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52화 (152/350)

152화

그렇게 윽박지르고 나서야 의원들이 엉거주춤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전염병이라는 말에 입가를 천으로 가리고 손에 장갑을 끼는 등 기본적인 대처도 했다. 쓰레기지만 최소한 의원으로서 기본은 되어 있군.

“전염병이라니. 증상은?”

“얼굴과 손발 사이 등 몸 여기저기에 발진과 수포, 고름이 잡혔습니다. 염증과 부종도 따르고, 검게 물든 부위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답니다. 일부는 기침과 가래, 호흡곤란이 있고 피를 토하며 전신, 특히 겨드랑이에 통증을 호소합니다. 심한 경우 눈썹이 빠지거나 괴사 증상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증상이 제각각 뒤섞인 환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확인한 것들을 공유하자 의원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나병(癩病)에 개충(疥蟲), 흑사(黑砂) 증상이 어찌 같이 나타난단 말인가! 거짓을 고하는 건가!”

나병은 문둥병, 개충은 옴, 흑사는 페스트다.

나도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지만…….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죠.”

병상의 상태를 확인한 의원들의 낯이 잿빛을 넘어 돌처럼 굳었다. 그래도 행동은 빨랐다. 그들은 빠르게 의원의 문을 걸어 잠그고 물을 끓여 모든 것을 삶았으며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전염병이 기존의 전염병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 * *

원장은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금태양이 자신을 들볶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환자들의 상태는 지금껏 그가 반야원을 맡으면서 겪은 전염병 환자들 중 최악이었다.

어찌어찌 의원 내에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은 막았지만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밖에서 생긴 환자가 반야원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원장님, 더 이상 병자를 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전염병 안 걸린 놈들을 내보낼 수는 없나?”

“당장 발병을 안 했다 뿐이지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데, 그놈들을 내보냈다간 밖에서 더 퍼트리고 올 겁니다!”

“지금까지 연등회 때 했던 것처럼, 반야원 밖에 천막을 쳐서 임시 진료소를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할 거 미리 하는 겁니다!”

“아서라. 전염병인데 천막을 쳐? 이 일대에 병을 들끓게 만들고 싶으냐!”

“답이 없으니 그러지 않습니까!”

“약도 뭐 하나 시원하게 듣는 것이 없습니다. 첫 날 발병한 자들은 이제 팔다리가 썩어 떨어져 나가기까지 하니, 소림에 허락을 구하고 싹 묻어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생매장을?! 소림 그 땡중들이 그걸 허락해줄 거 같으냐!”

“몰래라도 하면 안 됩니까? 몇 년 전에도 그렇게 해서 싹 잡지 않았습니까? 또 하죠! 그거 외에 방도가 없잖습니까?”

의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생매장에 환호를 보냈다. 반야원을 걸어잠근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하지만 원장의 마음 또한 생매장 쪽으로 기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짐승도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힐 거 같으면 전부 땅에 묻거나 불태워버리지 않던가? 사람이라고 다를쏜가?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일전의 일 때문이었다.

“그건 안 된다. 그때 일 이후 무승 현금이 우리 주변을 오래도록 감시했다. 반 년 넘게 뒤를 캤으나 누구 하나 발설하지 않아 넘어갔지. 뒤탈 없을 무연고자만 골라 묻은 것도 현명한 일이었어. 하지만 두 번은 위험하다. 소림이 알게 된다면 우리는 끝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불도를 닦는 것보다 중생구제를 앞세우는 것이 작금의 소림이다. 그런 소림이 운영하는 반야원에서 환자를 생매장, 아니 살처분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도통 대책이 없군. 밖에 소식을 알리러 간 놈들은 왜 여태 돌아오질 않는 게냐!”

“…….”

원장의 윽박지름에 의원들이 입을 꾹 닫았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유래 없는 전염병이 돌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다.

