 끼얹었던, 하마터면 큰 화상을 입을 뻔했던 환자가 몸을 일으켜 내게서 멀어졌다.
원장과 의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모용 공자! 도와주십시오! 저놈이 이 괴상망측한 병을 퍼트린 게 틀림없습니다!”
“공자! 살려주세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반야원에 들어온 게 틀림없어!”
모용갑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아하? 아하. 좋아.” 하고는 다시 내게 칼을 겨누었다.
“이 전염병 사태의 원흉이 네놈이렷다? 아주 가증스럽군.”
“아냐! 내가 아니다!”
“그 흉측한 얼굴을 다시 드러내고 말해보시지!”
녀석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까의 단순하고 빈틈이 보이던 검과는 달랐다. 녀석의 검은 빠르고 강맹했으며 교묘하기까지 했다. 홍령마저 패닉이 온 건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녀석의 공세에 밀려 반야원의 정문으로 계속 뒷걸음질 쳤다.
정문을 넘어서기 직전의 상황. 녀석은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감히 백매를 자른 실력은 가상히 여겨주지. 네놈의 발로 나가게 해주겠다.”
되도 않는 아량에 한숨을 돌리기 무섭게, 무언가 내게 날아들었다.
돌이었다.
던진 힘이 보잘것없어 그 작은 돌은 내 근처에 떨어졌지만, 이내 다른 것들이 날아들었다.
“이 기만자!”
“우리를 치료하는 척하고, 병을 옮겨?!”
“꺼져라! 당장!”
환자들이 낡은 걸레뭉치부터 쉬어빠진 만두 따위를 집어던졌다. 일부 몸이 성한 자들은 어디서 빗자루나 마대자루 같은 걸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일 장 이상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코너에 몰린 짐승을 몰이하듯 내게 뾰족한 끝을 위협하듯 들이댔다. 한 발짝이라도 안으로 들어섰다간 목숨을 각오하고 나에게 공격을 가할 것 같았다.
[일단은 물러나요. 지금 당장은 오해를 풀 방도가 없어요. 어서요!]
젠장.
성난 환자들 너머로 고깝다는 듯 킬킬거리고 있는 원장과 의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극찬을 받으며 콧방귀를 뀌고 있는 모용갑의 얼굴까지.
결국 나는 반야원의 정문을 넘어 한참을 도망쳤다. 문을 나서고 나서도 환자들이 계속 쫓아오며 무언가를 던져댔기에 그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야 했다. 구석진 골목에 이르러서야 쫓아오던 이들이 사라졌고 나는 그제야 기운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 얼굴을 보고 기겁하던 사람들의 반응 정도야 익숙하다. 가족도 차마 괜찮다고 하지 못할 얼굴이지 않았나. 태양의원에서 장 의원이나 다른 이들에게 얼굴을 보여주며 식사를 하게 되기도 했지만, 보통은 이런 반응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반응을 보인 이들이 내가 돌보던 환자들이라는 게, 조금 충격이었다.
나처럼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그들이 낫는 모습을 보며 나도 위로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됐다는 기분에 홍령의 힘을 빌어 의원을 하기로 결심했었는데.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었잖아요. 모용갑 그 녀석이 기름을 붓고, 반야원 의원들이 불씨를 던진 거고요. 그게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을 거예요.]
알아.
머리로는 아는데…….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조금 안정을 찾은 후 융중다원으로 돌아가 운기조식으로 심신을 달랜 후 대책을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천하백대명의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반야원에 간 건데, 전염의 온상으로 이름을 날릴 수는 없으니까.
“저기, 괜찮으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골목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그때 도와주셨던 그,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때 그 무인이네요. 모용갑이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그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