“믿을 만한 놈들로 보냈거늘…… 이 일이 끝나면 놈들을 의맹의 살생부에 올릴 것이다. 일전의 살처분부터 우리가 한 지저분한 짓들을 전부 그놈들에게 뒤집어 씌울 거다. 중원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입을 닫고 있던 의원들 중 몇 명이 등을 움찔했다. 도망친 이들을 부러워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녀석들이 분명 있겠다 싶어 말한 것인데 그 숫자가 원장의 생각보다 많았다.

‘이놈들을 묶어놓고 기회가 되면 나부터 몸을 뺀다. 기루에 미리 준 돈이 있으니 그걸 받아다가 중원무림의 손이 닿지 않는 장강 이남의 강호로 가면……!’

원장은 근엄한 얼굴로 의원들을 훑어보았다.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의원 하나가 떠올랐다.

“금 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잠도 안 자고 병자들을 보고 있습니다.”

“잠을 안 자는 게 아니라 못 자는 게지. 지 잘 자리까지 내주지 않았나? 멍청하기는.”

사실 환자들을 눕히려면 자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원장과 의원들이 머무는 뒷채는 환자를 들이지 않았다. 한 사람 당 방 하나를 쓰니 한 방에 모여서만 자도 충분한 병상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헌데 금 의원도 너무합니다. 당가의 직계가 그자의 친우 아닙니까? 허면 달려와 손을 거들라 해야지요.”

“자존심을 세우는 게지. 그날의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게야.”

“정파 무림세가의 협의도 별 것 없군요. 사정이 이러면 젊은 것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지 말입니다. 그게 협객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니면 슬쩍 와서 한 방에 병자들을 처리할 독약이라도 쥐여 주든지 말입니다. 하핫!”

“씁, 사실 당가 놈이 문제가 아니라 금 가 그놈이 문제지. 그놈만 아니었어도, 독약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나? 소림도 생매장을 하는 건 뭐라 하겠지만, 죽은 걸 갖다 묻는다는 데 뭐라 하진 않을 거 아닌가? 헌데 그놈이 잠도 안 자고 눈을 부릅뜨고선 병자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처음부터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눈엣가시 같은 금태양이었다. 혼자만 밤새도록 환자를 진료해 휴식을 취하는 다른 의원들이 환자들 눈치를 보게 만들지를 않나, 반야원 의원들이 뭐라도 잘못 처치를 할까 봐 멀리서도 눈을 부라리질 않나. 뭐만 눈에 걸린다 하면 내공을 담아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반야원에는 주지 않고 소림에게만 준 황금전표도 어른거렸다. 그 돈이라도 있으면 뭐라도 할 게 아닌가?

이게 다 금태양 그놈 때문이다.

그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헌데 원장님, 환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덥디다.”

“무슨 소문?”

“금 의원이 가면을 쓰지 않습니까? 누군가 그 가면 안의 얼굴을 봤답니다.”

“남의 가면 속이나 궁금해 하고. 다들 덜 아픈가 보지?”

“아니, 들어보시라니까요.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그 얼굴이 말입니다, 수포와 발진으로 인한 흉터로 가득하다지 뭡니까?”

“……뭐라?”

“얼마 전엔 어린애가 가면을 건드리니까 손을 꺾어서 잔혹하게 제압을 했다더군요.”

“시기도 참 수상쩍습니다. 하필 그자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모두들 금태양을 이 상황의 원흉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따지겠다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함부로 대하지 못할 뒷배가 있는 것도 있거니와, 이제와 금태양을 어찌하겠는가? 병은 퍼졌고 금태양을 가두거나 쫓아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또한 모두가 알았다. 지금 금태양을 쫓아내면, 그가 밤을 새우면서 보던 환자들이 전부 저들의 몫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크흠. 일단 이 상황을 종식시킨 후, 그때 그 자에게 죄를 묻도록 하지. 소림에 상황을 설명하고 벌을 청하면 제아무리 금가장이라도 무시 못 할 것이다.”

“맞습니다, 일단 전염병부터 잡고 봐야지요.”

“원장님의 혜안이 실로 탁월하십니다!”

모두들 같은 마음으로 원장의 말에 찬동하고 나자 정적이 감돌았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상황에 대한 긴급회의를 하겠노라 뒷채로 들어와 편히 앉아 있자니 전염병이 들끓는 곳으로 가 바쁘게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대며 더 늘러 붙어 있을까, 의원들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중.

“원장님! 원장님!!!”

“저 목소리는?”

밖에서 그를 찾는 다급한 소리에 원장이 벌떡 일어났다. 소림과 관아에 상황을 보고하러 보냈던 의원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한 놈 정도는 제대로 정신머리가 박혀 있을 줄 알았지!”

원장이 벌컥 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원장이 느긋하게 쉴 시간이 는다. 멍청하게 돌아온 녀석에게 잘 왔다고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녀석은 그 이상으로 큰 선물을 들고 왔다.

“치료약입니다! 약을 갖고 계신 분이 지금 오십니다!”

“뭐라고?!”

“이 일대를 벗어나다가 우연히 만나 말씀을 나눴는데 효과 좋은 약을 갖고 계셨습니다! 병자에게 시험해보니 반 시진도 안 되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놈이? 원장은 사실상 도망치려다 돌아왔다는 말을 하는 의원을 째려보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귀인은 어디 계시냐!”

“제가 먼저 알리러 달려왔고 천천히 물건을 가지고 오신다 했으니 지금쯤 정문에 거의 도착하셨을 겁니다!”

원장과 의원들이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돌아온 의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약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추격을 무릅쓰고 도망치려던 의원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

* * *

“무슨 일이지?”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 뒤채에서 한참을 안 나오던 의원들이 모두 버선발로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저자가 뛰어 가기에 쫓아가서 엿들었는데, 치료약을 가진 사람이 온대요. 반 시진이면 낫는 약이래요.]

치료약이라니, 이걸 진짜 치료한다고? 가능해?!

나도 며칠간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헤맸다. 밖으로 연통을 보내 당당에게 치료약 개발을 부탁하기도 하고 안에서도 혼자 애를 썼다.

그나마 효과가 있는 방법은 홍령이 말했던 기 치료 정도였는데, 하루 종일 기를 쓰고 치료해도 다섯 명 전후인 데다 완치가 아니라 증세 완화가 고작이라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죽을 고비에 걸려 있던 환자들만 해당 방식으로 치료하고 나머지는 병증이 심해지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게 고작.

홍령조차 치료법이 하나도 안 듣는 상황에 패닉에 빠졌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히 본원의 장 의원에게 금궤요략에 혹시 관련된 약이 있는지 알아보라 서찰을 보낸 게 어제였다.

설마, 당당이 약을 완성해서 기별할 겨를도 없이 달려 온 건가?

나도 환자를 잠시 두고 정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틈새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 갑놈!]

문앞에 서 있는 자는 그였다. 객잔에서 제 수하의 목에 검을 들이댔던 자. 내가 그의 앞을 막아섰었지.

“어서 오십시오, 소협! 반야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환영이고 뭐고, 이거나 받지?”

그가 손에 든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는 원장의 발치에 떨어져서 원장은 허리를 숙여 주머니를 주워야 했다. 그는 그게 몹시도 마음에 드는 듯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소협, 이것이 그?”

“그래. 치료약이다.”

원장이 주머니 안에서 붉게 빛나는 가루 한 줌을 꺼내들었고, 의원 하나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겁니다! 그걸 반 수저 먹자 다 죽어가던 환자가 반 시진도 안 되어서 회복되었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병상에 누워 있던,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이 웅성거리며 마당으로 나왔다.

“치료약이라고?”

“반 나절이면 낫는대!”

“저분이 약을 가져오셨다나 봐!”

환자들이 웅성거리며 자신을 보자,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두 팔을 높게 펼쳤다.

“이 몸은 모용세가의 모용갑이다! 모용가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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